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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전교조의 “대화요청”에 “해체 먼저” 강요

전교조의 “대화요청”에 “해체 먼저” 강요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2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육성회 어머니회 통해 탈퇴종용 권유

학부모대회 15회 19만3800명 동원

징계 파면 불구 잔류에 ‘불사조’ 별칭

-정권말기 체제정비 차관 등 경질않고 안정화 도모-

32대 조완규 교육부장관

<1992. 1. 23~ 93. 2. 25 재임>

6공의 교원노조 해체 강수

 

<전호에서 계속>

6공의 노태우 정부는 교원노조의 강렬한 주장과 일부 교원노조 가입교사들의 학생에 대한 편향된 의식화 교육 등을 이유로 육성회·어머니회 등의 학부모와 동창회원들이 교원노조 결성을 저지하고 탈퇴를 설득하는데 동참하도록 동원했다.

 

이에 탈퇴 교원이 급증함에 따라 교원노조 측은 정부에 대해 징계절차 진행을 중지하고 ‘교원노조 실체인정을 전제로 한 대화’를 요구했으나 정부는 “선 해체 후 대화”라는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

 

그리고 교원노조의 불법성과 부당성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통해 교사와 학부모들의 이해와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면서 미탈퇴 교원에 대한 징계조치와 행정적 대응활동을 통해 교원노조를 와해하고자 했다.

 

집중적인 설득과 간곡한 종용에도 불구하고 끝내 교원노조의 탈퇴를 거부한 교사들에 대해서는 전원 징계에 회부해 해직 조치했다.

 

이들 해직교사들은 각종 대응 집회를 개최하고 출근투쟁을 전개해 학생과 현직교사들의 동정을 유인했으며, 재야단체와 연계해 극한적인 정권타도 투쟁을 시도했다.

 

1987년 말 1만2000명에 달했던 교원노조 가입교원 수는 정부당국 및 학교 행정가들의 탈퇴 설득과 병행한 중징계 방침 강행으로 1989년 말까지 152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퇴했다.

 

미탈퇴 교사들은 1990년 초기까지 전원 징계 해직함으로써 교원노조는 조직이 와해되었다.

 

6공 정부는 교원노조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에 대하여는 그 활동을 지원했으며, 시·도별 교육정상화 촉구 학부모대회가 시·도교육청에서 15회 개최되어 19만3800명의 학부모를 동원 참석시켰다.

 

그 이후 김영삼 정부는 해직교사들을 복직시켜 주었고, 김대중 정부는 전교조를 합법화 했다.

 

노무현 정부는 전교조의 활동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이를 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내가 세운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더라면 불필요한 국론의 소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6공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한 조완규 장관은 부내 인사는 변동없이 대통령의 남은 임기동안 교육부를 이끌면서 보필할 결심이었다.

 

1992년 2월에 접어들자 음력은 구정을 맞은 때라 새해를 여는 덕담이 무르익었다.

 

우연히 장관실 문앞의 복도에서 조 장관과 마주친 김에 “앞으로 부내 인사는 없는 것이지요?”라고 묻자 “인사 좀 했으면 좋겠어요?”라며 되묻는다.

 

이에 “기자들은 관심사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거푸 묻자 “거참 죄없는 공무원들 자꾸 불안하게 하면 일손 안잡힙니다. 이게 내(장관) 대답이에요. 됐지요?”하면서 반문했다.

 

이 때부터 조 장관 체제의 교육부가 새롭게 가동했다.

 

조규향 차관도 경질없이 유임했고 장관비서관은 차현직 서기관이 들어왔으며 공보관은 유해강 부이사관이 맡았다.

차관실 비서관은 정영선 사무관이 유임했고 감사관은 허종갑, 바로 아래 서기관은 최상택 서남수(현 교육부장관) 서기관을 앉혔다.

 

총무과장은 정형진 서기관, 기획관리실장은 이천수 실장이 유임했다.

 

이 때 기획예산담당관은 김성덕, 행정관리 담당관은 이기우(현 재능대총장 전문대학협의회장), 법무담당관은 이병석이었다.

 

장학편수실장은 충북교육감 출신 유성종 실장이 앉았고 편수관리관은 장종택 장학관을 앉혔다.

 

박경재 서기관이 편수행정관을 담당했고 교육과정담당관은 함수곤 장학관과 함께 정영권, 소정자 교육연구관과 김영익, 박정자, 조규석 연구사가 한팀을 이뤘다.

 

인문과학편수관은 한상진(작고) 휘하에 김석진, 한정근, 정준섭, 오병각, 이순영 연구관과 허천행, 심광운, 신란수, 이강정 연구사를 두었다.

 

사회과학편수관은 한명희, 김용만 윤종영, 김걸 연구관이 보좌했고 이창조, 채희두, 최병모 연구사를 배치했다.

자연과학편수관은 김동식, 그 밑에 정성봉, 이기훈, 고석달, 이동길, 구자락, 장명진, 김진락, 황장규, 이규석, 김학영, 연구관과 김진석, 이재혁, 김의장, 임공희, 강행고, 문수한, 주수동 연구사를 배치했다.

 

교육연구장학관은 심광한을, 윤웅섭 조용찬 장학관이 좌우에서 도왔으며 그 밑에 오창환 연구관, 이성구, 강휘국 연구사를 배치했다.

 

또 교육월보 편집실에 김노현 연구관과 남기수·김영윤(현 서울강동교육장) 연구사를 배치했다.

 

정신교육장학관은 김진성, 신상조 인정각 정태헌 우정남 연구관과 이원우 강사민 연구사를 두었다.

 

교과지도장학관은 김순오 밑에 이경환·최강문 연구관을, 정봉섭, 송연현 연구사가 함께 했다.

 

생활지도장학관은 오종호 장학관 밑에 김덕환 장학관과 최인용 연구관, 박경희, 김정호, 이태숙 연구사를 두었다.

교육방송관리관은 박준열, 기확관은 이철기가 맡았다.

 

또 박용복 연구관, 홍순직 이성욱 장일환 문중근(현 서울시교육청 진로교육국장)연구사를 배치했다.

 

교육방송편성심의관은 구학봉 장학관이 맡았고 그 밑에 이원구·송재원 연구관을 두었으며 연구사 4명(장명화·최윤도·조상제·양순열)을 배치했다.

 

이에 서기관급 방송운영관(조성종)을 두었으며 곽현수·김봉회 사무관이 보좌했다.

 

대학정책실장은 모영기 장학관이 유임했고 대학행정심의관(이보령) 밑에 행정과장(이성일) 대학재정과장(유영창) 학무과장(김재연)과 김화진 사무관(현 사학연금공단이사장)을 배치했다.

 

대학학사 심의관은 김영준 부이사관을 앉혔고 그 밑에 학사관리과장(옹정근) 학술진흥과장(김종석) 학사지도담당관(송순) 밑 장학관 4명(김우상·권숙동·송대형·안광호)과 교육연구관 8명(김진성·배상식·성기원·박찬도·이종락·이종육·채수언·장송환)등 교육연구사 3명(이병호·이형기·장상훈)을 두어 막강한 팀이었다.

 

보통교육국장은 이수종, 교육행정과장은 김용현, 교육재정과장은 송세화, 의무교육과장 정오근, 유아교육담당관은 반운경 장학관이 맡았다. 이 때 이계영(현 광주광역시교육청 부교육감)사무관과 최청송·신정숙 연구사가 보좌했다.

 

교직국장은 서인섭, 교직과장은 김진동, 행정사무관에 우형식(후에 차관·구미공대 총장) 교원양성과장은 송영식, 연수과장 장관주, 교원복지과장은 김정호를 앉혔다.

 

과학교육국장은 유해돈, 밑에 실업교육과장 김태진, 과학교육과장 고재형, 전문대학행정과장에 이기호, 사회국제교육국장에 금승호(현 춘천한림성심전문대 총장) 사회교육진흥과장에 권황옥, 사회교육제도과장 허만석, 교육협력과장 정봉근, 재외국민교육과장 이종서(후에 차관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교육시설국장에 조선제(후에 차관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기획과장 양재훈 외자사업과장 유강하(후에 김숙희장관 비서관) 설비관리과장 윤한철, 시설과장은 석진복 서기관을 두었다.

 

당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의 교육담당 비서관은 김하준(후에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여수대총장)이었고 서기관 3명(정석구·이병수·김정기)과 민정담당비서관실에 김평수 서기관(후에 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을 파견했다.

 

집권당(민자당)에도 김정길 전문위원을 파견했고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 김홍원 부이사관 및 김경환·구관서 서기관과 최기철·정병술 사무관을 파견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