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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바람타고 왔다 구름처럼 떠나가듯 무상

바람타고 왔다 구름처럼 떠나가듯 무상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53회) -

○… 본고는 50년 넘게 교육정책 산실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또한 생존한 전임 장관들의 자료제공에 도움받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 〈편집자〉 …○

 

해왔던 대로 차질없이 잘해보려 애써

현직 황 장관 국회 교육위 야당의원

교육과정정책심의관 신설 편수 보완

-장관 바뀌면 동반입각 차관도 함께 경질 권력 속성-

김대중 정부 두번째 임명

39대 김덕중 교육부장관

<1999. 5. 24~ 2000. 1. 13 재임>

 

대우그룹 아주대 총장 기용

 

1999년 5월 ‘스승의 날’과 연이은 교육주간을 맞으면서 초·중등교육계의 분위기는 얼어붙은 듯이 냉기류였다. 교원들에게 지나치게 청렴을 강조했고 여교사가 학부모들로부터 스승의 날 받은 선물 중 루즈의 숫자까지 밝히면서 사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경직되었다.

 

때문인지 정치권은 집권당에서 조차 “이런 분위기로 교원들의 민심이 돌아오겠느냐”면서 걱정했다.

 

드디어 개각설이 나돌고 5월 마지막 주 초가 되자 교육부 장·차관의 경질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 때 개각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해찬 교육부장관을 경질(5월23일)하고 후임에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 맏형인 김덕중 아주대총장을 임명, 5월24일 취임했다.

 

김 장관은 취임사를 통해 특별히 강조한 것이 없었고 첫 기자간담회에서도 상견례 수준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교육부 간부회의에서 “지금까지 전임 장관님들이 잘 해 오셨고 여러분도 보필 잘하고 충실하게 보좌했기 때문에 지속 가능했다”면서 “해왔던 대로 차질없이 잘 해보자”고 당부했다.

 

취임한 바로 다음날(5월25일) 차관인사가 이어지면서 조선제 차관도 경질되어 청와대 교육수석(조규향) 실의 이원우 교육문화비서관이 후임으로 임명되어 5월26일 취임했다.

 

이와 같이 김덕중·이원우 체제의 교육부는 6월 상반기를 정리하고 후반을 열어갈 준비로 바빠졌다.

 

이는 부내 인사를 의미한 것으로 장관실부터 이원근 비서관이 유선규(현 충청대총장)로, 차관실 비서관은 박표진에서 송지관으로, 감사관은 이기호에서 구관서로, 총무과장은 장기원에서 강병운으로 바뀌었다.

 

또 교육부의 재외동포교육 전담 국제교육협력관은 이종서에서 고용으로, 기획관리실장은 김성동 실장을 유임시켰다.

 

그러나 휘하의 기획예산담당관은 이영찬에서 황인철로, 행정관리담당관은 유상번에서 김용호로, 법무당당관은 신양승에서 김철로 바꿨다.

 

학교정책실장은 박찬구에서 임동권으로, 교육과정정책심의관을 신설해서 이수일 장학관을 임명하고 바로 밑에 교육과정정책과를 두어 이경환 장학관을 앉혔다.

 

이처럼 김덕중 장관의 취임으로 학교정책실의 교육과정·교과서 편수 기능과 역할이 보강되고 교육과정정책심의관 밑에 교육과정정책과와 교육평가팀(팀장 김진규) 교과서발행과(과장 이현묵) 학교정책과(과장 고원영) 유아·특수교육과(과장 이석무)를 둔 것으로 활성화 됐다.

 

교원행정도 보완해서 교원정책과(과장 정연한) 교원양성연수과(과장 한병천) 교원복지담당관(서명범) 업무를 강화했다.

 

평생교육국장은 김용현에서 차현직으로, 그 밑에 평생학습정책과장은 김국현에서 이지헌으로, 산업교육정책과장은 정기호에서 백종면으로, 전문대학지원과장은 이현묵에서 노승회로, 학술연구지원국을 고등교육지원국으로 바꿔 국장을 정상환에서 김용현으로, 대학제도과장을 대학원지원과로 바꾸면서 김화진 과장을 유임시켜 그 밑에 두었다.

 

교육환경개선국은 교육자치지원국으로 바꿔 이기우 국장을 유임 시키고 지방교육재정과장은 정영선에서 변창율로, 지방교육자치과장은 우형식으로, 학교시설환경과장은 김기남을 앉혔다.

 

 

3당 포진 국회교육위 영향

 

당시 국회교육위원회(현행 교문위)는 전임 이해찬 장관 때와 달리 김덕중 장관에게는 넘볼 수 없는 벽이었고 배려를 바라기 어렵게 야당이 된 한나라당에서 위원장(함종한·강원도 원주 갑)을 차지했다.

 

이처럼 ‘여의도 큰 집’이라고 부를 만큼 국회의 영향력은 교육부장관에게 어려운 상대였다.

 

정당별 포진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위원장 외에 6명으로 간사 이원복(인천 남동을)의원, 박승국(대구 북갑)의원, 오양순(전국구)의원, 안상수(인천 계양·강화갑)의원, 이재오(서울 은평을)의원, 황우여(전국구·현 교육부장관)의원이 자리를 지켰다.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6명은 간사 박범진(서울 양천갑)의원, 김봉호(전남 해남·진도)의원, 노무현(서울 종로·후에 대통령)의원, 신영균(전국구)의원, 설훈(서울 도봉을·현 교문위원장)의원, 이영일(광주 동)의원이었다. 여당과 연정체제였던 자유민주연합(총재 김종필)은 3명으로 간사 김일주(경기 안양·만안)의원, 김허남(전국구)의원, 김현욱(충남 당진)의원이 재임했다.

 

 

개편된 교육부의 초기 정무

 

김덕중 장관이 취임한 첫날(99·5.24) 교육부 직제가 일부 개정(대통령 제163435호)되어 교육과정정책심의관이 신설된 것은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교육과정정책분야와 교과서 편찬 및 발행기능을 보강한 것으로 과 단위 역할까지 보완했다.

 

특히 교육과정정책과는 과장(이경환) 밑에 장학관 4명(이동길·정국진·홍진기·박수용)과 교육연구관 8명(이순영·오영석·김정자·윤준영·한창만·고광붕·최성규·유연수) 교육연구사 13명(박정자·조상제·이정규·주수동·김만곤·박삼서·노희방·장영기·박제윤·이승균·박은영·김송미·이우용)을 배치했다.

 

교과서발행과(과장 이현묵)는 교육행정사무관 2명(서광협·강대양)과 교육연구관(정광삼) 연구사 2명(노시백·윤경식)을 배정했다.

 

그러나 2001년 1월29일 김덕중 장관의 후임인 문용린 장관 때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교육부도 변경되면서 교육과정정책심의관을 폐지해 사라졌다.

 

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이에 앞서(99.5.24) 재외동포용교과서 업무를 교육부에서 이관 받았다.

 

1999년 7월8일 김덕중 장관은 한문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 조정과 미래 한문교육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조정자문협의회’를 구성하고 2주일이 지난 7월22일 조정 방법 및 절차를 확정했다.

 

김 장관은 이에 근거한 기초연구를 1999년 8월29일 ‘한문교육학회’에 의뢰하고 12월30일까지 마련해 주도록 했다. 이때 연구결과는 김 장관이 떠난 2000년 6월14일 공청회를 열고 여론을 수렴했다.

 

 

7개월 19일 재임 단명장관

 

김덕중 장관은 1999년 5월24일 임명, 취임하여 이듬해인 2000년 1월13일 경질되면서 7개월 19일 재임한 단명이었고 동반 입각한 이원우 차관도 99년 5월26일 임명되어 2000년 1월26일 떠났다. 바람타고 왔다 구름처럼 떠나간 것으로 권력은 무상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