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학력고사 시험지 도난에 인책 사임 떠나

학력고사 시험지 도난에 인책 사임 떠나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7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재임 중 중학의무화 교원지위법 제정

남·북한 동시 UN가입 새 통일교육

교육자치 부활 자주 전문 독립성 명시

31대 윤형섭 교육부장관

<1990. 12. 27~ 92. 1. 22 재임>

 

한·일 역사연구 첫 토론회

 

윤형섭 장관의 취임 첫해는 눈 코 뜰새없이 바빴고 질주했다.

1991년 1월 23일 대통령령 제13163호에 의해 국립국어연구원이 문화부소속 기관으로 넘어가 이관되었다.

도서관 가족들이 문교부 소속 보다 문화부 소속을 원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교육부 보다 문화부 쪽이 더 보호해 주고 전문성도 인정받았다.

 

2월1일엔 ‘교육과정심의회 규정’을 마련해서 관련 법의 개정과 함께 대통령령 제13282호로 공포 시행했다. 같은 날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다.

 

이날로 규정만 개정한 것이 8차례였고(대통령령 제13282호) 이에 따라 그해 5월8일 교육부 예규(제213호)로 교과용도서의 가격 사정 지침을 마련해서 통제했다.

 

2월11일 교육부의 전·현직 편수관 130명이 중심이 되어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회장 홍응선)’를 창립했다.

1991년 3월8일은 국회에서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정부에 이송되고 법률 제4347호로 공포되었다.

이때 교육의 자주·전문·독립성을 명시적으로 조항에 담았고 지방교육의 특수성을 정립했다.

 

3월11일 윤 장관은 세계은행(IBRD)으로부터 대규모 교육차관을 도입하는 데 성공해서 교육재정 확보에 개가를 올렸다.

 

3월27일 일본의 명치대학에서 ‘한·일합동역사연구회’ 주최로 제1회 ‘한·일합동 역사교과서 대토론’ 발표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역사교육을 놓고 지금처럼 한·일간의 갈등은 깊지 않았다.

 

이런 토론회가 자주 열리고 지속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앙금과 불화의 늪은 헤아날 수 있었을 아쉬움이다.

 

 

면단위 전지역 중학의무화

 

1991년 5월8일 교육부는 자율학습이 가능하도록 사용할 ‘교과서 모형’개발에 착수했다.(편관25148-188)

뒤이어 5월25일엔 중학교 무상의무교육을 전국의 면단위 전지역에 실시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1992학년부터 적용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고 전국에 확대 실시되고 있다.

 

그해 5월31일 ‘스승의 날(15일)’과 ‘교육주간’의 여운이 식지 않도록 정부(교육부)제안으로 ‘교원지위향상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교원에 대한 사회·경제적 예우와 처우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시성을 뛰어 넘었다.(법률 제4376호)

 

이 특별법은 교총이 주도했다. 1991년 9월3일 전국 15개 시·도의 지방교육자치가 부활되면서 교육위원회를 개원했다.

그러나 시·도교육감 및 교육위원은 임명제였다.

지금과 같은 교육감·교육의원 직선제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랬는데 교육의원은 한번 시행하고 일몰하게 되므로 통탄하게 된다.

 

 

남·북한 UN에 동시가입

 

1991년 9월18일은 UN총회에서 남·북한 동시 가입안이 의결된 날이었다. 각급 학교의 통일교육에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12월23일은 전·현직 편수관들이 창립한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의 제1차 학술발표회가 열렸고 ‘편수의 뒤안길’을 창간해서 편수관들이 겪은 애환을 담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놨다.

 

그리고 1991년을 마지막 보내는 12월31일 국회에서 교육법이 개정(법률 제4474호)되어 유치원 입학연령을 만 4세에서 3세로 낮추고 공교육에 진입하도록 했다.

 

또 교육법 제157조에 ②를 신설하고 ‘부교재도 가격사정’을 실시해서 학생 부담을 덜어주도록 했다.

이날 한국학중앙회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판을 발행했다.

 

 

학력고사 시험지 도난 유출

 

1992년 새해가 열리기 무섭게 윤형섭 교육부장관은 학력고사 시험지가 도난당해 시험문제가 유출될까 우려하면서 가슴을 조였다.

 

그해 1월18일 국가의 관리책임으로 실시된 고사지가 서울을 떠나 경기도 용인지역에 내려놓자 이를 노리던 일당이 밤중에 창고에 들어가 시험 문제지를 훔쳐갔다.

 

고사지를 몰래 가져간 목적은 뻔했지만 도난 사실이 교육부에 보고되면서 현지 경찰에도 도난신고가 들어가자 입소문을 타고 언론에 알려지면서 앞을 다투어 대서특필로 보도하기 바빴다.

 

다만, 시험문제지의 유출로 고사를 연기하거나 다시 출제해서 시행할 만큼 심각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사건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희생양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1월20일 윤형섭 장관은 작심한 듯 인책 사임할 의사를 밝혔고 여론은 “장관만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들끓었다.

이날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윤 장관은 출근하자 마자 시험문제지의 도난에 따른 현지 경찰의 수사 상황을 점검, 확인하고 “교육부도 사태의 수습에 허술한 구석이 없도록 하라”고 차관(조규향)과 소관실(대학정책실장 모영기)·국·과장에게 엄명했다.

 

교육부 밖에서도 윤 장관을 성원하고 친숙했던 사람들은 “사임이 능사가 아니라”며 막았고 사태의 추이에 주목했다.

“내가 나가면 따라 오겠지”

 

1992년 1월21일 오후 늦은 시간에 윤 장관은 청와대에 들어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임할 뜻을 고하고 사표를 냈다.

이때 노 대통령은 “도난 책임은 실무진의 관리부주의”라며 만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한 번 인책사임을 결심한 윤 장관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를 알게 된 출입기자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후임 장관을 점치면서 물망의 대상을 찾는데 바빠졌다.

 

필자(출입기자)도 여론의 향배에 주시하면서 윤 장관에게 몇마디 묻게 되었다.

이 때 ‘선 수습, 후 책임’의향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윤 장관은 “장관이 책임지는 것은 도리”라면서 “내가 나가면 저희들도 책임질 사람은 따라 오겠지”라고 끊어 말했다.

 

이에 필자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에서 짐작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저들은 직업 관료이지 정무직이 아닌 것에 유의하시라”고 조언하자 “그렇더라도 나는 물귀신처럼 끌고 갈 만큼 남까지 불행하게 할 수 없다. 저들은 부모님과 처자식을 둔 부양책임자라는 것 쯤은 알고 있다”고 뒷 말을 이었다.

 

1월22일 윤형섭 장관의 사표가 수리되어 이임식을 갖기 전에 필자는 시험지 도난의 관리 책임자인 모영기 대학정책실장을 만나 “착잡한 심정이겠다”고 위로하면서 말문을 열도록 유도했다.

 

이에 모 실장은 “장관이 모든 책임을 졌으니 사태의 수습은 마무리가 된 셈”이라며 “장관(윤형섭)님 뵐 낯이 없다”고 반응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