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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6공 다음 정부 이을 3당 통합 정계개편

6공 다음 정부 이을 3당 통합 정계개편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3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여소야대 국회의석 여대야소로 역전

교총회장 입각티켓설 후문 나돌아

사대출신 문교차관은 법통으로 교체

-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 민자·평민당 양분-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교총회관 연두보고에 의미

 

<전호에서 계속>

교육과정 개정안은 당시 문교부의 함수곤 편수국장이 보고했으며 정원식 장관도 서울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교부장관의 자문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어 연두보고가 어렵지 않았다.

 

이날 교총회관에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연두보고를 받은 노태우 대통령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교총의 상당수 평직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교총의 어용설이 달갑지 않은 상황에 청와대 연두보고회장으로 이용된 것은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교총 사무국 직원이라고 해서 모두 전교조에 적대감을 갖는 것도 아니었다.

 

간부직은 어쩔 수 없이 회장과 사무총장의 의중에 반하지 않고 따라 주는 것으로 직장인의 윤리를 지키고 나약했다.

그러나 하위직원 대부분은 교총회관에서 청와대 업무보고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긍지로 삼거나 자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총의 사무국 직원 채용이 공채로 바뀌면서 정실인사가 배제된 만큼 유능한 직원이 늘었고 간부들도 이를 의식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교총나들이에 힘입어 전교조에 미칠 반사적 영향을 기대했으나 생각만큼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다.

 

교사3불론의 대상에는 교총의 회원교사들도 남의 일 같지 않아서인지 공감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윤형섭 교총회장을 옹립했던 교총의 핵심세력은 “다음 개각 때 문교부장관으로 입각할 티켓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기세등등했다.

 

이와 같은 루머가 파다해진 상황에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심복들도 만만치 않게 맞대응했다.

당시 문교부의 어떤 국장은 “대통령이 전교조 때문에 교총회관에서 문교부 연두 업무보고를 받은 것을 갖고 오버센스한다”며 “교총사람들 수준으로 비쳐질까 걱정”이라고 핀잔이었다.

 

어쨌거나 교총의 윤 회장은 싫지않은 기색이었고 그날로부터 문교부가 발표한 교육정책 등 현안 대책을 챙겨 대안 수준으로 제시했다.

 

이에 문교부 간부들은 “벌써부터 장관 여행연습이냐?”고 반문섞인 어투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

 

 

뜻밖의 문교차관 경질 후문

 

윤 회장의 의중에 관계없이 정원식 장관에게는 불편한 관계로 이어지면서 정부 인사에서 문교부 차관의 경질이 뜻밖에 이뤄졌다.

 

차관 경질은 그 해(1990년) 3월 19일 발표되면서 장기옥 차관 후임에 서울법대 출신 조규향 차관이 3월 20일 취임했다.

 

전임 장기옥 차관은 정원식 장관이 총애한 같은 서울사대 출신인 점과 달랐다.

장기옥 전 차관은 1988년 12월 13일 제35대 문교차관으로 임명되어 1년 3개월 재임했다.

 

정원식 장관이 88년 12월 5일 입각한 날로부터 8일 만에 임명된 것으로 후임 조규향 차관과 함께 이·취임식을 가졌다.

 

이 때 이임사에서 “조규향 후임 차관은 행시합격 후배로 한 번도 나를 추월한 적이 없었다”면서 “다른 사람보다 조 차관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떠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볍다”고 말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기 어렵게 모호했다.

당시 문교부차관 경질을 놓고 부내 간부들은 “정통사범대학 출신 차관에서 법통으로 바뀐 것에 의미가 있다”면서 “전교조에 대한 대응책이 강경으로 급선회한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기자들에게 묻지도 않은 것을 반문하는 등 미묘했다.

 

정작 본인(조 차관)은 표정이 어둡고 고뇌에 찬 모습인데 반해 휘하의 간부들 가운데 강경파가 이처럼 차관인사에 민감한 것은 이변이었다.

 

그러니 출입기자들은 전교조에 대한 법적 대응책이 나올 것에 촉각을 세우며 차관실의 침묵을 지켜보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3~4월은 노동계의 춘투가 시작되는 때였고 5월과 6월에 이어 7~8월은 대학가의 시위가 절정에 이르면서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앞장선 가투 시위도 열기를 뿜었다.

 

 

3당 합당의 여소야대 타개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에 5공 청산을 마무리짓고 1990년에 접어들면서 국회의 여소야대 타개책과 차기 대권인계를 위한 3당 합당작업에 나섰다.

 

정치권의 동향에 넓은 귀를 갖지 못한 교육계는 노대통령이 교총회관에서 문교부 연두 업무보고를 받은 것에만 관심이 쏠린 것으로 그 정치적 향배는 가늠해보기 어려웠다.

 

이 와중에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가 합의하고 민정당과 합당으로 정계를 개편했다.

이로써 두 야당은 여당으로 길을 바꾼 셈이었고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만 이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3당 합당을 이룬 노 대통령은 1990년 1월 3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요지는 “사흘 전인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5공 청산 문제가 종결되었으니 더 이상 과거 문제를 재론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에 다음 날인 1월 4일 김영삼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지방자치제에 앞서 정개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 보수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써 노 대통령의 의중과 궤를 같이했다.

 

노 대통령은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했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민정당의 당직을 개편해서 대표위원에 박태준의원, 사무총장에 박준병의원, 국회 원내 총무에 정동성의원을 임명했다.

 

이어서 김종필·김영상 두 총재를 1월 6일 골프장에서 만나 회동하고 정계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데 기본인식을 같이 했다.

 

반면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반대 의사를 갖고 있어 난관이었다.

 

1990년 1월11일 노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서 오찬을 나누면서 단독회담을 갖고 ‘광주 보상 문제’와 ‘민생문제’등 광범위 의견을 나눈 끝에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하고 웃으면서 가볍게 의중을 떠보았더니 “노 대통령의 심중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여당과 합친다는 말이 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어려워질 것입니다.

 

비록 여소야대의 4당(민정·공화·민주·평민) 체제지만 협조할 것은 해드릴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노태우 회고록 上권 485페이지 수록)

 

노 대통령은 그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대중 총재는 그날 회담 준비를 치밀하게 해왔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내가 말한 것을 일일이 메모하며 빠짐없이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김대중 총재는 매우 현명하고 듣던 대로 머리가 치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국정 전반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고 거기서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리해서 회담이 끝난 후에 국민들에게 발표할 것으로…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