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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재임 23일 만에 바꾼 경륜무색 단명 장관

재임 23일 만에 바꾼 경륜무색 단명 장관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61회) -

서울대 교수 뒤이어 사립대 총장 기용

차관은 머리 무겁고 뒷수습에 바빠

취임후 나돈 3주면 경질설 적중 신통

-교육부 앞지른 서울시교위와 교육청 강팀 포진 압권-

○… 본고는 50년 넘게 교육정책 산실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또한 생존한 전임 장관들의 자료제공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게 한다. 〈편집자〉…○

 

김대중 정부 네번째 임명

41대 宋 자 교육부장관

<2000. 8. 7~ 2000. 8. 29 재임>

서울大서 延大로 權力이동

 

<전호에서 계속>

김대중 정부의 네 번째 교육 각료로 송 자 연세대 총장 출신이 임명되어 2000년 8월7일 취임하자 교육부 안팎에서 “유비통신 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고 화제로 삼았다.

 

‘유비통신’이란 유언비어를 함축한 소문의 진원불명 상태를 뜻한 것으로 정부 인사 때마다 볼 수 있었고 누구도 예고의 적중력에 놀란다.

 

전임 문용린 장관이 한자교육 때문에 고심하면서 묘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개각이 단행되었고 교육부도 예외 없이 장관이 경질된 것으로 동요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특히 전임 문 장관이 서울대(사대) 교수 출신이었던 점에서 신임 송 장관은 사립 연세대 총장 출신인 것을 놓고 교육부 권력이 서울대에서 연세대학쪽으로 이동해간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또 송 장관은 연세대 총장 재임 시에 학교재정이 어려운 것에 발 벗고 나서 수습해서 운영을 반석위에 올려놓을 만큼 열정적인 것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장관으로 천거된 요인인 것처럼 후문이 나돌았다.

 

또한 장관이 바뀌면 가장 머리가 무겁고 아픈 쪽은 교육부차관이었다.

 

당시 김상권 차관은 떠나는 장관(문용린)의 이임식과 들어온 장관(송자)의 취임식을 치르는 일 못지않게 부내 인사 요인을 간파할 예지력이 긴요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8월은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다음 해의 예산안이 정부안으로 확정될 단계이고 1학기가 끝나 여름방학이면서 2학기 대비에 이어 9월 정기국회를 앞둔 때라 밤잠을 설치면서 대처할 시기였다.

 

이미 국회에 넘어가 심의 중인 법안을 비롯해 예산안 부수법안의 처리는 차관의 사전 대비여하에 성패가 좌우되는 것은 여의도 풍속이다.

 

이 와중에 신임 장관이 차관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따라 차관인사가 뒤따르는 특성에서 자유로워지기 어렵고 떠나간 장관의 모습이 어쩌면 차관의 모습까지 예고한 결과가 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전임 장관 때 이미 교육부의 중진들이 대부분 서울시교육청으로 빠져나가 아쉬움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차관이 장관 몫까지 감당해야 하는 역능(역할과 기능)은 쉽지 않았다.

 

갓 취임한 송 자 장관의 모습은 취임사가 의외로 간략했고 뜻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난해하다”는 후문이 따른 터이라 “얼마 동안 지켜보면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격려한 주위의 조언에도 반응하기 어렵게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새 장관도 “오래 못 간다” 소문

 

그런데 “새 장관도 오래가기 어렵겠다”는 불길한 예언이 하필이면 서울시교육청에서 흘러 나왔고 진원은 시교위 위원들 쪽으로 의심의 눈초리가 쏠렸다.

 

당시 서울시교위 위원과 의장단은 교육부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관변 정보에 밝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교위 의장은 김두선 초등 전문직 출신이었고 이순세 부의장은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었다.

 

이밖에 교육위원 13명(김홍열, 신창현, 지용근, 민경현, 정용성, 유해돈, 장창식, 임헌만, 채정묵, 김한태, 공정택, 박명기, 서성옥)까지 교육부 출신을 비롯해 교육장, 교육청의 초·중등 과장 등 교육전문직 경력자와 전교조 출신이었다.

당시 전교조 출신과 교수 가운데 재야세력권의 구성원 대부분은 김대중 대통령의 수난기에 동지적 관계로 끈끈한 인연이었고 유인종 서울시 교육감은 교위 의장 출신인데다 임동권 부교육감도 교육부 장학실장에서 임명되어 재임하고 있었다.

 

송영식 기획실장, 이상갑 교육정책국장, 김남일 교육행정국장까지 교육부 출신으로 얼핏 보면 교육부 한쪽이 서울시교육청에 옮겨간 듯 싶게 만만치 않았다. 때문인지 교육부의 돌아가는 사정이나 청와대를 비롯해 국회와 정치권의 여·야수뇌부까지 이들의 연줄은 안테나 역할로 손색이 없었고 가동되었다.

 

그러니 신임 송 장관을 놓고 “오래 못간다”는 ‘유언비어’에 주목하게 되면서 그 것도 ‘3주’라고 기간을 밝혀 장담한 대목은 임명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을 꿰뚫어 보듯 영험했고 송 장관은 예언처럼 8월29일 경질되어 취임 23일 만에 어이없이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41대 송 자 교육부장관의 발자취는 드러난 것이 없고 어떻게 왔다가 가게 되었는지 기억 조차 할 수 없게 허망했다.

 

취임식 때 밀려든 축하 난분과 화환이 시들기도 전에 이임식을 보게된 당시 교육부직원들의 짐작에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을 만큼 짧은 기간 재임하다 퇴임했다.

 

 

延大가 낳은 長官 중 최단명

 

교육부장관 취임 23일 만에 떠난 송 자 장관은 역대 교육부장관 가운데 연세대 출신 7명 중 최단명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해방 초의 제2대 백낙준 문교부장관(1950.5.4~52.10.29)을 비롯해 제8대 오천석 장관(60.8.23~61.5.2) 등 80년대의 신군부 전두환 대통령 집권 때부터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정부까지 재임한 연세대 출신 교육각료는 이규호·윤형섭·박영식·안병영 장관까지 7명이며 안병영 장관은 노무현 정부 때 재입각한 것으로 관운이 좋은 편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때 제25대 이규호 장관은 80년 5월22일 임명되어 83년 10월14일까지 3년이 넘게 장수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의 제31대 윤형섭 장관은 90년 12월27일부터 92년 1월22일까지 2년간 재임했다.

 

윤 장관 때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개칭되어 김대중 정부의 이돈희(42대) 장관 때까지 지속되다 한완상 부총리 겸 장관 때 교육인적자원부로 개칭되었으며 이에 앞서 김영삼 정부의 연세대 총장 출신인 제35대 박영식 장관은 95년 5월16일부터 그 해 12월20일까지 7개월 이상 재임한 것으로 1년 미만이었다.

 

같은 정권의 김영삼 대통령이 임명한 제36대 안병영 장관은 95년 12월21일부터 97년 8월5일까지 1년 8개월 재임했다.

안 장관은 그 이후 노무현 정부 때도 제46대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되어 2003년 12월24일부터 2005년 1월4일까지 1년 1개월 이상 재임했으며 박정희 대통령 때의 권오병(65. 8.27~66. 9.25 및 68. 5.24~69. 4.10)장관에 이어 두 번씩 한 재임한 것으로 기록을 세웠다.

 

이렇듯 장관 재임기간이 짧아도 몇 개월 또는 1년 이상 3년까지 장기간인데 반해 1개월도 안 되는 단명은 송 자 장관과 노무현 정부 때 단 3일(2005.1.5~7)이었던 이기준 장관을 꼽게 된다.

 

한 번도 어려운 것을 두 번씩 역임한 장관이 두 명(권오병·안병영)이었고 이 가운데 안병영 장관은 연대 교수 출신이었으며 3년 이상 장수를 누린 장관(이규호)도 연대 교수 출신이었다.

 

또 연대출신 교육부장관 가운데 고인이 된 경우는 백낙준, 오천석, 이규호, 박영식 장관이며 나머지 3명(윤형섭·안병영·송 자)은 생존했고 정정하다.

 

이들 생존한 장관들에 의해 재임 당시의 주요 교육정책과 그 뒤안길에 얽힌 비화를 듣는 것에서 의미가 새롭고 발자취를 더듬어 볼 기회가 되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

 

특히 안병영 전 장관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숲속에 산장을 짓고 ‘현광제’라고 이름을 붙여 부부가 함께 노후를 신선처럼 해로한 것은 훗날 전설이 될 법하다.

 

이처럼 오복을 타고 태어나서 누리는 것은 흔치않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