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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해직교사 복직싸고 엇갈린 주장에 곤혹

해직교사 복직싸고 엇갈린 주장에 곤혹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9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전교조 “조건없는 복직 원상회복” 요구

일부 교육감 “선별 임용재시험” 고집

교총 “전교조 탈퇴 해체 전제 복직” 맞불

-ILO 한국정부에 ‘해직교사 복직 권고안’ 의결-

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

<1993. 2. 26~ 93. 12. 21 재임>

검인정 교과서 개방 물꼬 터

 

<전호에서 계속>

이에 따라 고등학교 검정교과서의 검정기준까지 공개가 뒤따를 것이 확실시 되자 교육과정심의위원으로 참여한 교수 가운데 상당수가 저지하기 위해 맞섰고 오병문 장관의 수명을 위협했다.

이때 합격유효기간을 3년에서 6년으로 연장했고 인정도서의 승인 및 사용지역도 출원 중심지에서 인접지로 확대 변경했다.

 

이는 국·검정교과서의 비리 불합리를 시정하는 것이 현안이었으므로 인정교과서는 ‘완화’하는 수준으로 배려했다. 이때 교육부는 검정기준 공개와 동시에 개선책을 수렴한 공청회(1993.10.28~29)결과를 반영해서 1993년 12월27일 ‘제9차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 개정(대통령령 제14028호)’을 공포하고 1994년 5월1일부터 시행토록했다.

 

아울러 합격유효기간을 3년에서 6년으로 연장했고 인정도서의 승인 및 사용지역도 출원 중심지에서 인접지로 변경했다.

 

이는 국·검정교과서의 비리 불합리를 시정하는 것이 현안이었으므로 인정교과서는 ‘완화’하는 수준으로 배려했다.

이렇듯 1993년 당시의 인정교과서는 2009년에 이르러 이명박 정부의 이주호 교육부차관이 주도한 교육과정 개정과 함께 시·도교육감에게 심사 및 합격본의 발행권을 이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제9차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의 개정 내용은 199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인 1994년 1월 20일까지 일반에게 열람을 허용하고 검정교과서 심사본 집필에 참여할 기회가 되게 했다.

 

이와 같은 조치에 힘입어 중·고교 검정교과서 출원에 신진 학자의 집필과 양심세력으로 분류된 새로운 출판사의 참여가 늘어난 효과로 달라져 지금과 같은 개방시대를 열었다.

 

반면, 중·고교 검정교과서의 검정기준 공개 및 개선과 참고서와 부교재까지 채택비리를 척결하고 나선 것에 반발과 저항이 거세 오병문 장관의 심신은 피로를 감당하기 어렵게 지치고 고달팠다.

 

1993년 8월 초 어느 날 교육부에서 오 장관은 필자에게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 어려워서 자네 머리 좀 빌리려고 하는데 좋은 수가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봤더니 장관 취임 후 친구들과 나눈 밥값 등 비용이 상당해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심했으면 이럴까 싶어 “정부청사 안의 국무위원 식당을 이용하면 크게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며 “누구든지 국무위원 식당에서 대접 받았다고 할 것이므로 품위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해준 것이 기억난다.

 

당시 국무위원 식당 메뉴는 한식 위주로 곰탕 설렁탕이 주종을 이루고 값도 4,200원 균일로 10명이 앉아서 먹어도 4만여 원밖에 안 되는 것이라 도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조언을 구했던 오병문 장관의 생전에 정겨웠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 난제

 

김영삼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전교조 해직교사에 대한 복직 현안 중 난제는 오병문 장관이 풀어야할 과제였다.

김 대통령은 선거 때 약속한대로 “해직은 복직으로 푼다”고 했으나 절차에서 선별 복직을 대안으로 제시한 시·도교육감의 결속된 주장이 거세 교육부장관이 감당하기엔 힘겨운 한계점이었다.

 

이에 전교조의 제5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취임한 정해숙(전남여고 교사) 위원장은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을 기다려 “전교조 해직교사의 복직은 선별방침을 중단하고 전원 교단에 돌아오게 하라”면서 전교조와 정부(교육부장관)의 직접 대화를 요청했다.

 

전교조는 이와 동시에 2주간(2월1~13일)의 단식 농성으로 결의를 드러냈고 각계의 지지가 이어졌다.

이때 민변·민교협·민가협·참교육학부모회·불교인권위원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인권위원회 등 여덟 개 단체는 “양심수 석방과 해직교사 원상회복”을 촉구하며 기도회와 법회를 열고 다양하게 지원했다.

 

당시 이 여덟단체의 공동 후원으로 세종대학교에서 개최한 “얼음장 밑으로 봄이 와요” 주제 시민의 밤 행사는 가수 김원중·이선희와 도종환(현 국회의원)시인 등이 출연했다.

 

행사 마무리로 한국노총에서 ‘해직교사 원상회복 촉구 성명’을 발표한 것에 정치권이 긴장했다.

전교조는 그해 2월28일 건국대학에서 전국대의원대회를 열고 “개혁과 변화를 바탕으로 ‘신한국’을 만들겠다고 한 김영삼 새 정부는 올바른 교육개혁을 이루기 위해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원상 복직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낼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고 호소한 결의문을 채택, 청와대에 보냈다.

 

전교조는 이와 함께 전국의 조합원들에게 “우리도 한 차원 높은 전진을 위해 철저한 자기 진단과 성찰을 바탕으로 빈틈없이 실천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나라 밖에서는 1993년 3월4일 국제노동기구(ILO)이사회에서 한국정부에 대한 권고안을 의결, 채택하고 “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보장, 제3자의 개입금지조항 폐기, 해직교사 복직에 필요한 조치”를 촉구했다.

 

이에 전교조에서도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조건없는 해직교사 전원 복직과 전교조 합법화를 실현하라”고 촉구했다.

특히 ‘조건 없는 복직’요구는 전교조 탈퇴를 전제로 하는 선별복직과 임용시험을 통한 신규 발령 등을 말한 것으로 “어떤 조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동시에 “교육부(장관)와 전교조의 직접 대화를 통해 논의할 수 있기 바란다”고 여지를 보였다.

같은 날(1993.3.4) 한국교총은 “해직교사 복직은 전교조 탈퇴를 조건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전교조 해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의 내용에는 “전교조의 대국민 사과와 해직교사의 전교조 탈퇴 및 복직 후 위법활동 중지 약속” 등 구체적인 조건을 담고 있었다.

 

뒤이어 3월29일에는 한국초등교육협의회 등 13개 교장단 대표들이 “전교조 해체와 해직교사 복직 반대 건의서를 청와대와 국회, 교육부에 제출하는 등 국제사회와 상반된 모습으로 달랐다.

 

이에 앞서 3월24일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각 대학의 그 해 수석졸업생이 오찬 모임을 가졌다.

이날 한 여자 수석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서 “김영삼 대통령께 건의하고 싶다”면서 “고등학교 다닐 때 아주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는데 언제쯤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실 건인지 대통령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다”고 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교사가 무슨 노동자 입니까?”라고 반문한 것이 전해지자 전교조에서는 “어렵겠다. 그래서 대통령선거 때 ‘전교조 합법화’ 공약을 발표해 놓고 1주일 만에 빼버리더니 역시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반발하면서 문민정부의 해직교사 복직과 전교조합법화 기대는 바라기 어려운 것으로 비관하게 되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의 언급은 그 자리에 배석했던 오병문 교육부 장관도 직접 듣고 알게 되면서 난제인 것에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그러나 전교조의 해직교사 복직 추진은 다각도로 모색하면서 계속 되었다.

 

그해 3월 말께 ‘전국해직교사원상복직추진위원회(원복추위)가 발족되어 가동했고 4월에 들어서면서 지역별로 ’해직교사 복직 촉구 각계인사의 선언‘이 뒤를 이었다.

 

이 선언에 참여한 함세웅 신부와 이영순 여성단체공동연합의장, 문익환 목사, 리영희 교수 등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해직교사 복직을 위한 문민정부의 가시적 노력이 진전되지 않고 있다”면서 “해직교사 복직과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서두르라”고 촉구했다.

 

전교조는 이를 기회로 4월19일부터 27일까지 18명의 전임 중앙집행위원이 주도한 행군단을 결성하고 제주에서 서울까지 전국 13개 도시를 도보로 행진하면서 해직교사 복직 지지여론을 확산 시켰다.

 

행군은 ‘교육개혁과 해직교사원상회복을 위한 온 나라 행진’으로 이름이 붙으면서 가는 곳마다 학부모 등 교원들이 환영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으로 성원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