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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時·分별로 정보접수 송겮致??名記

時·分별로 정보접수 송겮致??名記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2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7~8평 남짓한 밀실이 교원정보부

국정감사장 옮겨 서류철 뒤져 확인

장관 명령으로 캐비넷 열자 탄압물증

- 86년 8월부터 교원사찰 전담반 설치 감시활동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이철 의원이 밝힌 국감장면

<전호에서 계속>

 

… “중등교원동태파악전담실, 다시 말해 한마디로 ‘교원정보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숨기지 말고 국민 앞에 공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감사장의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야당의원들의 거센 추궁이 뒤따랐다.

정대철 위원장의 격한 경고가 이어졌지만 문교부장관과 간부들은 관련서류 제출을 완강히 거부한 채 사실시인을 머뭇거렸다.

 

결국 현장조사를 제안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정 위원장은 이를 받아 들였고 여당의원들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이철 의원)를 포함해서 평민당의 박석무의원, 민주당의 강삼재의원, 민정당의 김일윤의원이 현장조사를 위한 대표로 선정되어 정부중앙청사 15층의 속칭 ‘교원정보부’를 찾기로 하고 정회가 선포 되었다.

문교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15층을 향하는 마음은 일종의 흥분과 착잡함이 교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면서 총칼과 탱크로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짓밟은 이래 실로 16년 만에 부활한 국정감사 첫날 첫 번째 현장 조사의 실마리를 풀어 비민주적인 강압행정의 실상을 드디어 폭로해 낸다는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도 억누를 수 없이 컸다.

 

‘꼭 이래야 하는 건가’

‘차라리 문교부관계자들이 솔직하게 털어 놓고 관계서류철을 공개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제도와 부당한 정책 시행을 시인하고 앞으로의 개선책을 제시했더라면 모두가 한걸음 앞서 나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깐의 이런 생각도 소용없이 안내된 구석방에서 벌어진 관계자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제 돌이켜 하부직원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방을 안내하면서 “이 의원님, 평소에 여러 가지로 의원님의 활동과 경력을 존경해 왔습니다” 라며 나를 추켜세우는 듯하던 관계실무자들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몇 개의 캐비닛과 서류보관함을 공개해서 서류를 끄집어내 보라는 국정감사 조사단의 요구에 막무가내로 버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의원들에 대한 태도마저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흥분을 누르고 서류 공개를 촉구했다.

쓸데 없는 형식문제로 일을 그르치고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7~8평 남짓한 방에 보도진과 문교부 직원들이 가득 들어차 발디딜 틈조차 없이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고함소리가 오고갔다.

 

 

별게 없다며 버틴 문교부

“이 방에서 하는 업무가 교사들을 보호하는 일을 주로 맡아 본다고 하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오히려 숨기지 말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공개해서 국민들에게 알려 큰 상이라도 받게 해줘야 하는데 왜 굳이 서류제출을 거부하는가요?”

 

이어서 “아니, 자꾸 별게 없다고만 할게 아니라 시원하게 내놓고 그간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받으라고 하는데 숨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다 밝히기 어렵다면 업무일지라도 우선 내놓으시오. 공적인 업무를 맡아보는 기관에 업무처리에 관한 일지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계속되는 닦달에도 불구하고 박 장학편수실장과 박 장학관은 “나중에 정리를 해서 제출하겠습니다. 업무일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면서 의원들에게 양해해 달라고 변명하기에만 급급했다.

 

거의 1시간 가까이 의원들의 호통과 고함에도 끝내 캐비닛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정대철 국회 문공위원장이 15층으로 급히 내려왔다.

 

“아니 무슨 소리인가요.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의결한 사항인데 이런 식으로 대응한다면 감사를 거부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감사위원들을 전부 이 방으로 오시도록 해서 여기서 감사를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문교부장관도 이 방으로 내려오도록 연락하십시오”

 

급기야 장·차관이 15층으로 내려 왔고 거센 항의를 받은 후 김영식 장관은 캐비닛을 열어 관련서류를 의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라고 박 장학관에게 지시했다.

 

장관의 지시에도 멈칫거리던 실무자들은 결국 보관함의 문을 마지못해 열었다.

 

내가(이철 의원) 대표로 한 가지씩 서류 파일을 뽑아 간단하게 제목과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보도진은 카메라를 들이대고 어깨 너머로 파일의 표지에 찍힌 문서제목을 찍기 시작했다.

 

 

장·차관 결재 안 거치고 직보

 

장·차관 결제도 안 거치고 청와대에 직접 보고한 서류철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원집단행동관계철’ ‘해직교사관계철’ ‘교원상황관계철’ ‘전교협관계 자료철’ 등의 이름이 붙여진 두툼한 서류뭉치 속에서는 86년 5월의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열화와 같이 일기 시작한 교사들의 민주화활동 등이 소상하게 보고받아 정리되어 있음은 물론, 집회개최내용, 관련 자료의 수집 해석 평가 대책이 거의 한 가지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일일이 한 가지씩 열거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동태파악’ ‘원천봉쇄’‘핵심분자‘ 등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정보사찰용어들이 즐비했다.

 

마치 공작기관의 작전문서를 보는 것 같은 전율이 느껴졌다.

86년 8월부터 전담반을 설치하여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는 관계공무원의 설명을 대충 들어가면서 모두 8개의 서류 보관용 캐비닛과 파일함을 일일이 다 열어 보자고 했다.

 

비슷비슷한 보고와 첩보가 전국 각 시·도교육청에서 공문으로 혹은 전화통화로 매일매일 쏟아지고 있음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또한 심지어 장·차관의 결재도 없이 담당장학관 전결사항으로 청와대에 직접 보고하고 있는 놀라운 사실도 확인되었다.

 

몇 장씩을 한꺼번에 넘기면서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나 자신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참석했던 게 분명한 민주교사들의 공개집회나 토론회, 공청회 등에 관한 보고서에 내 이름(이철 의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참석격려자 - 이철 의원(서울 성북구), 격려사 내용-교육민주화운동이 결실을 맺기 바란다는 요지임’ 등으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교육관계 집회에 참석하게 될 경우에는 문교부에 사전 통보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이곳이 ‘교원정보부’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단 한 가지라도 보관문서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발췌 공개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사례임을 거듭 밝혀 두고자 한다.

전화연락을 통해 제반사항을 신속하게 보고받고 있던 보고서의 기안지 상단에는 연월일을 표시함은 물론 時, 分까지 정확히 기재하도록 인쇄되어 있고 ‘장학편수실(정신교육전담실)’ 이라 명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