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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대입제도 개선 주도권 싸고 피튀는 싸움

대입제도 개선 주도권 싸고 피튀는 싸움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1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노무현 참여정부 안팎의 끝모를 혈투

진보와 보수 균형배치 뒤안길 낙수

혁신위 산하 특위 구성되자 관계 악화

 

-최종 시안 드러나자 새로운 전선 형성 교육부 협공-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대입시 세력간 다툼과 갈등

 

2. 교육인적자원부와 교육부총리

 

<전호에서 계속>

그러나 입시제도 개혁이라는 사안이 워낙 중차대할 뿐더러 혁신위원회의 이념적 편향성이 위험수위를 맴돌고 있으므로 교육부의 수장인 안병영 장관은 2003년 말 취임초기부터 혁신위의 활동 전반에 걸쳐 예의 주시하며 여차직하면 일전을 불사할 결연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후 안 장관은 교육부가 대입시의 실질적 시행주체이므로 그 제도개혁과정에 적절한 관여는 당연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기회있을 때마다 집요하게 의도적으로 개입을 시도했다.

 

2004년 전반기에 한달에 한번 정도 혁신위 전성은 위원장과 조찬회동을 가지며 2008 대입개선안 준비상황 및 기타 혁신위의 교육혁신사업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 때 전성은 위원장은 교육부와 갈등을 회피하려는 입장이었으므로 분위기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그러던 중 2004년 3월, 혁신위 산하에 대입제도개선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자, 안병영 장관이 이에 적극 개입하여 보수적 인사인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를 위원장으로 강력하게 추천, 그 뜻을 관철코자 했다.

 

아울러 특위 구성에도 관여하여 진보와 보수를 균형있게 배치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렇게 해서 2004년 8월 19일 대통령이 주재한 국정자문회의까지 ‘2008 대입제도 개선’의 정책수립 과정은 혁신위와 교육부 간의 치열한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당시 안 장관은 혁신위원회 비상임위원이며 차관(서범석·김영식)이 당연직 운영위원일 뿐더러, 몇몇 교육부 과장들이 전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좁은 길목이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참여 루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교육부는 나름대로 이들 공식적 통로 외에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해 대통령 및 청와대, 당, 그리고 언론과 시민사회 등 영향력있는 당사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교육부의 입장을 알리며 혁신위와의 대결에서 이들을 우군(友軍)으로 포용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한때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국무총리도 교육부 방안에 대해 공감을 피력했다.

 

이러한 줄기찬 노력과 함께 교육부는 혁신위의 개선안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자체안으로서 ‘2008 대입제도 개선’의 주요 쟁점에 대한 집중적 연구에 나섰다.

 

안 장관 주재 하에 연일 전문적 논의와 분석도 계속했었다.

 

교육부의 기본적 입장은 공교육 정상화라는 공동목표아래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을 모으고, 이를 위해 학교생활기록부 비중을 강화하며 수능의 비중을 낮추고, 대학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권장하면서, 이 모든 것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점진적으로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교 교육과정이 개선되고 학생부의 신뢰도가 높아질 때까지 수능도 적정수준의 변별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에 집약했다.

 

그 해 (2004) 8월 19일 대통령 주재 국정과제회의에서 ‘2008 대입 개선안’의 주도권이 교육부로 넘어 오자, 혁신위와의 치열한 갈등과 논란은 대체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9월 이후 대입제도 개선시안이 가시화 되면서 새로운 전선(戰線)들이 형성되었는데, 그 하나는 혁신위의 급진적 입장을 두둔한 청와대였고, 다른 하나는 대학과 보수언론이었다.

 

교육부는 그 중간에서 양측으로부터 협공을 받으며 자체의 개선안을 지키기 위해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대입개선안이 확정, 공표된 2004년 10월 27일 이후에 교육부는 정부의 대리자로서 진보진영의 측면지원을 받으며, 보수진영과 대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3.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교육문제에 비교적 높은 관심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다.

과거 국회의원 시절, 한 때 교육위원회에 소속한 경험도 있어 대부분의 주요 교육쟁점에 관해 익숙했고 자신의 전문적 식견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평등지향의 진보적 성향을 지녔으나, 혁신위 등의 지나친 이념지성향에 대해서는 얼마간 유보적 입장을 견지하며, 교육현실과의 조화를 꾀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입시개혁의 목표 설정에 있어서도 대학서열구조 해체와 같은 혁신위의 근본주의적 변혁 목표와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공교육정상화와 사교육비 절감 등 현실감있는 목표를 더 선호했다.

 

노 대통령은 ‘고교등급제’는 확고하게 반대하였으나, “대학의 선발자율권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대국민 설득력이 있다. 현재 대학들은 자율권을 더 요구하고 있는데, 뺏어오겠더눈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대학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선용하도록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제27회 수석비서관 회의, 2004.9.30)” 는 입장을 피력했다.

노 대통령은 혁신위와 교육부간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 한편에만 크게 치우치기 보다는 조정과 중재를 꾀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교육부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각론에 있어서는 교육부 안에 대해 우회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주지되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특히 집권 초, 중기동안 교육부 및 교육부 관료들을 크게 불신했고, 교육부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8년 입시안의 향방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던 2004년 8월 19일 청와대 국정과제회의에서도 노 대통령은 형식적으로는 마지못해 교육부 안인 9등급에 손을 들어주었으나, 구체적 배분방식은 추후토론과제로 미루고, 배후에서 혁신위 안인 1등급 7%를 강력히 지원하는 등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 수석 중,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은 노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혁신위의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대변하였다.

 

그는 혁신위의 김민남 상임위원과 같은 직장(경북대)의 동료로서 절친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 동지로서 혁신위의 현실과 동떨어진 평등주의적 입시안을 시종일관 뒷받쳐 주었다.

 

이정우 위원장 외에도 청와대의 이른바 ‘386’인사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혁신위의 지원세력이었다.

 

이들은 여당 내의 ‘386’세력들과 전교조 등 진보적 시민세력과 연대하는 한편으로 대통령에게 지속적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부에 가공할 압력을 구사했다.

 

청와대 내에서는 온건 개혁성향의 이원덕 사회문화수석이 교육부 입시안에 대해 가장 큰 공감을 갖고 있었고, 시종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청와대 내에서 그의 발언권은 매우 약해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고 김병준 정책실장 또한 교육부 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내심 지원하는 입장이었으나 청와대 내의 압도적 반(反) 교육부 기류 때문에 나서서 옹호하고 관여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4. 대학 및 고교

대학들은 기본적으로 대입전형에 대한 주요 사항에서 선발주체인 대학 고유의 몫이라는 생각을 바꾸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선발)자율성은 대학이 양보할 수 없는 모든 사고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대학입학에 대한 교육부의 관여에 대해서는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성향을 지녔고, 이러한 경향은 특히 명문대학 내지 상위권대학의 경우 보다 수능성적과 같은 가시적, 객관적 지표를 선호하는 것으로 강하게 드러났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