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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대량해직 악역 빠져나온 전화위복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8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취임 후 하루도 편치않았던 재임기간

굶어도 고프지 않은 날도 있어 추억

이임식장 나올 때는 발이 허공에 떠

- 공제회 이사장 되자 제주도 해변에 특급호텔 지어-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개각 전날의 장관실 이변

 

교원정보부 못지않게 대학을 감시하고 탄압한 학사담당관들까지 폐지했다 되살아난 직후임에도 본색이 도진 듯 새로운 역할과 기능이 수혈되고 있었다.

 

문교부 장학실의 교원정보부가 초·증등교사를 대상으로 삼는 사찰업무인 것처럼 대학교육정책실의 학사담당관은 교수와 학생회까지 휘어잡는 것으로 기세등등이었다.

 

마치 장관위에 교원정보부와 학사담당관이 있는 듯이 문교부 기능은 이질화 되었으며 최종 집약은 청와대 교육수석실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8년 11월의 마지막 가는 날이 되자 며칠 뒤(12월 4일) 단행할 노태우 대통령의 첫 개각은 이미 설이 무성했던 대로 시각을 다투면서 후문이 난무했다.

 

드디어 1988년 12월 3일 오후 개각의 윤곽이 TV뉴스를 통해 예보되면서 문교부 출입 기자들도 다음날 발표될 개각보도와 이에 따른 신임장관의 프로필을 준비하느라 모두들 바빠졌다.

 

이렇듯 제29대 김영식 문교부장관은 1988년 2월 25일 임명·취임하여 12월 3일까지 9개월 8일간 재임하고 뒷날 떠날 일만 남았었다.

 

그날 오후 6시가 임박할 무렵, 개각 발표가 있기도 전에 문교부 장관실로 축하 난분이 들어왔다.

꽃집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난을 보낸 사람의 이름이 리본에 적혀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황당했다.

꽃집에서 온 사람도 다시 가져갈 수 없었던지 장관실에 내려놓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지켜본 비서관이 “새 장관님이 취임하시기 전이라도 발표만 있으면 놔 드릴테니까 그냥 놓고 가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별로 고급(난)도 아니구먼”하면서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식 장관은 오후 6시 퇴청시간에 맞추어 문을 열고 나오면서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고 했다.

이에 장관실 직원들은 다음날 신임 장관의 취임준비를 위해 김 장관이 복도로 나가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선채로 기다렸다 앉은 다음 새삼 바빠졌다.

 

 

신·구장관댁 직통전화 교체

 

그때는 장관이 바뀔 때마다 이를 지켜본 기자들은 신·구장관의 댁에 설치했거나 설치할 대통령의 직통전화에 촉각을 세웠다.

 

경우에 따라서는 입각설이 파다했던 인사의 집에 전화를 미리 걸어 확인해 보고 발표보다 먼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퇴임 장관의 집에 설치되었던 직통전화와 신임장관의 직통전화는 동시에 교체가 이루어진다.

 

직통전화를 뜯어가면 가족들도 “끝났구나”생각하고 급하게 들이닥쳐 가설하면 “웬 일이냐?”고 물었다가 “장관님 사모님이세요”하고 응수하면 비로서 남편이 장관자리에 오르게 된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날 일찍 집에 들어간 김영식 장관은 직통전화에 눈이 갔고 잠시후 뜯겨 나가는 것을 보고 다음날 이임식을 위해 정부 청사에 마지막 출근하게 되었다.

 

이임식장에 들어섰으나 특별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역대 장관들에게 듣게 된 후일담 가운데 “취임식장에 들어갈 때는 몸이 둥 뜨는 것 같고 퇴임 때 이임식장을 나와 떠날 때는 발이 허공에 뜬 것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고 한다.

 

이게 권력의 마력이고 약발이란 것이다.

 

취임식 날은 아침을 굶어도 점심참이 지나도록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하루 온종일 상기된 표정이다.

 

퇴임장관을 떠나 보낸 문교부 간부들은 신임 장관에게 보고할 주요 업무를 챙기느라 바빠졌다.

퇴임 장관의 이임식 이후부터 새 장관의 취임식까지 차관이 주도해서 새로운 출범을 준비한다.

전임 김영식 장관이 취임했을 때는 김상준 차관이 재임하면서 서명원 전 장관의 이임식을 치렀다.

그 후 88년 3월 4일 차관인사로 경질되어 후임 장병규 차관이 임명되었다.

 

김영식 장관의 이임은 장 차관이 치렀고 그로부터 8일 째인 12월12일 차관인사로 그도 경질되어 떠났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김영식 장관이 9개월 9일 만에 떠난 것처럼 장병규 차관도 88년 3월 5일 임명되어 취임해서 그해 12월 12일 떠났으니까 9개월 7일 재임했다.

 

장·차관자리에서 떠난 두 전임 교육각료들은 여느 장·차관과 다름없이 두문불출로 칩거하게 마련이며 권력의 무상이었다.

 

 

마지막 봉사기회 생기

 

그러다가 2년 5개월이 흐른 1991년 4월, 김영식 전 장관은 한국교직원공제회 제10대 이사장으로 교육계에 되돌아왔다.

 

당시 교육부장관은 제31대 윤형섭 한국교총회장 출신이었다.

 

공제회 이사장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던 날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좋지! 안 좋겠어요?”하고 되묻는 것에 “그렇게 좋으시면 할 일도 많으시겠네요?”라고 거듭 묻자 “세계적인 호텔 하나 지어서 우리 선생님들 가족과 함께 휴양다운 휴양 좀 할 수 있게 봉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호텔이 지금 제주도에 있는 ‘(주) 교원나라 제주호텔’이다.

 

국제수준의 특1급 해변호텔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RAMADA PLAZA JEJU)’은 세계적인 관광도시 제주도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김영식 전 장관은 고향 마을에 되돌아가는 마음으로 꿈과 낭만의 섬 제주도 요지에다 전국교직원공제회 가족이 주인인 특급 관광호텔을 마련한 것이다.

 

세계적호텔 체인인 라마다 인터내셔널사와의 프랜차이즈를 통해 국제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내 최초 해변호텔로 지하 1층 지상 9층 규모에 총 330실의 객실과 1,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홀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비즈니스는 물론, 국제학술대회까지 최상의 여건으로 치를 수 있다.

 

김영식 전 장관이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취임 후 1993년 6월까지 2년 2개월 재임하고 떠나면서 남긴 말은 “장관자리 못지않은 기회였고 교육가족에게 빚진 것을 갚은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때(1988. 12. 4) 장관을 그만 두고 떠났기 때문에 전교조 결성에 따른 가담 교사의 대량 해직이 빚은 악역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전화위복이었다.

 

그 이후의 교육장관들도 김 전 장관을 말할 때는 서슴없이 “복인”이라며 장관자리가 가시방석인 것을 되뇌인다.

 

Posted by 아빠최고

국감 때 장관모습 집권층 눈밖으로 밀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6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원정보부 부인않고 야당돕나?”

윗선의 장관 색갈 검증에 관운 막장

여당의원 눈길 곱지않아 불안한 예고

- 차관이 장관보다 바빠지는 분위기에서 알아차려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당시 박석무의원 증언

<전호에서 계속>

 

‘교원정보부’에서 동향감시를 했던 교사들은 참담한 우리 교육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된 민주교육을 갈구하고 있었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고, 교육이 바로서지 못하면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는 교사들이다.

 

문교부와 교원정보부 노릇을 하고 있는 관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가를 뼈저리게 반성했어야 한다.

특히 전담반 책임자 박 모 장학관은 교직경력이 많은 분이어서 그 직책을 맡았다고 했으니 더욱 그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88년 10월 국정감사를 계기로 그동안 공화당정권 때부터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해묵은 갖가지 문제들이 잇따라 폭로되었다.

 

삼청교육대 문제·일해재단 문제·새세대육영회 비리·우리마당 테러사건 등등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어느 하나 책임감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모습들을 본 적이 없다.

 

88서울올림픽을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외국인들 보호는 철저히 해서 사고하나 없이 끝낸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어었으나, 장기수 탈주사건이 일어나 막상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치안질서는 엉망이 되고 있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끝인지,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느낌이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했고 교직은 성직이라고 했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교육은 어느 때에나 정상화될 것인지, 교육을 보는 문교관리들의 시각은 언제나 정상화 될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

 

하루빨리 교원정보부를 해체하고 신뢰받는 공정한 문교행정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었다.

 

그 해(1988. 10. 5) 문교부 국정감사가 불러온 후유증은 밖에서는 연일 문교부 질타가 잇따르고 안에서는 청와대의 눈길이 곱지않은 것에 겹쳐 내부에서 조차 간부들의 김영식 장관에 대한 시선이 차갑고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었다.

 

국감 당일 정보기관의 청와대 보고에서 “교원정보부를 들춘 야 3당의 삼총사(이철·박석무·강삼재의원)는 물론, 정대철 국회문공위원장까지 장관(김영식)을 두둔한 모습이었고 그만큼 차관(장병규)의 입지가 흔들렸다”고 적시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또 이를 입증한 것으로 “이철·박석무의원 등이 교원정보부를 장관도 모르게 운영했다고 매도하면서 질타했고 ‘장관도 모르는 청와대 보고’라는 표현이 공공연했다는 것은 국감에 제보한 배후를 짐작케 한다”고 몰아부쳤다.

 

이에 집권여당의 배수진과 보수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국감이후 개각이 따를 경우 김영식 문교장관의 경질이 점쳐지는 등 어수선했다.

 

특히 국감장에서 쾌도난마처럼 교원정보부를 파헤친 이철의원 등은 국민정신교육의 핵심에 칼을 겨눈 것으로 5공의 신군부를 이어받은 6공 노태우 정권에게 김영식 문교장관의 불신감을 부채질하는데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 국정감사를 함께 했던 여당의원들도 야당이 신이 났던 것 이상으로 배신감이 드는 등 그냥 물러서기 어려워 대안을 찾는데 부심했다.

 

이에 김영식 문교장관의 국감에 임하는 태도는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비쳐졌고 직선 대통령인 노태우 정권의 출발이 허약하고 호락호락하게 비쳐질 수 없음에 의기상통했다.

 

이로 인해 문교부장관실은 찾는 사람이 줄었고 국감 때 질타의 대상이었던 교원정보부 관계관과 국민정신교육담당 장학관의 입지는 윗선에서 더욱 신망이 두터워지는 것을 장관도 모르지 않았다.

 

이 무렵 문교부출입기자들도 정치권의 여·야를 닮은 듯 보·혁갈등의 기운이 심각하게 드러났고 아세곡필과 정론이 맞부딛치는 것을 조·석간 신문의 보도 기사는 물론 방송뉴스에서 확인해 보기 어렵지 않았다.

 

하루는 김영식 장관을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고 기회에 심경을 묻자 “문교부 국감을 교원정보부가 받았다면 나는 더 무서운 사람들로부터 국무위원(장관) 자질을 검증받고 있다”면서 “관운인 걸 어찌하겠느냐”고 한숨이었다.

 

이렇게 1988년 10월이 가고 11월에 들어서자 계절도 가을로 접어들어 설악산 단풍 뉴스가 TV를 통해 전해지면서 개각설이 나돌고 국회 일정에 따라 새해(1989) 정부예산안의 심의가 소관 상위의 의결을 소수의견으로 달아 예결위에 넘기자 부별심의가 본격화 되었다.

 

국감은 새해 예산안 부수법안과 전년의 결산심의자료를 얻기 위해 실시되는 것으로 인식된 마당에 정부도 국감뒤에 예산안 심의 대비가 현안이었던 만큼 소관 상위에 이은 예결위 심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문교부도 차관을 중심으로 국회예결위 심사에 대처하는 일 이상 긴급한 것이 없었고 이를 위해 어떤 것도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관실은 바빠지고 장관실은 한가해지는 상반된 분위기였고 국회에서 예산안 처리가 끝나기 무섭게 정국은 연말 개각에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국무위원은 연말 개각이 홍역처럼 무서운 시류병이었고 6공 정부의 첫 문교각료가 맞게 되는 1988년 12월은 이미 추풍낙엽처럼 엄동이 머지않은 것을 예고했다.

 

 

당찬 서울사대 출신 입각설

 

당시 김영식 문교장관이 서울사대 교수 출신이면서 한국교육개발원장에서 입각한 사실이 떠올려지더니 드디어는 “당찬 서울사대교수출신 입각을 기대하게 된다”는 루머가 보수성향 관변학자들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때만 해도 ‘당찬 사람’은 월남한 실향민을 뜻했고 강인한 의지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상징성이었다.

 

이로 미루어 김영식 장관은 제주도 출신으로 전형적인 학자타입이었고 출세가도에서 경쟁할 상대를 만나면 조우하는 것 조차 피할 만큼 심성이 고와서 경쟁력은 제로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문교장관 후임으로 같은 서울사대 교수 출신이 거명되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성격상 ‘물태우’라는 별칭에도 반응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개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오판한 측도 있었다.

 

그러면서 국감 때 있었던 사안을 이유로 문교장관을 바꾸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같은 서울사대 출신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침에 “옳다”고 해놓고 저녁에 실세에서 “아니다”라고 하면 즉각 “그렇다”고 뒤집어 합리화 하는데 이골이 난 어용성향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교육각료는 이런 타입을 요구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사기에 충분했다.

 

집권층의 실세를 찾는 관변학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친관변학자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문교부에도 미묘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Posted by 아빠최고

정부‘국민정신교육 강화’에 송곳 질문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3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장관이 생각하는 ‘국민정신’묻고 추궁

교육보다 정권안보 우선 사찰에 쐐기

애매 모호한 개념 ‘획일 강제주입’ 질타

 

- 고교생도 교육민주화 투쟁 호응 담벼락에 낙서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이철 의원이 밝힌 폭로내용

아래쪽에는 보고한 교육청의 표시와 송화자 및 수화자를 밝히도록 빈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민주교육추진 서울교사협의회 창립대회개최 결과 보고’라는 커다란 제목이 달린 1987년 9월 22일 23시00분의 ‘보고사항’ 문서에는 대충 이런 식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① 「사안의 개요」 난에는 일시 장소 참석기도인원(약5백여 명)을 기록한 다음, ② 현장지도라는 항목에는 ▲87년 9월22일 17:00시 서울교위 장학진 교장 2백50명, 경기교위 장학진 교감 93명, 계 3백43명이 현장에 도착, 지도 ▲ 동일 16:30분 서초경찰서 전경 3중대, 사복경찰 2개 중대, 진압경찰 1개 중대 현장에 도착, 집회 장소의 정문 후문을 봉쇄하고 주변 통제, ▲ 교위는 시경학원반장에게 동부교회 집회 봉쇄시 개최지를 변경할 가능성에 대비, 예상개최지(강남YMCA지회, 마리스타수도원)에 경계요청 등의 내용이 있었다. 계속되는 보고 내용을 한번 더 살펴보자.

 

③ 지도 및 진행경위 내용에서 ※ 18:10분 교장, 교감이 동부교회 진입기도 교사 50여 명을 개별 설득 귀가시킴, 회장 주변에는 교회진입기도자 1백여 명이 산재하고 있음 ※18:40분 서울교육감이 현장지도요원 격려차 도착 ※18:50분 교회 정문 앞에서 5백여 명이 연좌농성, 서초경찰서장이 금일행사는 교회사정으로 취소되었으므로 귀가 할 것을 종용, 불응시에는 강제해산시킬 것을 통보 ※19:00분 농성참가자들이 불응하자 경찰에서는 사복 1개 중대를 투입, 강제해산시킴 ※19:15분 제2의 집회장소 집결에 대비, 장학진과 교장, 교감을 역삼국민학교에 대기 시킴 등.

 

▲시·분별로 정보접수 송, 수화자 이름도 명기

 

그 후 일부 교사들이 서울 구로구에 있는 갈릴리교회로 장소를 옮겨 창립대회를 마치자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관기관의 제보를 받고 서울교위 학무국장 외 현장지도요원 다수가 갈릴리교회에 갔으며, 구로경찰서에서는 전경을 승차시킨 버스 2대를 배치하였음.

 

문교부 대책반은 주동자, 적극가담자 및 임원에 대한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지도대책 수립을 당부함.

이게 교육 2세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문교부와 교육청에서 하고 있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른바 업무(?)의 일부였다.

 

초·중·고 대학까지 사찰

 

12대 국회 초반부터 나(이철)는 상임위(문공위)에서 문교부를 상대로 정책질의를 할 때마다 이른바 ‘국민정신교육 강화’라는 문교부의 정책방향에 대해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대체 ‘국민정신교육’이라는 게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자유·민주·정의 그리고 평화 등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들을 저절로 간직하고 이런 것을 소중하게 키워나가면 되는 것이 바로 국민의 도리요, 인간의 도리인데 국가가 굳이 애매모호한 ’국민정신‘이라는 있지도 않은 개념을 만들어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요? 나치하의 독립국민들이 강요받았던 소위 파쇼적 국가이념, 국민정신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아니 다 접어두고 대체 장관은 ‘국민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하고 아무리 추궁하고 캐물어도 문교부관계자들은 적당히 둘러댄 채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비단 나(이철)뿐만 아니라 당시 같은 문공위원이었던 趙蕣衡의원도 빠지지 않고 질문공세를 퍼부었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趙의원이 되받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그리고 나면 또 다시 내가 이어가는 식의 회의진행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국민정신교육을 강화시켜나가겠다는 문교부의 복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에 앞서 2~3년간 그렇게 ‘정신교육, 정신교육’하며 열을 올리던 실상이 ‘교원정보부’였다니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문교부가 스스로 명명한 ‘교원정보부’의 명칭이 ‘국민정신교육담당관 소속의 전담실’임을 미루어 볼 때 그간에 이루어진 ‘국민정신교육’이란 민주적 교육을 하고자 자신을 희생해가며 애쓰는 참된 교사들의 꽁무니를 비밀리에 쫓아다니며 감시하고, 그것의 빌미를 마련하는 ‘정보사찰교육’ 바로 그것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대학과 중·고교를 구분함이 없이 학생과 교사·교수를 불문하고 문교부 본부에서부터 일선의 학교현장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교육은 없고 마치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정보사찰 기능만이 무서운 눈초리를 번득이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감시에 장학관 명찰

 

문교부 대학정책실은 시간시간마다 전국의 대학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는 야전사령부로 변했고, 마음에 맞는 교직원들을 마구잡이로 선발하여 연구사니 장학관이니 하는 명찰을 달아 대학 학생처 구석구석에 배치하여 학생과 교수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 수집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른바 어디를 지칭하는 지 뻔한 ‘유관기관’과의 대책회의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첩보’가 오고가고 경찰의 출동을 무시로 ‘요청’하는가 하면 교육청마다, 대학까지 가리지 않고 ‘보안위원회’가 설치되어 이를 구실로 국가안전기획부는 말 그대로 합법적인(?) 감시로 교육계를 유린하고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심지어 담벼락에 쓰인 몇 구절의 낙서가 불온(?)하다고 하여 지역경찰서 형사가 한 학교의 고3학생 전체를 밤늦게까지 붙들어 놓고 ‘필적조사’를 한답시고 “이 글자를 한짜로 써보아라”는 식의 문초 아닌 문초까지 학교에 지시하고 학교관계자들은 꼼짝없이 순응하는 것은 물론, 상호 정보교환까지 하고 있음을 확인 했을 때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또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이런 충격적인 파탄상이 유신시대의 폭압구조 아래서부터 총체적으로 자행되기 시작하여 5공 시대에는 철벽의 구조로 자리 잡았으며 소위 민주발전을 운위한 6·29선언 이후 6공화국이라 불리는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모양새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새 시대’와 ‘보통사람’을 내세우는 큼직한 활자를 볼 때마다 그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탄스러운 작태가 상기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정권담당자들은 또 무엇이라고 미화하고 어떤 구실을 갖다 붙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민주교사들이 구속되고, 파면 당하고, 느닷없이 서울한복판에서 서해바다 백령도로 발령받아 신판 유배를 떠나야 했던 긴박한 사안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속출하면서부터 문교부에 이런…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時·分별로 정보접수 송겮致??名記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2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7~8평 남짓한 밀실이 교원정보부

국정감사장 옮겨 서류철 뒤져 확인

장관 명령으로 캐비넷 열자 탄압물증

- 86년 8월부터 교원사찰 전담반 설치 감시활동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이철 의원이 밝힌 국감장면

<전호에서 계속>

 

… “중등교원동태파악전담실, 다시 말해 한마디로 ‘교원정보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숨기지 말고 국민 앞에 공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감사장의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야당의원들의 거센 추궁이 뒤따랐다.

정대철 위원장의 격한 경고가 이어졌지만 문교부장관과 간부들은 관련서류 제출을 완강히 거부한 채 사실시인을 머뭇거렸다.

 

결국 현장조사를 제안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정 위원장은 이를 받아 들였고 여당의원들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이철 의원)를 포함해서 평민당의 박석무의원, 민주당의 강삼재의원, 민정당의 김일윤의원이 현장조사를 위한 대표로 선정되어 정부중앙청사 15층의 속칭 ‘교원정보부’를 찾기로 하고 정회가 선포 되었다.

문교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15층을 향하는 마음은 일종의 흥분과 착잡함이 교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면서 총칼과 탱크로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짓밟은 이래 실로 16년 만에 부활한 국정감사 첫날 첫 번째 현장 조사의 실마리를 풀어 비민주적인 강압행정의 실상을 드디어 폭로해 낸다는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도 억누를 수 없이 컸다.

 

‘꼭 이래야 하는 건가’

‘차라리 문교부관계자들이 솔직하게 털어 놓고 관계서류철을 공개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제도와 부당한 정책 시행을 시인하고 앞으로의 개선책을 제시했더라면 모두가 한걸음 앞서 나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깐의 이런 생각도 소용없이 안내된 구석방에서 벌어진 관계자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제 돌이켜 하부직원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방을 안내하면서 “이 의원님, 평소에 여러 가지로 의원님의 활동과 경력을 존경해 왔습니다” 라며 나를 추켜세우는 듯하던 관계실무자들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몇 개의 캐비닛과 서류보관함을 공개해서 서류를 끄집어내 보라는 국정감사 조사단의 요구에 막무가내로 버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의원들에 대한 태도마저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흥분을 누르고 서류 공개를 촉구했다.

쓸데 없는 형식문제로 일을 그르치고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7~8평 남짓한 방에 보도진과 문교부 직원들이 가득 들어차 발디딜 틈조차 없이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고함소리가 오고갔다.

 

 

별게 없다며 버틴 문교부

“이 방에서 하는 업무가 교사들을 보호하는 일을 주로 맡아 본다고 하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오히려 숨기지 말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공개해서 국민들에게 알려 큰 상이라도 받게 해줘야 하는데 왜 굳이 서류제출을 거부하는가요?”

 

이어서 “아니, 자꾸 별게 없다고만 할게 아니라 시원하게 내놓고 그간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받으라고 하는데 숨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다 밝히기 어렵다면 업무일지라도 우선 내놓으시오. 공적인 업무를 맡아보는 기관에 업무처리에 관한 일지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계속되는 닦달에도 불구하고 박 장학편수실장과 박 장학관은 “나중에 정리를 해서 제출하겠습니다. 업무일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면서 의원들에게 양해해 달라고 변명하기에만 급급했다.

 

거의 1시간 가까이 의원들의 호통과 고함에도 끝내 캐비닛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정대철 국회 문공위원장이 15층으로 급히 내려왔다.

 

“아니 무슨 소리인가요.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의결한 사항인데 이런 식으로 대응한다면 감사를 거부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감사위원들을 전부 이 방으로 오시도록 해서 여기서 감사를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문교부장관도 이 방으로 내려오도록 연락하십시오”

 

급기야 장·차관이 15층으로 내려 왔고 거센 항의를 받은 후 김영식 장관은 캐비닛을 열어 관련서류를 의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라고 박 장학관에게 지시했다.

 

장관의 지시에도 멈칫거리던 실무자들은 결국 보관함의 문을 마지못해 열었다.

 

내가(이철 의원) 대표로 한 가지씩 서류 파일을 뽑아 간단하게 제목과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보도진은 카메라를 들이대고 어깨 너머로 파일의 표지에 찍힌 문서제목을 찍기 시작했다.

 

 

장·차관 결재 안 거치고 직보

 

장·차관 결제도 안 거치고 청와대에 직접 보고한 서류철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원집단행동관계철’ ‘해직교사관계철’ ‘교원상황관계철’ ‘전교협관계 자료철’ 등의 이름이 붙여진 두툼한 서류뭉치 속에서는 86년 5월의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열화와 같이 일기 시작한 교사들의 민주화활동 등이 소상하게 보고받아 정리되어 있음은 물론, 집회개최내용, 관련 자료의 수집 해석 평가 대책이 거의 한 가지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일일이 한 가지씩 열거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동태파악’ ‘원천봉쇄’‘핵심분자‘ 등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정보사찰용어들이 즐비했다.

 

마치 공작기관의 작전문서를 보는 것 같은 전율이 느껴졌다.

86년 8월부터 전담반을 설치하여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는 관계공무원의 설명을 대충 들어가면서 모두 8개의 서류 보관용 캐비닛과 파일함을 일일이 다 열어 보자고 했다.

 

비슷비슷한 보고와 첩보가 전국 각 시·도교육청에서 공문으로 혹은 전화통화로 매일매일 쏟아지고 있음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또한 심지어 장·차관의 결재도 없이 담당장학관 전결사항으로 청와대에 직접 보고하고 있는 놀라운 사실도 확인되었다.

 

몇 장씩을 한꺼번에 넘기면서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나 자신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참석했던 게 분명한 민주교사들의 공개집회나 토론회, 공청회 등에 관한 보고서에 내 이름(이철 의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참석격려자 - 이철 의원(서울 성북구), 격려사 내용-교육민주화운동이 결실을 맺기 바란다는 요지임’ 등으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교육관계 집회에 참석하게 될 경우에는 문교부에 사전 통보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이곳이 ‘교원정보부’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단 한 가지라도 보관문서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발췌 공개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사례임을 거듭 밝혀 두고자 한다.

전화연락을 통해 제반사항을 신속하게 보고받고 있던 보고서의 기안지 상단에는 연월일을 표시함은 물론 時, 分까지 정확히 기재하도록 인쇄되어 있고 ‘장학편수실(정신교육전담실)’ 이라 명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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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교원정보부」 이렇게 찾아냈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1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문교부 국정감사 전날 밤 늦게 전화제보

1988년 10월 5일 정권의 치부 드러나

팻말도 없는 밀실 교육민주화 교사 탄압

- 李哲의원 당시 상황 “훗날 교훈되게” 소상히 밝혀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당시 서울교육감 증언

 

6공 노태우 정부의 초기에 있었던 전교조 가담 교사에 대한 징계 당시를 전한 김상준 전 서울교육감의 증언은 “아까운 인물(교사)들이 있었다”면서 “건져 보려고 유도심문까지 했었다”는 징계위원들의 후일담에서 여러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직의 힘이 크다는 것은 알지만 참으로 두렵다”고 했다.

 

최후 진술에서 어떤 교사는 “제가 여기 징계위원회에 들어설 때까지는 징계위원 여러분들을 우리의 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여러분은 긴 시간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제가 오해 했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갈 길을 갈 수밖에 없다하고 나갈 때는 힘이 쭉 빠지더라”고 말했다면서 “순진한 젊은 교사들이 마술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했고 그러니까 나는 그들에게 미련이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이 근래 전교조는 특별히 이상 징후가 없다. 그래서 우리 교육계는 대체로 평온하다”고 그날의 일들과 비교했다.

 

 

장관 단명 부른 국감폭로

 

1988년 10월 5일 실시한 당시 국회 문공위원회의 문교부 국정감사에서 이철(무소속)의원이 폭로한 속칭 ‘교원정보부’사건은 그해 12월4일 개각에서 김영식 문교부장관을 경질시킨데 결정적인 것으로 장관의 단명을 불러왔다.

이철 전 의원은 당시의 폭로에 대해 “감사 전날밤 전화제보로 문교부에 밀실이 있다고 알려왔고 속칭 교원정보부는 이렇게 찾아냈다”고 밝혔다.

 

또 “아부를 서슴지 않던 문교부 공무원들은 막상 문제의 팻말도 없는 조그만 방을 지키면서 서류함 열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1988년 10월 5일 문교부 국정감사 때 이철 의원은 자신이 폭로했던 장면을 “훗날 교훈이 되도록 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밝혔다.

 

 

▲문교부 직원도 잘 모르는 ‘교원동태파악 전담실’

 

1988년 10월 5일 낮 문교부 국정감사장에서 나는 “아, 잠깐만요!”하고 교육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원들의 열기에 가득찬 질문에 가까스로 답변을 마치고 김영식 문교부 장관이 다음 사항으로 말문을 돌리려는 순간, 말을 멈추게 했다.

미처 고개를 들 틈조차 없이 모두 숨가쁘게 질의 응답을 메모하고 있던 기자들과 문교부 관계자들은 일순 시선을 나에게로 집중시켰다.

 

물론 장관도 나에게 급히 고개를 돌렸다.

“문교부는 이 종합청사의 몇 층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16, 17, 18층을 문교부가 쓰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까?”

 

그날 문교부에 대한 국정감사장으로 쓰고 있던 곳이 바로 16층의 대강당 상황실임을 상기시키면서 장관에게 연속된 질문을 던졌다.

 

이 말이 나오자 긴장의 연속이었던 국정감사장의 분위기는 직전과는 달리 약간 누그러지는 듯이 보였다.

내가 갑자기 핵심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문교부 청사 얘기를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잠깐 동안 멍해 있던 장관도 친절히 대답했다.

“예, 저희 문교부는 이 종합청사의 16, 17, 18층까지 3개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말을 받았다.

“그런데 15층에도 문교부 소관 사무실이 하나 더 있지요?”

 

장관은 곧장 답을 하지 못한 채 옆자리의 張병규 차관에게 자문을 구하는 몸짓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張차관은 역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했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재차 다그쳤다.

 

“이 청사 15층에 문교부 업무와 관련된 사무실이 있을 텐데요”

나의 확신에 찬 거듭되는 질문에장관은 급기야 뒷줄에 배석해 있던 국장과 실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제서야 묵묵부답으로 쳐다보고 있던 국·실장 가운데 한 사람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朴용진 장학편수실장이었다.

“예, 자료실로 사용하는 방이 있습니다마는…”

 

그도 마치 자신의 소관 업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말로 꼬리를 흐렸다.

일련의 뚱딴지 같은 사무실 사용문제가 제기되자 방청석은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질문하는 목소리에 강한 힘을 넣었다.

 

“자료실 말고는 분명히 15층에 다른 업무를 맡아 보는 방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여전히 張차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얼굴만 붉히고 있었고 朴 장학편수실장은 답변인지 혼잣소리인지 모를 말로 “그 외 특이한 사항은 없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마이크를 잡아당기며 정색을 하고 마지막 포문을 열었다.

“15층에 朴찬봉장학관이 책임자로 있는 문교부 소관의 사무실이 하나 있지요?”

 

이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朴 장학편수실장은 몇 차례 판에 박힌 답변을 늘어놓았다.

문교부의 직제와 듣기좋은 업무분장을 얘기하며 어떻게든 의원들을 설득해서 적당히 넘겨보려는 눈치가 역력했다.

문교부관계자들의 솔직한 답변을 듣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쉽게 내려졌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파헤쳐 추궁해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방의 구체적인 담당업무는 무엇이며 박찬봉 장학관 외에 직원은 모두 몇 명인가요? 그런 식의 우물쭈물한 대답을 할 바에는 차라리 업무일지를 제출하시오.“

 

그 방의 성격과 구체적인 업무까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朴장학관이 책임자로 있는 그 방은 여기 있는 장관도 모르고 있을 뿐더러 문교부 직원 대다수도 그런 방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특수한 곳으로서 이른바 교육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교사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탄압하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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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大 교수출신 長官 역부족 敎育監 대안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0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전교조 결성 전야의 사태수습책 일환

대통령 직선 등 헌정회복에 새기운

서울교육감 적임자로 차관 출신 임명

- 행정과 현장의 친화력 기대 난망 느슨하게 대처 -

6공 첫 문교장관 고뇌

 

이렇듯 1986년 교육민주화 선언의 여파로 교사회 활동이 정점을 이루면서 1987년 5공 전두환 정권의 말기에는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회’로 거듭났으며 1988년 2월, 6공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결성되어 첫 김영식 문교장관은 고뇌하게 되었다.

 

민추교사회(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회) 보다 훨씬 막강해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은 재야세력과 전국의 학생·학부모까지 심정적으로 동정한 상태가 되면서 커졌고 교육이 정권안보에 쉽게 이용되었던 군사독재 때와 다르게 진전했다.

이에 당시 문교부는 장병규 차관 주도로 사태에 대처했고 공안당국의 종용과 대책회의 결과에 따라 전교협에 대응했으므로 김영식 장관도 권한과 재량밖의 일이면서 보고만 받는 수준으로 소외당했다.

 

문교부는 또 전교협 대책의 일환으로 부내에 별도의 상황실을 비밀리에 설치해 장학관급 책임자까지 두고 있었으며 시·도교육청도 같은 수준의 대책반을 상설해서 문교부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도교육청의 대응력은 대통령이 직선으로 달라질 만큼 정치권의 민주화 복원과 함께 사회민주화 흐름도 시대의 진운을 타고 급물살로 진전된 상황이어서 대책반 활동은 기대한 만큼 성과가 없었다.

 

이것은 중앙정부의 통치감각과 달리 지방자치의 기운이 감돌아 시·도교육감 대부분이 더 이상 교사들과 대치하는 것을 주저했고 중·고생의 지적 수준이 지시 일변도의 행정으로 다스리기 어렵게 성장한 것에 몸을 사렸다.

 

이처럼 교육감 중 어떤 사람은 교육청 뜨락에 대나무를 심는 것으로 심기를 잠재우면서 상징성이 되도록 표출했을 정도였다.

 

결국 대학의 민주화 열망을 제압하기 어려운 것이 실감되면서 사대와 교대의 학내 분위기까지 현장교사의 교육민주화 갈망에 호응하는 등 동창회 모임에 참여해서 선·후배의 유대를 다지고 보기에 따라서는 전교협의 예비활동으로 오인받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뿐만 아니라 사대 가운데 국립사대 재학생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현직 교사들의 교육민주화 투쟁에 성원하면서 고무한 것이 드러났고 시·도교육감의 행정력에 아랑곳하지 않은 것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師大출신 교육감 대안

서울사대 교수 출신 장관만으로 사태를 수습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집권세력의 대처방안이 사대출신 교육감으로 하여금 후배 교사들을 무마사키는 대안으로 무르익은 것에 김영식 문교장관은 서울시교육감부터 서울사대 출신을 기용해서 맡겨보는 방법에 의존하게 되었다.

 

당시 문교부차관 및 실·국장 등 간부들과 청와대 교문수석실의 분위기도 이를 최선으로 인식하고 실현이 빠를수록 이롭다고 판단했다.

 

남은 일은 인물선택이었고 더 이상 미룰 것 없이 김상준 전 문교차관을 낙점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김 전 차관은 앞에서 몇차례 거명된 바와 같이 5공 전두환 정부의 마지막 문교차관으로 87년 8월 6일부터 88년 3월 4일까지 재임하고 노태우 정부의 출범에 따라 후임 장병규 차관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떠난 후 쉬고 있었다.

 

또 5공 말기의 자율화 바람을 타고 교사회의 교육민주화운동이 열기에 차 오를 때 대응하면서 처리했던 전력에 비추어 서울사대 국어과 출신 학력과 강원도 교육감 재임 중 차관으로 임명되어 경륜을 쌓은 이력만으로 노태우 정부의 첫 서울시교육감이 되는 것을 적임으로 보았다.

 

이렇게 해서 그 해(88년) 여름, 서울시교육감으로 김상준 전 문교차관이 임명되면서 전교협에 대한 대처에도 새로운 조치가 기대되었다.

 

김 교육감은 기대한 만큼 현장교사와 대화를 갖는 것으로 대처했고 고등학교부터 순시하는 일정을 잡아 전교협 가담 교사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김 교육감의 전력과 임명전후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교사들은 마음을 터놓고 교감하기 보다 거리를 두었고 어떤 학교에서는 교무실에 들어가 교사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내가 교육감이오”라고 첫마디 건네자 “이미 알고 있다”면서 차갑게 반응하고 내민 손을 잡지않아 악수도 나누지 못한 일까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토록 경색된 분위기에서 교육행정과 현장교육이 친화력을 갖기 어렵다고 판단한 김상준 서울교육감은 사태가 서울교육청만의 일이 아닌 것으로 보다 근본 대책이 절실한 것을 체감했다.

 

그렇다고 취임 초에 이 것부터 제안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서두른다고 풀 수 있는 사안도 아닌 것에 느슨하게 대처하는 방법으로 선회했다.

 

서울교육감 훗날 증언

이와 같은 방법 선택의 배경을 짚어보기 쉽게 그로부터 24년의 세월이 흐른 금년 1월에 쓴 회고담을 접했는데 “당초는 순수했으나 곧 민중교육으로 선회했다”고 증언했다.

 

또 “전교조 발족 이전의 자생조직인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때나 전국평교사협의회 때까지도 그들의 표방은 순수했었다”면서 그 내용이 교육행정의 관료화 지양, 잡무부담 경감, 보충수업 폐지, 교원집회의 자유보장, 교육자치의 실시 등을 요구한 것으로 별로 탓할 것도 없었다고 김상준 전 교육감은 회고했다.

 

그러나 1989년 앞의 두 단체가 해체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결성할 때에는 그 선언문에서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지향하겠다고 했으며 이 주장에 대해서 당시 정부계통은 분석하기를, 민족은 외세인 미국을 몰아내고 남과 북이 합작하는 것, 민주는 노동자·농민이 주인이 되는 것, 인간화는 수월성 교육과 서열화를 없애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풀이했다고 전했다.

 

이어서 “그들은 어떤 계기가 있으면 그들의 생각을 담은 교재 또는 지침서를 만들어 배포했다”면서 그들의 말은 교육권은 국민이 가지고 있으며 교육의 주체는 교사라고 내세웠고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를 통해 교육내용을 규제하는 것은 교육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뜻에서 민중교육으로 선회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또 전교조의 활동은 날로 치열해졌고 심지어 거리시위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정부는 불가피 그들을 국가공무원법의 집단행위 금지조항을 적용해서 1,500명을 교직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되돌아 보았다.

한가지 그의 회고에서 눈길을 끈 것은 “전교조 안에는 순수파가 있었다”는 증언이다.

 

그것을 다음 사례에서 확신한다고 부연했다.

1989년 말,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노조활동을 고집한 교사들에 대해서는 부득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징계 업무는 반년 가까이 걸렸고 하루 평균 8명씩 예정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2명으로 하루를 소비했다면서 징계절차에 하자가 없도록 함은 물론, 징계혐의자(교사)들에게 충분히 진술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기간 중에 징계위원(서울시 교육청의 실·국장)들이 소감을 털어놓은 것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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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바꾼 교육정책”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9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민주화 열기

교사 학생 학부모가 “교육주체” 선언

역사의 필연이며 막을 수 없었던 대세

- 교육 바로 세울 최소한의 조건 5개항 구체 제시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교육민주화 선언 전문

 

‘오늘날 우리 사회에 요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는 역사의 필연이며 각 부문의 민주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교육부문의 민주화는 사회전체의 민주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교육의 민주화는 사회민주화의 토대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해방 이후 우리 교육은 전 민족의 노예화를 획책하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시류에 따라 부침한 정치권력의 편의대로 길들여진 충직한 시녀로 전락하였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누더기 같은 헌법 속에 그나마 사문화된 채 보장받지 못했고 식민지하에서 구조화된 교육행정의 관료성과 비민주성이 온존되어 왔다.

 

그 결과 민족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교사들은 국민의 교사가 아니라 극도로 통제된 관료기구의 말단으로 떨어졌고 교직은 성직이란 미명 아래 점수 매김과 서열 짓기에 급급한 사이비 교육의 굴레 속에서 무조건적 희생을 강요당했다.

 

참다운 교육을 위한 교사의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노력과 자율성도 배척되고 있다.

 

힘써 진리를 탐구하고 심신이 건전한,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비정한 점수경쟁과 물질만능적 상업주의 문화의 홍수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방황하고 있다.

비민주적 교육현장은 일방적으로 선정된 경색된 가치만을 학생들에게 주입할 뿐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모순에 찬 사회구조와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교육제도로 말미암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학부모들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당면한 과열경쟁 속에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의 인간다운 삶을 저당 잡혔다.

 

산적한 교육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당국의 행정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그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음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조령모개(朝令暮改)는 한국교육정책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이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 학생, 학부모가 소외된 상태에서 추진되는 이른바 교육개혁이란 기술적이고 지엽적인 절차상의 손질일 뿐,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국민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교육개혁은 교육, 인간, 사회를 보는 관점의 개혁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 학생, 학부모를 교육주체의 자리에 확고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육의 민주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교육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사들의 역할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무기력한 말단관료, 역사 속의 방관자의 위치를 탈피, 새로운 교사로서 참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교육의 주체로서 국민의 교육적 요구를 올바르게 실천할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교육의 민주화는 민주사회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바탕이라는 자각에서 새로운 교육건설의 역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모든 장애와 고난을 이기며 민주교육을 실천해 나갈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교육민주화의 최소 조건

 

이에 우리는 교육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5개항을 천명하는 바이다.

1.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중립성 보장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은 정치에 엄정한 중립을 지켜 파당적 이해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2.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3. 교육행정의 비민주성 관료성이 배제되고 교육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해 교육자치제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4 .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은 배제되어야 한다.

5.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저해하는 온갖 비교육적인 잡무는 제거되어야 하며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학습은 철폐되어야 한다.

1986년 5월 10일

한국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교육민주화 투쟁 험난

 

1986년 5월 10일 Y중등교사회의 교육민주화 선언을 막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5공 전두환 정권과 당시 손제석 문교장관 및 김찬제 차관은 대책을 강화하고 전국적인 차단 정책을 수립했다.

 

이는 노태우 정권 이전이었고 때문에 노 대통령은 취임하기 무섭게 “불법조치”를 엄명한 것이다.

특히 1986년 전국 Y교사회장이었던 윤영규 교사는 그 해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으로 해임되었으며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해임 전 그의 신분은 전남 고흥군에 있는 공립 백양중학교 교사였다.

법원은 윤 교사에세 교육민주화선언을 한 죄를 물어 2년을 선고하면서 3년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

 

이에 힘입어 1987년 상급법원의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로 복직되어 교단에 되돌아 왔다.

전남도교육청은 윤 교사의 선고유예에 따라 1987년 담양에 있는 공립 고서중학교 교사로 발령했다.

고서중학교는 광주광역시에 인접해 자택(광주시내)에서 버스로 출·퇴근이 가능했다.

 

이날 이후 고서중학교장은 전남에서 가장 힘든 최악의 근무여건에 시달려야 했다.

윤 교사가 출근해서 퇴근하기까지 동태를 감시해야 하고 잠시만 눈에 안보여도 군교육장과 도교육청에 직보한 것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윤영규 교사가 수업이 없는 것을 기회로 교무실에서 사라졌고 옆자리에 앉은 교사에게 “화장실에 좀 다녀와야겠는데 설사가 심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지 말아달라”고 해놓고 종무소식이었다.

 

교감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안심한 것도 잠깐, 30분 이상 지나도 나타나지 않은 것에 화장실에 급히 가서 찾아 보면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학교안의 이곳 저곳을 이잡듯 뒤졌어도 보이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묻게 되고 이 때 “뒷문으로 나가시더니 택시를 잡아타시고 서울방향으로 가시더라”는 말에 낙심천만이었다.

 

이런 날은 대개 토요일이었고 학교에서 사라진 윤 교사는 서울로 직행하여 Y교사협의회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로 확산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87년까지 결성에 필요한 준비작업을 끝낸 뒤 이듬해(88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로 변모했다.

 

윤영규 교사는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2대까지 중임했으며 전남도교육청은 그해(88년)학년초 인사 때 윤 교사를 광주체육고 교사로 전보시켜 학교일로 바쁘게 해서 바깥일에 열중할 수 없도록 외부와 차단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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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달고 고왔던 6공 교육정책의 뿌리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2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로 활동 48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88올림픽 전국민 참여 성공적 개최 호소

역사상 처음 국회의사당 앞 대통령 취임식

교원 존중 지위향상 최우선 실현 의지

- 노대통령 취임사 재임 중 장관 교육감에게 지침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교육창달을 반영했던 4대 국정지표의 ①은 민족자존 ②는 민주화합 ③은 균형발전 ④는 통일번영이다.

 

세번째는 보통사람 시대의 토착화였다.

 

네번째는 당정협조체제 강화, 다섯번째는 야당과의 공조체제 구축, 여섯번째는 국민 전체의 올림픽(88) 참여, 마지막 일곱번째는 민화위 건의사항의 국정반영이었다.

 

특히 1988년 2월 18일 대통령취임준비위에서 마련한 ‘새 대통령상 정립을 위한 보고서’는 4개항을 담고 있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내각의 헌법상 권한 행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이 각료를 임명할 때는 미리 국무총리의 의견을 청취하는 절차를 관행화 한다.

 

둘째, 차관급 공무원 인사는 청장이나 시·도지사 등 독립관청의 장을 제외하고 소관부처 장관의 의견을 존중하는 수준으로 배려한다.

 

셋째, 차관 이하에 대한 임명장 수여는 국무총리에게 위임한다.

 

넷째,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만남은 주1회로 정례화해서 국정 전반에 관한 상호의견 교환으로 총리가 최고 참모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올린 취임준비위원회의 보고서는 권위주의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에 무게가 실렸다고 한다.

 

대통령은 국민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민의를 수렴하고 국정의 주요 사항 일수록 언론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도록 했다.

특히 선동성의 거창한 구호는 대통령 스스로 자제하고 정부기관 이외의 곳에까지 대통령 사진을 걸거나 부착하는 것을 재고하도록 요청했다.

 

이 대목은 25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 봐도 앞선 시대정신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또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자주 갖는 것으로 횟수를 늘리고 기자의 질문내용을 미리 알아서 사전에 통제하거나 겁박하지 말도록 권고했다.

 

이것은 대통령의 담화발표에서도 참고할 것을 권했고 권위주의적 언동과 TV보도는 시청하는 국민이 위화감을 갖기 쉬우니 언론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이밖에도 노 대통령은 직선임을 자부하고 보고를 받을 때 군의 지휘관처럼 차트사용을 자제하도록 했으며 회의 때도 먼 거리에서 문답으로 대화하거나 다수인을 접견할 때는 특히 유의하도록 했다.

 

아울러 회의장 분위기는 원탁회의를 선호할 것도 포함해서 세심하게 대통령직 수행에 참고가 되도록 한 것은 특징이었다.

 

취임사 내내 저라는 호칭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식은 좀 달랐다.

노 대통령은 이날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취임식을 갖고 6공정부의 출범을 알렸다.

때가 2월이라 날씨가 춥기는 했으나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 보다는 덜 춥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취임식 준비팀에 “특별히 노령자를 위해서 따뜻한 담요를 많이 준비하라”고 일렀다고 한다.

이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16년 만에 헌정을 회복시켜 직선한 대통령의 취임식이기에 그 뜻에 걸맞게 취임한 것으로 자부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사 내내 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훗날 회고록에서 밝혔다.

이전이나 이후의 대통령 대부분은 본인 또는 나라는 호칭을 쓴 것과 대조적이었으며 “저라는 호칭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랜 기간의 굴곡많은 역정을 매듭짓고 제 궤도에 오르는 것을 소망했다”고 한다.

 

보통사람 시대의 토착화

다음은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사 전문이다.

역대 교육장관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노 대통령 재임기간 입각한 교육각료 4명(김영식·정원식·윤형섭·조완규)과 교육감에게 끼친 영향이 막강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의 취임사에 담긴 진수는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가 개막된 것을 함축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1988년 2월 25일 취임한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사는 교육사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사료가치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날 취임사 전문은 이렇다.

 

친애하는 6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우리 헌정발전을 뒷받침해 주신 윤보선, 최규하 전임대통령과 평화적 정부이양의 역사적 선례를 세우신 전두환 전임대통령,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세계각국의 경축사절과 내외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기 위해 성스러운 이 민의 전당(국회) 앞에 모였습니다.

동아시아의 변방국가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뛰어오를 민족 웅비의 희망찬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나라에 민주정부를 세운 지 40년,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요청하는 역사의 조류속에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아득한 옛날 이 땅에 민족의 터전을 일궈 오신 모든 선조들에게 깊이 머리 숙입니다.

 

저는 먼저 반만년 동안 숱한 외세의 침략과 시련을 이겨 내며 빛나는 문화전통을 창조하여 민족의 자존을 면면히 이어 온 그 불굴의 자주독립 정신을 가슴에 새깁니다.

 

가까이로는 손 마디마디에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형제자매 동포 여러분에게 새삼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들의 손은 가난과 전쟁에 시달려 아무것도 없는 맨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잘살아 보겠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땀 흘려 일한 우리들의 맨손에서 이 나라는 세계가 높이 보는 신흥공업국가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을 이룩한 민주국가로 커졌습니다.

 

참으로 우리 국민은 위대했습니다. 이 놀라운 국민적 저력은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민족사의 출발점에 서서 저는 오늘이 있기까지 땀 흘린 모든 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국민여러분.

역사는 그동안 우리 민족을 여러 차례 시험해 왔습니다.

인내와 슬기, 국민의 뭉친 힘으로 모든 시험을 이겨 낸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가 부과되고 있습니다.

 

민족 전체가 한 차원 높게 뛰어오르라는 명령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자존의 새 시대’를 꽃피우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바로 그 ‘민족자존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국민여러분 앞에 엄숙히 선언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야 합니다.

능동적인 자기개혁으로 새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야 합니다.

새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서 저 창공으로 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개척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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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 현안 중 교육과제 최우선 강조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1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로 활동 48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
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학교주변 정화 청소년 교육환경 개선
대통령취임준비위의 국정 방향에 무게
교육통해 여성 지위향상 등 과제 소화

- 4대 국정지표에 담았던 ‘교육창달’ 쉽지않아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사회문제 중 교육과제 개선

<전호에서 계속>
이를 위해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영세상인을 보호한다고 명시했다.
세번째, 주요 사회문제의 개선은  국민의식개혁운동을 전개하고 당면한 교육과제를 개선한다고 했다.
노태우 정부의 교육과제 개선은 취임 2년차 문교부장관의 연두 업무보고회를 한국교총 강당에서 갖고 청와대 요리사를 동원, 교총식당에서 오찬을 함께한 것으로 달랐다.

김영식 장관이 떠난 이듬해 정원식 장관의 첫 업무보고를 받았을 때 일이었다.
6공 노태우 정부의 사회문제 중 교육과제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은 청소년 정책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앞서 노 대통령의 취임 전 ‘민화위’에서 채택, 건의했던 것으로 문교부의 주요 현안이었다.
청소년 교육환경을 적극 개선하고 여성 차별을 철폐하는 등 여성의 지위향상은 교육을 통해 펼쳐 심어가도록 했었다.
이는 곧 교원의 성비균형을 깨고 교사양성정책에서부터 남·여 비율없이 성적순으로 선발하는 것에 무게를 담았다.

그 이전까지 전국의 국립사대와 교대입학에서 3대 2의 비율로 남학생 우위였고 교사 임용이나 현직 초·중등교원의 교감·교장승진 및 교육전문직 선발에까지 남성위주로 여교원을 차별했다.

또 체육교과의 경우 여교사 보다 남교사 우선으로 성비적용을 구실로 삼았고 숙직업무 때문에 남 교사가 줄어드는 것을 우려했다.

한편, 청소년의 교육환경개선은 학교 주변의 유해업소 정비 등 기존의 조치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대신 행정의 구호나 정책에서 역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개선될 만큼 쉽지 않았다.

특히 교직의 성비 때문에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는 데 저해가 된 것으로 교대와 사범대학의 신입생 선발을 성적순으로 강화해서 전국이 공통으로 여학생 수가 급증했다.

제주도는 교대 입학에서 남학생이 한사람도 합격하지 못한 때가 있었고 교감·교장 승진에서 여교원이 한사람도 없게 되면서 교대는 남학생이 없고 학교는 여교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교대 입학은 성적순에 의한 결과였고 여 교장은 교감 자격강습부터 차출에서 차별된 것이 원인으로 3다도 중 여다의 고장답지 않았다.
 

노대통령 취임 준비위 얼굴들
제13대 노태우 6공 대통령의 취임 준비위원회는 1988년 1월 18일 삼청동 금융연수원 건물에 사무실을 낸 것으로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의 인수위와 다르지 않았다.

위원장은 대선 때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이춘구 민정당 의원이 맡았고 준비위원으로 최병렬, 현홍주, 이진, 김종인, 김중위 민정당 의원을 임명했다.

이에 강용식, 김학준 의원이 추가되었다.
노 당선인은 준비위원회에 “늦어도 2월 중순까지 정부 조각 및 국정운영 기본 계획을 수립해서 내 놓으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새 대통령상 정립을 위한 보고서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대통령과 내각·정당·국회·국민과의 관계설정과 6공화국에서 대통령의 직무수행 및 국정운영 방향도 마련토록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황해도 출신 홍성철씨가 낙점되었다.

지역편중 우려없고 인맥형성을 하지 않을 것이란 평에 따랐다.
조각을 위한 인선은 정부 부처와 각 기관의 협력을 얻어 광범위인사자료를 수집했다.
노 대통령은 후에 “이를 바탕으로 총리와 각료 후보를 인물별로 분류해서 각종 참고자료와 대조하면서 정리해 나갔다”고 밝혔다.

총리는 3~4명으로 압축된 후보 중 자신의 고향인 대구·경북출신은 배제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이현재 서울대 전 총장을 내정하고 홍성철 비서실장을 집으로 보내 승낙을 받아왔다.
그리고 내각 인선도 매듭짓고 문교장관은 김영식 한국교육개발원장을 확정했던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힌 대통령취임준비위의 역할은 6공의 국정방향을 잡는 데 기본이 되도록 미리 지침을 내린 것에 근거했다고 한다.

그 때 지침은 6개항에 달한 것으로 첫째가 일체의 권위주의 요소 제거였다.

이를 위해 ①청와대 기구개편 고려 ②대통령 의전과 언행개선 ③모든 행사의 형식과 경직요소 제거 ④언론관계 개선(부드러운 접촉) ⑤청와대 개방이다.
두번째는 민주·통일, 균형발전, 교육창달 등을 중점으로 하는 국정지표의 확정이었다.
이는 4대 지표로 집약했다. 1988년 5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지시된 것은 이의 압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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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첫 장관 교육개발원장 기용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69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로 활동 48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5공 교육정책과 맥락 같이 할 적임자

9남매 중 막내 서울사대 교수 역임

6공 출범 지역안배 제주도 출신 입각

- 대학총·학장 임명 승인 “절대로 간섭말라” 엄명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5공 정부 교육정책 달통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출범한 노태우 정부의 조각에서 문교장관 인선은 5공 정부의 교육정책에서 산모역할로 충실했고 교육개혁을 이끈 마지막 문교장관이었던 서명원 전 교육개혁심의위원장 추천이 주효했다.

이에 경합의 여지없이 한국교육개발원장인 김영식 전 서울사대 교수가 앞자리에 섰고 누구도 추종을 불허했다.

또 각료 인선에서 시·도별 지역안배까지 김영식 장관은 제주도 출신으로 문교장관이 되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제주도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9남매 중 막내였다.

막내인 만큼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고 여섯살 적 코흘리개 때 하루는 한라산 기슭의 산사에서 노스님이 탁발시주차 들러 사립문밖에서 목탁을 치므로 아버지가 “오늘은 막내가 나가서 시주쌀을 드리고 오너라”하고 말했다.

 

이에 어머니가 밥사발에 가득히 떠서 주는 흰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가 스님의 바랑에 조심스럽게 담아드리는 모습에 스님께서 “이 댁 대주님께 드릴 말이 있다”고 뵙기를 청하자 아버지가 반기면서 나가 인사를 올렸다. “이 아이가 몇째 아이냐?”고 묻기에 “9남매 가운데 막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님께서 “자식 복이 상복인데 더 큰 복을 이 아이가 타고 났으니 다른 아이는 못하더라도 이 아이만은 꼭 대처(육지)에 내보내서 가르치면 부모의 말년이 평안하고 가문도 빛날터이니 그리 해보라”면서 당부했다.

 

노 스님의 이 한마디가 아버지를 움직여 제주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기 바쁘게 전북 군산으로 유학을 보내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사대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그 이후 미국 피바디사대에 유학해서 교육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모교인 서울사대 교수로 재직하다 문교부에서 설립한 한국교육개발원장으로 재임했다.

 

당시의 한국교육개발원장은 초대(이영덕 전 국무총리)부터 서울사대 교수가 내림자리로 차지했으며 김 장관은 5공 때 임명되어 전두환 정부의 교육개혁과 정책안을 수립, 다음은 공로가 있었다.

 

더구나 직전 선배인 서명원 문교장관과 호흡이 맞아 전두환 정부의 후신이나 다름없는 노태우 정권에서 교육정책의 맥락을 잇게 하는데 적임으로 꼽았다.

 

이에 앞서 노태우 정부의 조각에서 각료로 발탁하는데 적용한 원칙 중 ‘전환기의 교육정책 이행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첫 문교장관은 어떤 장관보다 책무에서 무게가 달랐다.

 

임명권자인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식 문교장관에게 다음 세가지를 엄수하도록 강조했고 “정권의 명운이 달렸다”고 당부했을 정도이다.

 

노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문교장관자리에 오른 김 장관은 그 해(88년) 3월 5일 임명된 제34대 장병규 차관과 함께 대통령이 당부한 수명 이행에 밤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

 

3개항은 첫째 개인의 존엄성, 둘째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 셋째 전교조와 민중교육론 대처 및 불법화 조치였다.

지금도 전 김 장관은 취임 당시의 이같은 3개 사항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으나 2011년 10월 9일 노태우 전 태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 빠짐없이 수록해서 증언하고 있다.

 

첫번째 당부인 ‘개인의 존엄성 교육’에 대하여 노 대통령은 “교육에 대한 나의 철학이나 의지는 역대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어떤 부모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제했다.

 

노 대통령은 미래사회와 통일시대에 대비하고 첨단과학기술분야를 강화하면서 교육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등 교육 본래의 정책은 과거 정권에서 시행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자신의 임기부터 시작한 제6공화국의 교육정책은 6·29선언에 의해 크게 영향받지 않을 수 없고 종래의 국가관 교육과 함께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틀이 잡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교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조치에 잇따라 취할 수 있도록 문교장관이 역량을 발휘해 주고 대학에는 자율권을 부여해서 국·공립대학 총·학장 후보자의 선출권과 교수임용권 등을 대학에 위임하여 사립대학의 총장 임용 및 승인에도 정부(문교부)가 개입하지 말도록 했다.

 

아울러 등록금과 입시제도 등에 대한 대학의 자율권을 대폭 확대하고 대학의 자율화와 함께 초·중등교육은 교육자치제를 조속히 실현하는 것으로 6·29선언 정신에 부합하도록 했다.

 

노 대통령은 1988년 3월 4일 취임 후 첫 문교부 김영식 장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목포대학교 등 4개 국립대학의 단과대학 후임학장 임명안에 대해 “국·공립대학교의 총·학장은 해당 대학에서…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