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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문민시대 첫 교육부장관 출산에 진통

문민시대 첫 교육부장관 출산에 진통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5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임명장 수여 2시간 전 아침 난산 통보

5·18과 전교조 등 광주권에 연계 물망

국제교원노조연맹 결의 새 정부 긴장

-최대 교원단체 IFFTU와 WCOTP 해산 후 E·I 창립-

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

<1993. 2. 26~ 93. 12. 21 재임>

 

힘 없으면 장관 돼도 힘들어

 

6공 노태우 정권을 이어 받듯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첫 조각은 교육부장관 인선을 맨 나중에 매듭지으면서 장관이 임명장을 받는 것도 순탄치 못했다.

 

이 날이 1993년 2월26일이다.

 

하루 전날부터 언론에 조각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입각 대상 명단까지 나돌았으나 교육부장관은 점치기 어렵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다만, 호남권, 특히 광주지역 인물이 물망의 대상처럼 떠올랐다.

 

광주는 5·18과 전교조의 본산, 김대중 와성으로 꼽히면서 양 김(김영삼·김대중)의 정치산술과 역학관계가 맞물린 것에 관심을 모았다.

 

이 와중에 교육부장관은 누가 되는 것인지 탐문하기에 바빠진 출입 기자들은 조규향 차관실에 몰렸다.

조 차관은 이날도 청와대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것 말고는 외부 일정이 없었다.

또 청와대에 들어갔다 온 것도 다음날 장관 취임식 준비와 관련된 것 이상 얻어 들을 수 없었다.

 

오후 6시 퇴청시간이 임박했을 때 차관실 앞의 복도에서 마주친 조 차관에게 “낌새가 있느냐?”고 묻자 “들은 것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라고 시침을 뗐다.

 

이에 “벌써 타 부처 장관은 서울에 와서 취임할 준비로 바쁘다는데 교육부만 깜깜”이라고 응수하자 “그런 말은 어디서 듣나요?”라고 계속 딴청이었다.

 

결국 조 차관을 통해 장관이 되는 사람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겠다고 판단되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들어선 박관용 실장과 연줄이 닿을 만한 교육부 인맥으로 관심을 돌려 이기우 행정관리담당관을 찾았다.

 

이 담당관은 부산고교 출신인 박 실장의 후배이며 김영삼 대통령과 고향이 같은 거제도 태생이었다.

이기우 담당관실에 들어서자 “웬일이냐?”며 “내한테도 볼 일이 있느냐?”고 거푸 물어왔다.

 

“있고 말고.… 장관이 취임하면서 인사가 있게 마련이고 그 때는 이 담당관도 오늘 이 자리가 마지막일 것 같아 들렀다”고 대답하자 “턱도 없는 소리 마쇼! 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네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새 정부의 첫 교육장관도 교수가 올 것으로 후문이 파다한데 아직 거제 출신은 거명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산·경남 쪽은 아닌 것 같고…” 여기까지 말을 잇자 “어째 그쪽만 생각합니까? 호남선도 있는데…”라고 얼버무렸다.

 

이는 영남권이 아니라 호남권을 뜻한 것으로 전남·북이 아니라 광주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감이 잡혔다.

기자에게 정보란 표정과 언급된 내용에서 흐리는 쪽에 집약한 것을 추리해 보면 풀어내기 쉽다.

 

잠시 후에 전남대학교의 김상권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병문 총장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 사무국장은 “좀 알려주라. 지금 사방에서 총장님 소재를 묻고 서울에 가셨느냐? 묻는 전화만 빗발치는데 이 시간 현재도 총장님은 안에(총장실)계시니 우리도 답답할 뿐”이라고 했다.

 

기자들끼리 만나면 “왜 오 총장이냐?”고 의문이었지만 인권변호사들의 동향에서 가능할 것으로 감이 잡힌 것이 근거였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뒷날 아침 7시쯤 광주시내의 오병문 전남대 총장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오 총장이 “누구세요?”라고 묻더니 “오! 자네구먼! 그런데 신새벽같이 웬일인가?”하고 되묻는다.

“오늘 오전에 장관으로 취임하실 분이 아직도 광주에 계시느냐?”고 묻자 “이 사람아! 뭔 연락이 있어야 가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아직 아무 기별이 없어”하면서 수화기를 놓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8시쯤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오! 자네구먼. 나 지금 급히 나가는 길인데. 이제사 알려주면서 10시에 임명장을 받으라고 하니 광주서 서울까지 어떻게 오라는 건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뒤이어 김상권 전남대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조 차관님께서 고속도로 순찰대에 연락해줘서 총장님 차로 모시고 가기로 했다”면서 “총알택시보다 더 빠르게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고속도로 순찰대가 캄보이해서 10시 전에 서울에 도착하거나 대통령의 장관 임명장 수여식을 늦추거나 양자택일하는 것 이상 묘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해서 1993년 2월26일 제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이 탄생하고 임명장은 예정보다 늦춰 수여했다.

이때 서울에 도착한 오 장관은 긴장해서 진땀을 쏟았고 속옷이 다 젖은 상태였다고 한다.

취임 후 차 한 잔 나눌 기회에 그 때 일을 묻자 “장관이 되는 것 보다 이러다 길에서 죽는 것 아닌가 싶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면서 “힘없는 사람은 장관이 되어도 힘들더라”고 하소연이었다.

 

 

국제교원단체 동향에 영향

 

다른 부처의 장관들은 결정이 빨라서 여유있게 서울에 입성하고 청와대에 들어가 임명장을 받기 쉬웠고 취임준비도 수월했으나 오병문 교육부장관의 경우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때문에 달랐다.

 

더구나 서울에 연고도 없었고 거처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아서 고속버스터미널 뒷 편에 있는 소형(28평)아파트에 전세로 겨우 숙소를 마련했다.

 

후문에 따르면 오 장관의 임명은 당시 5·18도 영향이 컸지만 전교조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도 선거기간 후보의 공약에서 전교조 합법화에 긍정적으로 임했던 터라 전교조 신임 위원장인 정해숙 여성위원장의 고장인 광주에 무게를 둔 것 같았다.

 

당시 전교조는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5대 위원장과 수석 부위원장, 시·도지부장을 직선으로 선출했고 이 때 정해숙 교사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정 위원장은 오병문 전남대 총장과 교분이 두터웠고 시국 문제에도 교감이 되고 있었다.

또 전교조의 5대 위원장을 뽑을 당시 윤영규 4대 위원장은 지명수배가 된 상태로 목포시 인근의 요양원에 숨어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국제교원사회는 1993년 1월26일 세계 최대 교원단체인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IFFTU)과 세계교원단체연합(WCOTP)이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각각 총회를 열어 해산을 결의하고 다음날 국제교원단체총연맹(E·I)으로 재창립 출범했었다.

 

이 때 E·I는 규약에 ‘교육노동자의 노동조합과 전문직 권리보장, 교육 발전을 통한 세계인권선언 적용, 교원·교육노동자의 전문적 지위강화와 교육정책형성의 참여, 인권과 노동조합 권리를 탄압하고 있는 나라에서 교원과 교육노동자의 자주적 민주적 단체 발전을 진전시키는 것’ 등을 목적에 담아 명시했고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전교조는 E·I에 가입할 절차가 마련되지 않아 어려웠으며 1993년 9월30일에야 E·I집행위원회에서 가입이 결정되어 회원이 될 만큼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93년 2월에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도 이를 미리 내다보고 기존의 교총뿐만 아니라 전교조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교육부의 역할과 기능에서 배제하기 어려웠다.

 

특히 1993년 1월25일 국제교원노조연맹이 해산되기 직전 마지막 총회에서 독일과 네덜란드교원노조가 공동으로 제출한 ‘한국의 전교조 인정과 1천5백여 명 해직교사 복직에 관한 긴급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채택한 것에도 김영삼 정부는 교육부장관 인선에서 배제할 수 없는 중요 현안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상황은 김영삼 정부가 전교조를 인정하고 합법화 하기에 앞서 노태우 정부에서 강제 해직한 1천5백여 명의 전교조 가입 교사들을 복직시킨 것부터 서두른 것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다음 김대중 정부가 합법화하는데 디딤돌이 된 것으로 국제교원단체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아울러 기이한 것은 전교조와 적대관계인 한국교총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인 거제도 출신 충남대학교 윤형원 교수가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 대통령이 윤 회장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비쳐진 적은 없었지만 전교조에 대한 김 대통령의 해법에 저지노력이 있었을 것은 짐작해보기 어렵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