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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지속 가능 발전위해 대안학교 대안 모색”

“지속 가능 발전위해 대안학교 대안 모색”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7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대안교육 연구센터 설립해서 정책 창출

강소부국 오스트리아 빈 대학 유학 신념

교육과정 관련 현안 공동해법찾는 계기

 

 

-장관 후 TV출연 자제 가을 은행나무 정취 만끽-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대안학교 법제화의 장본인

 

<전호에서 계속>

‘정부가 직접 나서 교사양성을 어떻게 하고 콘텐츠를 어떻게 하겠다기보다는 대안학교 스스로가 하는데 측면 지원해 드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저는 대안학교를 법제화한 장본인으로서 결자해지의 각오로 해법을 찾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1997년도 당시 대안학교 운동을 이끌어 오셨던 분들은 어찌 보면 1세대 대안학교 운동가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들 선구자들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대안교육에 관한 새로운 철학과 지식, 이론, 필요하면 정책대안까지도 창출하는 소위 ‘대안교육 연구센터’를 설립하는 방안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우수 교사 확보라든가, 교육과정과 관련한 현안을 파악하고 공동의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대안학교들의 대안’을 모색해 보십시다.


이러한 혁신의 자세만이 우리 대안교육의 안정적 정착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져오리라 확신합니다.

끝으로, 그동안 저에게 대안교육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 주시고 영감을 던져주신 연세대 조한혜정 선생님, 박청수 원불교 교무님, 들꽃피는 마을의 김현수 목사님을 비롯한 대안교육 관계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드립니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대안교육을 향해 정진하고 계시는 원광대 이강래 선생님께는 이 자리를 빌려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004년 12월 23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안병영 드림

 

 

미국 아닌 오스트리아 유학


안병영 전 장관은 올해 5월15일 펴낸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 저서에서 1960년대 한국에서 ‘외국유학’하면 누구나 당연히 미국을 연상했으나 오스트리아를 택한 신념을 서슴없이 밝혔다.


미국은 역사가 짧아 제도 실험의 경험이나 정책사례의 다양성이 떨어져 자연과학도라면 몰라도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굳이 그 곳으로 유학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제국에서 인구 7백만 명의 약소국가로 전락했지만 나치의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까지 의학 및 자연과학과 더불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논리학과 철학, 경제학, 법학 등 학문마다 고유한 학파를 형성했고 특히 프로이드, 후설, 비트겐슈타인, 노이라트, 슘페터, 포버, 켈렌 등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가장 독창적 학자들의 이론이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서 싹트고 영글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실로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고 한다.


또한 학문과 문화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앞서가던 빈 대학의 전통도 크게 사로잡았다는 것이며 그 곳에는 무언가 학문적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신비의 샘이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이 밖에도 당시 이 작은 나라가 자신을 전율케 했던 또 하나는 동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4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던 나라가 10년간의 끈질긴 정치협상 끝에 기적처럼 쟁취한 ‘중립화 통일’이었다고 꼽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던 분단국가의 젊은이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어서 1965년 10월4일 오스트리아 빈 대학으로 가는 유학길에 올랐다.

 


두 번 장관직 때 일화 털어놔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한 번씩 두 번 교육부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있었던 일화도 대충 털어놨다.

장관을 하다 보면 일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외부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적잖은데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하고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정·재계의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는 리셉션 때는 더 그랬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뿐더러 분위기도 익숙하지 않아 잠시 머물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장관을 그만둔 후에는 TV출연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지금 살고 있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계절 따라 변하는 집 앞의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옛 연구실(연세대학교) 앞 은행나무가 오버랩되어 정겹게 다가온다고 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