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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전교협의 통일교육 남북 화해무드 일조

전교협의 통일교육 남북 화해무드 일조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21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선언 당시엔 좌경 용공으로 몰아 탄압

MB정부에 이르러 차단 냉전회귀

교총도 일본 교원단체와 제휴해 추진

-도피 중인 전교조 전 위원장의 지명수배 해제 비화-

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

<1993. 2. 26~ 93. 12. 21 재임>

통일교육 선언 의식화 매도

 

<전호에서 계속>

이처럼 전교협은 1988년 8월, 임시대의원대회때 채택한 통일교육선언문에 담은 내용에서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민족의 지상 과제이자 국민의 생존권과 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한 평화통일을 위한 교육에는 부족했고 분단과 대립을 조장, 강조하는 것에 우려하면서 향후 교사들이 민족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교육 실천에 나설 것을 다짐 한다”고 명시했다.

 

이에 국방비 절감 요구와 통일교육 노력 다짐은 공안당국에서 동조한 교사들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부쳐 탄압하는데 빌미로 삼은 핵심 사항이었고 일부 언론도 의식화 교사로 몰아세우며 이념 공세에 앞장세우기 좋은 구실이 되었다.

 

오병문 장관은 이와 같은 전후사정을 듣고 난 뒤 “업무에 참고할 중요한 사항들”이라고 반응했다.

 

그 이후 전교협이 전교조로 바뀐 뒤에도 통일교육선언은 유지, 계승하면서 ‘북한에 교과서 용지 보내기’등 남·북한 교육자대회를 추진하기도 했다.

 

특히 전교협에서 시작한 통일교육 요강에 교총에서도 일본의 교원단체와 연대하고 북한의 교육자 대표들을 일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만나보는 등 교육을 통한 남·북화해 무드를 조성하는데 일조했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 이끈 6공정부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까지 이어지다 이명박 대통령의 MB정권에 이르러 차단되었다.

 

 

기자니까 겪었던 오만가지

 

오 장관과 첫 대면에서 정해숙 위원장이 감사의 뜻을 전한 것 가운데 “윤영규 전 위원장의 수배를 해제해 준 것에 감사한다”고 말한 대목에서 장관은 뜻 모를 웃음을 보이더니 “오히려 내가 고맙지요”라고 화답했다.

그 뜻 모를 웃음에는 오 장관과 필자에게 얽힌 비화가 담겨 있었다.

 

1993년 4월 초, 일요일 아침 7시쯤이었다.

필자의 아파트에 잠바차림인 건장한 남자 세 사람이 찾아왔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교육부에 출입하고 있는 기자님 맞지요?”하면서 “우리는 시경과 동작·노량진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인데 지난 7일간 지명수배된 윤영규 전 전교조 위원장이 기자님 집에 드나들고 있다는 제보로 잠복근무 했으나 허위정보였으므로 철수하면서 미안하고 그냥가기 찜찜해서 왔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에 웃으면서 “기왕 왔으니 들어와서 다시 확인해 보라”고 응수한 뒤 “차 한잔 들고 가라”며 거듭 청하자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고 다니지만 자식들이 초·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전교조 선생님들의 마음도 다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달라지면 그 때 만나서 대포 한잔 나누겠다”며 사양하고 돌아서 나갔다.

 

이들은 아파트 현관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가 배웅하자 뒤돌아 보더니 손을 흔들고 떠났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수배 중에 있던 윤영규 전 위원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급히 의논드리고 싶으니 도와 달라”면서 “지하철 2호선을 이용해 신학대학역에서 내려 ③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공중전화 박스가 보일테니 그안에 들어가 잠시 기다리다 사람이 나가면 따라오라”고 했다.

 

이렇게 자기 할 말만 해놓고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끊어버렸으므로 정말 난감했다.

 

어제 형사들이 왔다간 상황에서 찾아 나서자니 미행이 따를 위험이 컸고 행여 그렇게 해서 잡혀가게 되면 경찰에 협력하고 제보한 것으로 오해가 따를 것이 무서웠다.

 

어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본 끝에 아침도 굶은 채로 비가 내려 접은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세번씩 갈아타는 것으로 혹시라도 있을 미행을 따돌리고 말해준대로 신학대학역 ③번 출구 공중전화 박스에 도착하자 웬 중년 아주머니 한 사람이 다가와서 “기자님이세요?”하고 묻더니 그냥 따라 오라는 것이다.

 

건널목을 지나 모퉁이 길로 들어서자 신학대학 구내식당 후문이 보였고 쓰레기봉투가 쌓여있는 사이의 쪽문을 연 뒤 가는 대로 따라 들어갔더니 윤 위원장이 후미진 복도에 빈 라면상자 몇개를 펴서 깔고 앉아 있다가 반겨 맞으며 “못 오는 줄 알았는데 와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이다 끝내 울음을 쏟았다.

 

서로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나눈 대화는 “오병문 장관께 전해달라”면서 “오늘밤 12시 정각에 경찰에 자진 출두 할 테니 체포하지 말고 불구속 처리가 되도록 원한다”고 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