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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총 대의원 출신 長官 전교조 初心 공감

교총 대의원 출신 長官 전교조 初心 공감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20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사 촌지 안받고 부교재 채택료 거부

당국 ‘문제교사 식별법’ 마련 대처

사립교사 채용 기부금 반환 투쟁 성공

-통일교육 선언문 채택 뒤 현장교육 개선활동 추가-

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

<1993. 2. 26~ 93. 12. 21 재임>

교육장관과 전교조 첫 대면

<전호에서 계속>

 

1993년 4월8일 오후 다섯 시 정부중앙청사 16층 교육부장관실에서 오병문장관과 정해숙 전교조위원장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이날 정해숙 위원장이 청사에 도착해서 장관실까지 들어가는 복도에는 취재기자들과 TV카메라가 따라 붙고 사진기자들이 터뜨린 플래시에 눈동자가 흑점으로 흐려질 정도였고 몰려든 취재진들의 발길에 장관실 화분이 넘어지는 등 전 국민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했다.

 

정 위원장이 장관실에 들어서자 반갑게 맞이한 오병문 장관은 “역사적인 만남입니다”라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정 위원장은 “장관 취임을 늦게나마 축하드린다”고 화답했다.

 

쌍방이 마주 앉은 뒤 정 위원장은 “해직교사 복직은 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감싸 안은 자세로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고 오 장관은 “화해와 신뢰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므로 실무접촉을 계속해서 갖자”고 응답했다.

 

이날 만남에는 전교조 쪽에서 정 위원장과 유상덕 수석 부위원장, 이영주 사무처장, 정진화 부대변인이 나왔고 교육부에서는 이천수 차관과 박용진 장학편수실장, 허만윤 교직국장이 배석했다.

 

쌍방이 나눈 주요 대담은 전교조 측에서 “해직교사들은 학교 밖에서도 각종 교육세미나와 참교육실천대회를 여는 등 꾸준히 연구·실천하고 있다” 면서 “전교조 시·도지부의 각종 연구 활동을 통해 발표된 자료를 제출한다면 아마도 트럭에 싣고 와야 할 정도로 방대하다”고 말하며 의욕을 과시했다.

 

 

교사의 현장교육 개선 치하

 

이날(1993. 4. 8) 오병문 장관은 전교조 위원장(정해숙)과 첫 대면에서 위원장으로부터 1987년 9월부터 1989년 5월, 전교조가 결성되기까지 2년가량 되는 길지 않은 기간에 교육민주화를 열망한 교사들이 현장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갖은 탄압과 맞서 싸우면서 이룩한 활동과 성과를 듣고 치하했다.

 

오 장관은 본래 교수(전남대)시절 교총의 대학회원 대의원이었으므로 전교조 초기의 활동에는 깊이 알기 어려웠다.

전교조 초기의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는 학교 안에 ‘평교사회’를 조직하면서 교육민주화와 학교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장관 취임 후 업무보고를 받을 때도 이런 내용은 없었고 “금시 초문” 이라고 말했다.

 

1988년 8월4일 사립인 광주진흥중학교 평교사회가 당시 문교부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제출하면서 교사 채용 때 헌금한 강제 기부금 반환투쟁을 벌인 내용을 탄원한 것을 듣고 “그런 일도 있었느냐? 정말 처음 알게 됐다”며 놀랐다.

 

교사 채용을 조건으로 챙긴 진흥중학교 재단의 불법 기부금 징수는 11명의 교사가 낸 것만 4,800여만 원으로 그해(88년) 9월1일 돌려받았으며 투쟁에 앞장 선 유양식·반숙희 두 전교협 교사의 공이 컸다고 오 장관에게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 이후 사립학교의 교사 채용 때 받아온 기부금의 반환투쟁은 전국에 확산되면서 당시 문교부의 두 장관(김영식·정원식)에 의해 교사와 재단 측에 쌍벌죄를 적용, 징계하는 촌극을 빚었다.

 

이때 검찰까지 “뒷돈을 준 교사야말로 뇌물을 준 것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엄포였다.

 

그러나 교사들은 “단순한 기부금 반환요구가 아닌, 사학의 정상화가 목적”이라고 밝히면서 당당하게 투쟁했다.

1960년대부터 초·중·고교생이 급증하면서 국가의 교육예산 증액 부담이 무거워지자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사학에 면세 혜택을 주는 등 사립학교 설립을 권장했다.

 

이에 편승한 일부 악덕 사학설립자는 이윤을 추구하면서 교육비 부담을 교사·학생·학부모에게 전가했고 정부는 사학의 비리와 부정, 불법을 묵인 하면서 비호하는 꼴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사학은 일제 때 나라를 찾는데 한 축을 맡았던 교회와 사찰 등 ‘구국사학’과 영리가 목적이면서 육영에 상혼이 발동한 속칭 ‘사학재벌’로 구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교협의 ‘교사 촌지 안받기’와 함께 ‘부교재 채택료 거부 운동’은 효력을 발휘했다.

 

이른바 ‘전교조의 초심’이었다.

 

특히 ‘촌지 안받기 운동’은 담임교사들이 직접 학부모에게 써서 보낸 가정통신문을 통해 “교육은 믿음에서 비롯되는데 촌지로 인한 불신감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의 올바른 관계 맺음에 신뢰를 뿌리 채 흔드는 것이므로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촌지를 없애고 교육 주체 사이의 믿음을 회복하는 일은 교사의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에 전국의 학부모와 국민들은 전폭적으로 환영하면서 ‘교사촌지 척결운동’으로 연계 확산되었다.

 

 

교사의 소신마저 문제 삼아

 

다만, 당시의 정권과 집권층은 이를 문제 교사를 식별하는 데 잣대로 삼은 것이 드러나 웃음을 샀다.

이 대목을 오병문 장관에게 설명한 정혜숙 전교조위원장은 “문제교사 식별법을 문교부가 시·도교육감에게 시달하면서 예시한 항목은 바로 이것이었다”고 제시했다.

 

당시 이를 취재했던 필자(기자)도 입수하여 소장하고 있는 식별법의 항목은 ① 지나치게 열심히 잘 가르치려는 교사 ②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③ 학생들에게 자율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교사 ④ 특별활동 클럽에 신문반과 민속반 등 학생들과 대화가 잘되는 계기를 만드는 교사 ⑤ 탈춤과 민요·노래·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⑥ 유난히 촌지를 거부하며 테를 내는 교사 ⑦ 생활한복을 즐겨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⑧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⑨ 직원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면서 발언하는 교사 ⑩ 학부모와 대인관계에서 유별나게 냉엄한 교사 등 10개항이었다.

이것이 바로 80년대 중반의 교육 관료와 학교관리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삼았던 교사활동의 차단용이 되기도 했다.

 

 

의식화로 몰아서 장학지도

 

아울러 전교협이 벌인 “국방비의 비중 만큼 교육에도 과감한 투자를 요구한다”고 건의한 것에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면서 “반공교육을 지양하고 통일교육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트집을 잡아 “국토수호 방위 능력 신장과 자주국방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당시 문교부 장학지도 지침)”이라며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교협은 1988년 8월, 경기도 고양시 유스호텔에서 열린 임시대의원대회 때 ‘통일교육 실천 선언문’을 채택하고 교육개선 활동에 추가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