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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총은 반기고 전교조엔 숙적 장관 취임

교총은 반기고 전교조엔 숙적 장관 취임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9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육계 보수세력 힘받아 보란듯 행보

서울사대 동창도 멀게한 정치 권력

전교조와 대립각 불법조치 기회 노려

- 경동교회 신우 尹 위원장 전남대 吳 총장 고우 불구-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장관실 복도까지 화환 줄서

 

이날(1988. 12. 5)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문교부 장관실에 들어선 제30대 정원식 장관은 상기된 표정으로 문전에 도열해 마중 나온 장병규 차관 등 간부들의 인사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취임식은 미리 준비해 온 취임사를 읽으면서 강조한 대목마다 힘을 주었다.

 

요지는 ‘교육계의 화합·총화 단결’이었고 세상사람들이 주목한 ‘교육의 민주화’는 자제된 듯 언급하지 않았다.

 

취임식장은 문교부 과장급 이상 간부들과 서울시교육감 등 직속 및 산하기관장들로 발디딜 틈이 없게 들어차고 장관실은 교육계 보수세력의 좌장급이 보내온 화환과 난분이 복도까지 줄을 서듯 메웠다.

 

이처럼 전날 떠났던 전임자(김영식 장관)의 이임식과 대조적으로 분위기에 활기가 넘쳤고 위세등등했다.

 

취임식이 끝난 뒤 기자실에 들러 출입기자들과 상견례가 이뤄지고 “전교협의 교원노조 결성 움직임에 대한 대응책은 뭐냐?”고 묻자 “이제 막 취임했으니 여러분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무리없이 이끌어 가겠다”고 대답했다.

 

특유의 온화한 표정에서 외유내강의 특성이 읽혀지면서 해를 넘기면 1989년은 교육계에 강풍이 불어닥칠 것으로 예감되었다.

 

이 때 필자(출입기자)도 첫 악수를 나눈 기회에 “교육계의 화합과 총화를 다짐한 만큼 훈풍이 기대된다”고 질문하자

 

“이제는 정부의 처방이 나올 차례가 아니겠느냐?”며 반문했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기 전·후에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엄명이 있었고 무엇을 시사한 것인지 짐작해 보기 어렵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취임 첫 김영식 문교장관에게 “민중교육론과 전교협을 불법조치해서 근절(뿌리를 뽑아)하라”고 엄명한 것이 떠올랐다.

 

이날 장관실 주변은 취임식에 온 축하객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 며칠 후 평소 흉허물없이 얘기를 나눈 전남대학교 오병문(교육대학원장) 교수와 모처럼 만났다.

 

서로 반기면서 “잘 하시겠지요?”라고 말문을 열자 “정 장관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성낼사람이 아닌데 알겠느냐?”면서 “워낙 신중한 사람이라 친구지만 잘 모르겠다”고 뒷말을 이었다.

 

오 교수도 후에(1993. 2. 26) 김영삼 정부의 첫 교육부장관을 지냈으며 정 장관에게 바른 말을 해줄 만큼 절친한 사이었다.

 

정 장관과 오 교수는 서울사대 같은 학번의 동기 반창이었고 6.25때도 정 장관이 오 교수를 찾아 광주에 피난와서 함께 보냈다.

 

이 때 정 장관의 부인이 처녀일 때 전남 화순에 피난와서 광주에 자주 왕래했고 오 교수가 소개해서 미팅이 이루어져 광주시내 중앙통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풍속으로 예식 때는 신랑·신부측의 우인대표가 옆에 섰고 화동으로 남녀 두 아이에게 꽃바구니를 들게 해서 앞자리에 나란히 세웠다.

 

오 교수는 그 때 정 장관의 신랑측 우인대표였으며 교수협회 중진으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해직당한 후에도 매월 정 장관 부부가 쌀값을 보태줄 정도로 우의가 두터웠다.

 

이에 정 장관과 같은 경동교회 신우였던 윤영규 교사가 전교협회장으로 전교조를 결성하기 위해 준비한 것에 오병문 교수가 나서서 정원식 장관에게 선처를 부탁할 만큼 세사람은 죽마고우였다.

 

당시 오 교수가 정 장관에게 제시한 전교조 저지 대안은 한국교총의 전신인 대한교육연합회만 유일한 합법단체로 인정하지 말고 전교협도 인정해서 복수화하는 것으로 수습하도록 했다.

 

오 교수의 이러한 대안은 자신이 대한교육연합회의 대학회원 출신 중앙대의원으로 활약한 바 있었고 그 기회에 일본과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교원단체도 알게 되어 복수화가 추세이며 대세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대안의 핵심은 대한교육연합회는 교장·교감 등 원로교사가 주류를 이뤄 관리직과 교육전문직의 대변에 주역을 담당케 하고 전교협은 교사단체로 독립시켜 쌍방이 소통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전교협의 전교조화를 저지, 교사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을 막아보자고 했다.

 

오 교수의 이러한 제안에 정 장관도 공감했으나 정부의 대책회의에서 공안검사 출신 박철원 청와대 안보담당 특보가 비틀면 성사되기 어려웠다.

 

매사에 신중했던 정 장관이 이 벽을 허물기 위하여 접근할 상황도 아닌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오 교수의 제안은 누가 들어도 먹힐만 했으나 대한교육연합회가 기득권을 쉽게 포기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노태우 대통령이 먼저 선을 그어 불법화 조치 대상으로 꼽은 전교협에 배려가 따를 분위기도 아닌 것을 정 장관이나 오 교수, 윤영규 전교협 위원장도 모르지 않았다.

 

6공 정부의 공안당국이나 통치권자가 교원단체 복수화 대안을 받아들였다면 전교조 결성은 달라졌을 가능성이다.

 

23년 지나 속내 드러나

 

그러나 교원단체의 복수화는 애시당초 수용되기 어려웠던 것이 23년이 지난 최근 정원식 전 장관의 회고담에서 드러났다.

 

정 전 장관은 금년 8월12일자 조선일보 A22면에 보도한 인터뷰에서 “당시 전교조가 표면에 내세운 것은 ‘촌지를 받지 말자’처럼 국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대내적으로는 청소년들에게 의식화 교육을 공공연하게 수행하고 있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러면서 “예를 들면 같은 초등학교 5~6학년들을 모아놓고 잘사는 애와 못사는 애로 가른 다음 상대방을 비판하게 했어요. 그릇된 방향으로 사회를 보는 시각을 심어주려 했던 거지요. 전교조 교사들이 억울하다며 소송을 제기하기에 법정에 나가서 증언했어요. 젊은 교사들이 바르게 교육하기 위한 것이라면 마다할 리 없지만 우리 교육에 뜻을 둔 사람들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라고 23년 전 자신의 본심을 밝혔다.

 

결국 서울 경동교회 신우였던 윤영규 전교조 전 위원장이나 오병문 전 교육부장관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정원식 전 장관과 친분이 두터웠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은 “서울사대 동창도 멀게한 정치 권력의 속성이 실감나더라고 들먹였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정원식 문교장관도 전교조에 대한 불법조치를 단행하기 위해 적용할 기회를 노린 것으로 짐작될 만하다.

 

이렇듯 우정에 금이 가는 것도 불사했고 자리 보존에 진통이 따랐어도 감내할 만큼 교총은 반기고 전교조엔 숙적 장관이었다.

 

사진설명:

‘우정에 금이 가고 자리(장관)에 진통 따른 악연’

 

사진 왼쪽은 1989년 5월 전교조 결성으로 당시 정원식 문교부장관에 의해 해직 투옥되어 구속 재판을 받은 윤영규(좌) 이수호(우) 두 교사가 법정에 섰을 때 모습이며 오른쪽은 금년 8월22일 조선일보 기자의 인터뷰 때 정원식 전 국무총리(이진환 기자 촬영)의 모습이다. 그동안 24년이 흐르는 세월에서 전교조는 합법화 되었고 초대 윤영규 위원장은 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