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고교 졸업 해외유학 대학생 과외도 허용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4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농어촌 출신 대학생 학비조달 길 열고

고등학교 직업교육 위탁과정 신설

대졸 미만도 유학갈 수 있게 학벌타파

- 관공서 공휴일 줄이면서 한글날 국경일서 빼버려-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전호에서 계속>

노 대통령은 그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대중 총재는 그날 회담 준비를 치밀하게 해왔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내가 말한 것을 일일이 메모하며 빠짐없이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노태우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는 매우 현명하고 듣던 대로 머리가 치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국정 전반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고 거기서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리해서 회담이 끝난 후에 국민들에게 발표할 것으로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후에 노태우 대통령은 민정·공화·민주당 등 3당이 합당한 통합신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1990년 2월2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창당했다.

 

이로써 민자당은 국회의석을 민정계 129석과 민주계 54석, 공화계 34석 등 217석으로 거대 여당이 되었고 그 이전의 4당 체제에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과 양당구도로 달라졌다.

 

 

장관 재임 2년21일의 영욕

 

이렇듯 1990년은 정계개편과 국회의석이 여대야소 정국으로 바뀌면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관운도 상승했다.

 

1988년 12월5일 취임하여 1990년 12월26일 개각으로 퇴임하기까지 2년21일간 재임하면서 전교조 창립에 따른 가담교사의 대량해직으로 오명을 남겼고 국무총리 내정 후 외대 강의에 나갔다가 학생들로부터 계란세례와 밀가루를 뒤집어 쓴 모습이 TV에 비쳐지는 등 국무총리 재임기간 중 90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여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을 진행하고 있는데 김영삼 총재로부터 경질요구 기자회견으로 위상이 훼손되는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서울사대 교수 출신으로 문교부장관 재임 기간은 영욕이 반반이 되는 것으로 재6차 교육과정 개정 방향제시 등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교육은 최근 고교 한국사 검정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논란이 멈출길 없어 보인 것에서 당시를 재조명하게 된다.

 

이런 기회에 교육과정 및 교과서에 대한 추적은 무의미하지 않을 것 같다.

 

이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1894년부터 1910년까지 갑오경장과 신교육 및 통감부시대에서 근원을 더듬게 된다.

뒤이어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통치시대의 교육을 들 수 있고 1945년부터 1954년까지 미군정청의 과도기와 교수요목기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제1차 교육과정 시기(1954~1963)와 제2차 교육과정 시행기간(1963~1973)의 군사정권 때의 교육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제3차 교육과정 시기(1973~1981)는 유신시대로 꼽히게 되면서 제4차 교육과정 시기(1981~1987)의 신군부시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제5차 교육과정 시기(1987~1992)는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된 노태우 대통령의 재임기간이었고 제6차 교육과정 시기(1992~1997)는 김영삼 정부의 문민시대였다.

 

제7차 교육과정 시기(1997~2007)는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국민의 정부 시대이며 2007년부터 교육과정 차수가 없어지면서 수시개정체제로 2009년까지 노무현 정부가 주도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이명박 정부의 ‘2009교육과정’이 예행된 것으로 명맥을 이었고 2013년부터 박근혜 정부의 자유학기제 및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이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교육과정 교과서제도 손질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정원식 문교부 장관의 재임 기간 중 교육과정과 교과서 제도에 끼친 영향과 업적을 추적해 본다.

 

1989년 1월6일 고교졸업자의 해외 유학을 전면 허용한 지침을 발표했다.

 

이전까지 대졸미만 고졸자의 해외유학은 금지된 상태에서 풀어준 것이다.

그해 2월2일 대학생 과외를 전면 허용해서 학비조달을 도왔고 중·고교생의 학원수강은 방학기간만 허용했다.

 

4월13일 “고교 학군제를 광역학군으로 전면 개편할 방침”이라고 발표했으며 6월16일 학원법을 개정해서 규제사항 일부를 완화했다.

 

완화된 주요 사항은 재학생 학원수강을 자율에 접근시킨 수준이었다.

 

7월27일 문교부 직제를 개정하고 장학편수실을 유지시켰다.

 

10월16일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을 개정(7차)하고 발행자의 이윤을 25% 인상 조정 하는 등 기타 경비의 계산법을 확정했다.

 

1989년 11월 당시 문교부 교과서 발행 현황은 초등학교 146종, 중학교 127종 중 1종(국정)28종, 2종(검정)99종이었다.

고등학교는 781종 가운데 1종 445, 2종 336종으로 총합계 1054종이었으며 이 중 1종도서는 619종, 2종도서는 435종이었다.

 

정원식 장관이 마지막 재임한 1990년은 1월3일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문화부가 신설되어 문교부 편수관리관의 국어 및 한글에 관한 연구기관의 지도·감독권이 문화부로 이관되었다.

 

1월20일 문교부 고시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부분 개정해서 ‘직업교육 위탁과정’을 신설했다.

4월7일 독학에 의한 학위취득법을 제정하고 독학자에게 처음으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8월11일 고등학교 평준화제도의 개선방안을 확정, 발표했고 9월10일 문교부 훈령 제473호로 교과용도서의 주문과 공급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11월1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1991년 1월1일부터 적용되면서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제외시켜 빼버렸다.

 

이때 학계의 반발이 극에 달했고 한글학회는 삭발·단식투쟁으로 반기를 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원식 장관의 기억에서 가장 아픈 대목이다.

 

12월12일 문교부 직제를 개정해서 장학편수실에 ‘교육방송 관리관’을 신설했다.

EBS 교육방송에 대한 지도·감독이 주무였다.

그리고 2주일(14일)이 지난 12월26일 개각으로 교육부에서 떠났다. 떠나면서 재임 중 해직시킨 전교조 가입교사에 대한 얘기는 자제했다.

 

자신이 서울사대 교수로 있으면서 직접 가르쳤던 제자들도 해직의 아픔을 겪고 있었지만 한마디 하게 되면 상처만 건드린 것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에 유의한 것 같았다.

 

누구나 어떤 자리에 들어오면 언젠가는 나가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새삼 실감되었다.

정 장관 재임 때 해직된 교사들은 그 이후 다음 정권에 의해 대부분 복직되었고 정년까지 교단에 머물다가 정 장관보다 더 오래 재직한 뒤 떠날수 있었다.

 

이들이 복직 되었을 때 김영삼 정부는 “지난날의 아픔을 잊고 함께 교육을 발전시키고 개혁하자”고 위로 격려했을 정도였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교사의 혼맥으로 살려낸 우리교육 숨결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9회) -

회유와 탄압 이긴 지성의 고통은 방벽

현장의 젊은 피 끓어 스승자리 지켜

80년대 신군부 독재 맞서 민주화 지켜

- 권력의 무리 총동원 농간에도 굽히지 않았던 투쟁-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1988. 12. 5~ 90. 12. 26 재임>

24년 전 우리 교육의 모습

<전호에서 계속>

 

▲서울 이문초등학교의 정명원 교사는 남편마저 “전교조 활동을 계속하려면 이혼을 각오하라”는 말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5월이지만 밤바람은 싸늘했고 하늘에 별만 총총한 것에 눈물이 솟구쳐 뺨 위에 흘렀다.

결국 밤잠을 설치고 생각한 끝에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 교사는 탈퇴각서를 쓰고 말았다.

 

▲공립과 달리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법인에서 협력하지 않으면 전교조 가입을 막거나 탈퇴가 쉽지 않은 것에 일부 시·도교육청은 “국고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끊기도 했다.

 

이에 대부분의 사립학교 법인들은 “최대한 협력하겠다”며 “징계완화 내지 철회 허용을 재량에 맡겨 주면 그만한 성의를 보이겠으니 재고하라”면서 여유를 요청했다.

 

이유는 유능한 교사를 채용하기 위해 스카웃 등 애쓴 것에 반해 전교조 가입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있는 교육청은 “학교분회 전교조 조합원 수를 다만 몇 명이라도 줄여 달라”는 것으로 양보했다

 

▲1989년 5월에서 6월까지 사이에 서울시내 공립학교에서는 전교조가입교사를 탈퇴시키기 위해 벼라별 일들이 속출했다.

 

관악구 신림본동에 살았던 김원호 초등교사에게 느닷없이 시청의 김 모 운영과장이 찾아왔다.

 

김 과장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고 관악구청의 직원 한 명을 데리고 방문했다.

 

처음 만난 사이라 김 교사가 “누구시냐?”고 묻자 명함을 내밀면서 “선생님과 제가 같은 고향사람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보라며 향우의 불리한 징계처분을 막아 구제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떨어져 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김 교사는 구청에서 안내하고 온 직원에게 “이 분(김과장)과 제가 같은 고향사람인 것을 어떻게 알고 모시고 왔느냐?”고 묻자 “향우회 명부를 보고 알게 된 것 같다”면서 “저도 윗분께서 안내하라는 지시를 해서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가 막힌 김 교사는 시청에서 온 과장에게 “제가 고향 분에게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 오늘 출장명령으로 나왔기 때문에 들어가면(시청에) 복명을 해야 하는데 종친(김교사)께서 탈퇴할 의향만 보여줘도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김 교사는 “의향은 제 마음인데 아직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단정하시면 곤란하다”고 역정을 내자 “그 정도면 제 입장은 곤란을 면한다”고 말해 “마음대로 생각하시고 돌아가 달라”고 했는데 뒷날 교육청에서 “어제 고향분에게 탈퇴의사를 밝혔느냐? 확인해 보는 것”이라며 전화로 물어 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김 교사는 “그렇게도 할 일이 없으면 낮잠이나 자라”면서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 화근으로 징계 받았다.

 

▲같은 때에 서울 구로구 시흥1동에 사는 박 모 교사의 집에도 동장이 찾아와 “상부의 지시로 왔다”면서 “전교조 탈퇴를 권고하라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호소했다.

 

이에 박 교사는 “제가 탈퇴하지 않으면 동장님 목이 날리게 되는 거냐?”고 물은 뒤 “나설 일이 아니니까 그냥 돌아가라”며 타일러 보냈다.

 

▲같은 날 영등포여고의 송 모 교사는 사복경찰관 한 사람이 찾아와서 “마포경찰서 대공계 소속인데 선생님 행적을 조사해 봤더니 과거 학생운동 경력도 없으신 분이 왜 전교조에 가입해서 노조운동을 하시느냐?”고 물었다.

 

이에 송 교사는 “꼬옥 학생운동을 했어야 전교조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묻고 “학생들이 보고 있으니 죄없는 사람 오래 붙들고 이런말 저런말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돌아가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난들 이러고 싶겠느냐”면서 “나도 둘째 남동생이 고등학교 교사”라고 말한 뒤 발길을 돌렸다.

 

▲서울 성북구 장위1동에 살던 박 모 교사의 집에 “종암경찰서 정보과 소속 이 모 경장”이라며 찾아와 “정부에 대한 불만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왔다”면서 “전교조에서 탈퇴하면 이런 일도 없을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했다.

 

▲서울 태릉고교 이계림 교사는 수업을 막 끝내고 교무실에 돌아오자 고교와 대학교 동창인 중앙정보부의 임 모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만나 반갑고 옛 생각이 나서 동창 가운데 맥주홀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의 안부를 묻던 중 “같이 있는 동료(중정직원)인데 인사 나누라”며 동행한 사람을 소개했다.

 

서로 첫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그는 “함께 나가서 차라도 한 잔 나누며 애기하자”고 했다.

이 교사는 “아직 퇴근시간 전이라 교문밖에 나가려면 교감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주저하자 동창께서 “벌써 다 얘기 해뒀으니까 지금 퇴근해도 된다”고 했다.

 

마침 교감이 다가와 “이 선생! 가도 돼요”하면서 허락함으로 세사람은 학교 인근 괜찮은 음식점에 들어가 술잔을 나누었다.

 

이때 동창은 “전교조 까짓 것 탈퇴해버려! 그게 그렇게도 좋은 것이냐”면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게들 사는 거라”고 빈정거렸다.

 

그날은 그냥 가볍게 한 잔씩 나누고 헤어졌으나 뒷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일 집으로 이른 아침과 저녁 늦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왔고 그 때마다 “탈퇴했느냐?”고 확인한 것에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참다 못한 이 교사는 “이런 얘기 그만 하자”고 말하자 “그래도 교사라면 다 들 알아주는 직업인데 왜 그걸 놓치려고 그러느냐”면서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충고했다.

 

이에 “지금 내가 탈퇴하지 않으면 너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거냐?”고 묻자 “남의 직장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며 “넌 구제불능이야! 이젠 나도 모르겠다”고 짜증섞인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뒷날 학교에서 교감이 “서로 형편을 봐주면 든든한 빽이 되는 건데 왜 동창하고 등지고 살려고 그러냐”면서 조언을 서슴지 않았다.

 

같은 학교(태릉고교)의 유용태 교사도 고교 1년 후배인 중정직원 2명이 가끔씩 찾아와 전교조 탈퇴를 종용했으나 이계림 교사와 함께 굽히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 학교의 김현주 여교사는 아버지가 대한전매공사 신탄진담배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사장실에서 부른다기에 들어갔더니 “지금 막 중정분실에서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당신 딸이 서울 태릉

고등학교 교사가 맞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하자 “거 왜 하필이면 딸이 전교조에 가입해서 속을 썩히게 하느냐”면서 “당장 서울에 올라가서 탈퇴시켜버리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듣던 중 처음”이라며 “전교조가 나쁜 것이냐?”고 묻자 “거 참 몰라도 너무 모르네. 빨갱이들이니까 중정분실까지 나서는 것 아닌가. 일 커지기 전에 당장 탈퇴시켜야지 안 그러면 당신과 내가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에 놀란 아버지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서울 태릉고등학교에 쫓아와서 딸에게 “아버지가 죽고 사는 것은 너 하기에 달렸다”고 통사정하는 바람에 탈퇴했다.

 

▲서울 난우중학교 김정림 여교사는 국가보훈처에서 친척인 김 모 사무관이 집으로 찾아와 “전교조에 있지 말고 탈퇴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김 교사는 며칠 전에 출신 고교인 광주 대성여고에서 “국가보훈처 직원이 찾아와 신원조회를 하고 갔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 이 사무관에게 “왜 이러시는 거냐?” 물었다.

 

그러자 “몰라서 묻느냐?”고 반문하면서 “가족 중에 공무원도 있고 국영기업체 직원도 있는 선생님이 알아서 할 일인데 어쩌자고 전교조는 탈퇴하지 않고 버티느냐”고 책망까지 했다.

 

이에 미모의 김 교사는 “사무관인데 생각이 고작 그 수준이냐”면서 “아닌것 같아 실망했다”고 안타까워하자 말없이 돌아섰다.<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24년 전의 全敎組 對策 다시 보면 이렇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6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신규 조합원 시위가담 교사 계속 늘고

발붙일 수 없게 존속막을 방법 찾아

문교부 교육청 학교장은 역부족 한계

- 당시 장관은 정부 불허방침에 일손 놓고 이에 몰두-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문교부장관 징계 요령 시달

 

나. 징계 처리 절차

<전호에서 계속> 징계에 응하도록 출석 통지서를 보낼 때는 두 차례에 걸쳐 우편으로 보내지 말고 관계 직원이 지참하여 찾아가 전달토록 함으로써 징계 처리에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할 것.

 

단, 수령 거부 후 소청 제기 등에 대비하여 교직원 2명 입회 등은 교육감이 판단, 처리하기 바람.

특히 징계의결요구서 작성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물증이 될 수 있는 사진(예:농성장면) 등의 증빙서류를 최대한 활용하여 간략하게 작성하되 물증확보에 관계 기관과의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고 관계 서류 작성 등에 필요한 인원의 증가 배치 등 조치를 적극 강구할 것.

 

다. 징계 처리 일정

징계위원회 회부 일정은 주동자의 경우 89년 7월10일까지 회부해서 7월25일까지 15일 안에 의결하고 단순 가담자는 89년 7월15일까지 징계위원회에 회부해서 8월5일까지 20일 안에 징계 의결을 완료할 것.

 

라. 사립학교 교사

전교조에 가입한 사립학교의 교사 등은 국·공립학교 교원에 준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행정지도를 강화할 것.<이상 끝>

이렇게 해서 1989년 8월 말까지 집계된 전국의 전교조 가입 교사 징계 현황은 총 1천711명으로 파면 156명, 해임 925명, 직권면직 380명, 직위해제 250명이었다.

 

다음은 문교부 지시에 따라 시·도교육감이 이행한 것으로 충북도교육청의 ‘교직원 노조관련 교사 지도 대책’ 원문이다.

 

1. 방침

가. 교직원노조 관련 교사 전원 탈퇴해산 유도.

나. 불응교사 전원 징계 해임.

 

2. 추진 방법

가. 교육감 서한을 관련자에게 3차 발송, 탈퇴유도.

나. 학교장 책임하에 관련자 설득, 탈퇴유도.

다. 담당 부서별 면담 설득.

라, 관련교사의 성향을 분석하여 강경, 적극 가담자부터 징계.

 

3. 추진 일정

 

▲1단계 징계의결 : 89년 7월1일 주도자와 도지부장급 ▲초·중·고등학교 교장회의 교육감 서한(1차)발송 : 89년 7월15일 오후 2시 정부방침 천명 ▲직위해제자 징계의결 신청서류 제출 : 89년 7월5일 ▲교육감 교육청 부서 담당자 협의회 : 89년 7월6일 오후 2시 시·군지역교육청 인사담당자, 도교육청의 각 과단위 담당자 참석 ▲학교장 설득 회유 : 89년7월6일부터 20일까지 15일간 실시 ▲ 부서별 설득 면담 및 성향진단 : 89년 7월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노조탈퇴 유도 ▲2단계 직위해제자 징계의결 요구 : 89년 7월8일 ▲직위해제자 징계위원회 출석 통지서 교부 : 89년 7월10일 ▲탈퇴권유 공문(2차) 발송 : 89년 7월10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탈퇴서 요구 ▲징계대상자(탈퇴 불응교사 전원) 선정 및 징계의결 요구 신청서 작성 완료(제출) : 89년 7월15일 ▲2단계 직위해제자 1차 징계의결 및 최종 설득 : 89년 7월18일 1차 징계출석 불응시 ▲2단계 직위해제자 최종 설득 : 89년 7월22일 2차 출석 통지서 교부시 ▲2단계 직위해제자 2차 징계의결 : 89년 7월24일 처분일자는 7월30일로 ▲탈퇴권유 최후 통첩(3차) : 89년 7월26일로 7월13일까지 탈퇴서 요구자 ▲3단계 1차 징계위원회 개최 : 89년 8월1일로 7월23일 출석통지서 교부자 ▲3단계 징계위원회 개최 : 89년 8월8일로 8월2일 출석통지서 교부자 ▲3단계 징계처분 : 89년 8월10일. 적용일자 8월15일.

 

다음은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1989년 7월31일 긴급소집한 시·도교육감 대책회의 때 시달한 회의서류 원문이다.

 

1. 교원노조 결성상황

 

▲결성추세 : 19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조결성대회가 있은 후 5월30일 강원도 홍천군내 명덕국교 분회 결성을 시발로 6월15일까지 학교분회결성이 확산되어 불과 15일 동안에 4001명 가입했다.

 

이 가운데 6월10일부터 하루 평균 26개 분회를 결성했고 가입 교사는 506명으로 에상을 뛰어 넘었다.

 

그러나 6월16일 이후 결성 및 가입이 둔화되어 6월 30일까지 15일간은 1일 평균 11개 분회 결성으로 174명 가입했다. 드디어는 6월28일부터 탈퇴자가 늘기 시작하여 65명에 이르고 이는 동일기간 가입자 56명을 능가했다.

 

특히 6월30일 강경조치에 신규가입이 둔화되고 탈퇴자가 계속 늘고 있으며 7월1일부터 17일까지는 1일 평균 3개 분회결성으로 24명 가입에 불과하고 7월18일 이후 분회결성은 12일간 총3개 분회 29명 가입한 것으로 저조하다.

 

89년 7월29일 현재 15개 시·도지부와 96개 시·군지부 및 325개 학교분회가 잔유해서 유지되고 있으나 그동안 탈퇴한 교사는 7,946명으로 67.3%이고 파면 117명, 해임 140명, 미 탈퇴자 3,578명이다.

 

 

▲분석결과 : 성향분석 대상은 89년 6월23일 현재 총 5,682명으로 직위별로는 평교사 5,307명(93.4%) 20세~35세 4,456명(78.3%) 5년 경력 미만 교사 2,857명(50,3%)이다.

 

활동을 분석한 결과 초기 시·도지부 결성시 학생(공주사대·전남대·경상대·경북대) 등과 연계해서 교원노조교사 징계에 반발한 대학의 학생 소요가 발생했고 대학교수를 교원노조에 가입 유도한 것으로 89년 7월28일 현재 430명 가입으로 방지가 시급하다. 또한 교수의 가입으로 합법성 쟁취를 위한 집단행동이 7월26일부터 감행되고 있으며 징계방해 지연작전과 징계위원회장소 점거, 상당액의 활동자금이 신문광고(7회)와 5월28일 창립대회·6월25일 대의원회의 등 협찬을 통해 확보되었다.

 

 

2. 향후 전망

 

가, 결성과 탈퇴 : 새로운 학교분회 결성 및 신규가입이 둔화되고 은익 되었던 교원노조가입교사 상당수가 노출되고 있으며 분회 해산 및 가입자 탈퇴가 계속 증가할 것이다.

 

나. 교원노조활동(문제점) : 노조합법화 쟁취 및 확산은 재야 세력과 학부모 지지 성원을 위해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단식농성 강행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동조를 유도한다.

 

이는 일부 동조학부모들을 조직화하여 지원활동을 계속하고 교원노조지지 사회단체와 공동으로 공청회 등 대국민 홍보활동을 전개할 것이다.

 

여름방학 중 자체연수집회를 통한 조직 강화 노력이 예상되고 징계조치 지연을 위한 학생선동 및 집단행동으로 징계위원회 소집을 저지하면서 징계위원회에 대한 기피 신청과 징계위에 출석해서 장시간 진술 등 진행을 방해할 것이다.

특히 강경징계에 대한 비난 여론조성과 유도로 징계절차를 8월말 개학 후까지 연장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탈퇴 교사에 대한 회유와 압력으로 양심선언 미명하에 번의를 획책하고 정규 연수활동 방해 농성(연수내용 강사 등)과 2학기 개학 후 교내 농성, 학생 선동으로 수업 결손을 초래할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政權을 담보하고 全敎組 결성 總力 저지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1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사 감시 좌경 의식화 매도 공안몰이

학생통해 가정통신문 협력 호소

전국 반상회에 유인물 배포 거절소동

- 촌지 거부 교육계 부정 비리 불합리 척결 앞장 환영-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추모탑 찾아 순직사혼 기려

 

<전호에서 계속>

이를 지켜본 전주부사장도 “오늘 밤에 시청소속 청소부(미화원)를 동원하여 순직교원추모탑 주위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내일 행사를 돕겠다”고 정 장관을 거들었다.

 

언제 들었는지 정 장관 주변에 기자들이 몰려들고 각 TV는 서울 본사와 연락이 되어 뒷날 아침 스승의 날 행사장에서 중계할 준비로 바빠졌다.

 

순직교원추모탑에서 거행된 그해 스승의 날 행사는 향촉을 밝히고 술잔을 올려 병상에서 신음하다 이름도 없이 숨진 무명교사의 고혼을 달래주는 것으로 정성을 다해 치렀다.

 

본래 스승의 날 유래는 지금은 충남에 속하고 있지만 전북 강경여고생들이 앞장서 이름없이 숨져간 스승을 기린 것으로 높이 7m의 추모탑을 건립했고 그 탑신에 전원시인 신석정(전북대 교수)님이 추모시를 지어 새겼다.

 

이를 당시 김용환 전북도교육감이 주도한 것으로 추모시는 ‘스승님 감으신 눈망울에 / 눈망울이 남기신 광망속에 / 트이어 온 역사여 길이 빛나라’고 했다.

 

역대 교육장관 중 정원식 장관이 첫 참배해서 스승의 날 행사를 거행했고 후에 안병영 장관이 지나는 길에 들러 참배했을 뿐 다른 장관들은 그 이후 오늘까지 찾아보지 않았다.

 

 

전교조 결성 전야의 대결

 

1989년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 해 연초부터 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는 노동조합 탄생을 준비하기 위해 회장단 기자회견과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 등 제7차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노동조합건설 특별위원회’를 설치, 가동했다.

 

이처럼 전교조 결성은 사전의 치밀한 준비작업을 거쳐 전교협의 결의대회와 발기대회까지 마친 후 중앙과 시·도지부 및 시·군·구 지회와 학교분회로 이어질 단계에 접어들었다.

 

상황이 급속하게 전개되자 정원식 문교장관은 취임(1988. 12. 5) 후 3개월도 되기전 학년말의 혼란을 겪었고 예방대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에 정부·야당이 정권을 담보하고 교직원노조 결성을 위법·불법행위로 몰아 검찰에서 처벌해 주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교원노조가 결성되기 전이어서 이를 주도한 교사들만 ‘의식화’로 몰아 차단시킬 대책에 부심했다.

이 방침은 그해(1989년) 5월 15일 결정되었고 도하 각 신문(5월 17일자)에 보도되었다.

 

일부 언론은 이 조치에 앞서 전북도교육청의 지시로 전주시교육청에서 전교조 결성에 가담할 성향이 있는 교사의 동태파악 등 계속 감시·감독하기 위해 작성한 블랙리스트를 보도했다. 출처는 전북교사협의회가 제공한 것으로 극비리에 이를 입수해서 제보한 것이다.

 

블랙리스트에는 전주시내 초·중·고교에 재직한 12명의 교사와 소속학교, 담당과목, 출신대학, 활동내용, 성향을 파악해서 담고 있었다.

 

전북교사협의회는 구체사례로 경찰서 정보형사가 고창군 무장초등학교에 찾아가 교사의 수업내용을 학생들에게 물어 진술케 한 것도 포함해서 발표했다.

 

언론의 보도로 사태가 심각해지자 문교부는 ‘5월 위기설’에 대비해 시·도교육감에게 “의식화 활동과 관련된 교사에 대해 활동사항 및 학생에게 전파한 사실을 누가 기록해서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의식화 활동의 구체사례를 예시하고 ①수업 중 시국관련 발언과 운동권의 노래지도 및 임의 교재 사용 ②민교협(민주교수협의회)의 성원에 의한 ‘민주교실운영’ ③전교협 회원의 노조결성 움직임 ④사학재단 비리 등의 시정 요구를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거나 학내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행동에 중점을 두고 지도(감시) 감독하도록 했다.

 

이에 5월 3일(1989년) 한국교육개발원노동조합이 성명을 내고 “현 정권은 조작된 여론을 동원, 교육자적 양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교사들의 노력을 좌경 의식화로 매도하고 있으며 ‘교사 의식화 카드’를 작성하는 등 참된 교육 활동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또 “민주적 교사들의 노력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는 정부의 시대착오적 탄압을 단호히 배격하며 이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발표했다.

 

뒤이어 5월 18일에는 인천시교육청과 제주도교육청이 관내 초·중·고교장에게 “좌경 의식화 교사를 감시·고발하도록 학부모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내라”고 지시한 것이 폭로되었다.

 

이에 문교부는 시·도교육청이나 학교에 시달·지시한 것이 단,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폭로된 것에 개탄을 금치 못했고 “영이 서지 않는다”고 망연자실했다.

 

이때 가정통신문에 명시하라고 예시한 내용은 ①자녀의 소지품을 항시 확인하고 불온서적과 유인물을 소지하거나 탐독하지 못하게 단속하되 ②자녀와 대화를 통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며 ③수업에서 의식화 교육을 하는 사례가 발견되면 학교장이나 관계기관에 연락하여 불순분자로부터 귀하의 자녀를 보호하라고 하는 것까지 언론에 제보, 공개되었다.

 

이와 같이 범정부차원의 전교조결성 저지 예방대책은 문교부 뿐만 아니라 내무부(안정행정부 전신)에서도 조치한 것이 드러났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1989. 5. 28)을 사흘 앞둔 5월 25일 밤 전국적으로 개최한 반상회에 교직원노조 결성 추진 교사들을 매도하는 유인물이 대량으로 배포되었다.

 

이 유인물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전통적인 스승상을 훼손한다면 교육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므로 ‘교직원노동조합’을 불허한다는 정부 방침에 적극 호응해서 미리 막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호소했다.

 

유인물은 또 “학교에서 좌경 의식화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성적이 떨어지고 부모나 어른들에게 반항적으로 되며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면서 “정부에서도 강력히 대처해 나가겠지만 학부모님들께서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즉시 학교장과 상의해 달라”고 했다.

 

이 와중에 대전시내의 한 반상회에서는 “이 유인물은 반상회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 일까지 있어 보도되었다.

 

 

문교부 의식화 매도 후유증

 

전교협의 활동이 뒤늦게 부정 비리 불합리 척결에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맨 먼저 타격은 일부 사립학교의 교사채용을 둘러싼 기부금 등 뒷돈을 받았던 비리였다.

 

당시 사립학교 교사로 전교협에 가입하고 전교조 결성을 위해 앞장선 교사 중 대부분이 자신의 채용과정에서 건넨 금품을 상세히 밝혔고 이를 받은 학교측에서도 자진 반환해서 성과가 가시화 되었다.

 

이밖의 전교협 교사들은 한결같이 촌지 거절과 학생차별없는 참교육을 다짐한 것으로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심정적 동정과 지지가 상승했다.

 

이것이 사회여론의 일각에서 전교협에 대한 긍정적 반응과 전교조 결성을 성원하는 분위기로 확산되면서 재야세력과 정치권의 야당에서 옹호하는데 앞을 다퉜다.

 

이에 상대적으로 정부·여당 등 친관변 세력은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정권의 앞날을 우려하는 수준으로 저지에 총력을 경주하게 된 것이다.

 

고용부는 지난 9월 23일 전교조에 오는 23일까지 한달 시한으로 “해직교사 조합원을 탈퇴시키라”며 “어길 경우 노조설립은 취소하겠다”고 최후 통첩했다. 이에 김정훈 위원장은 “25년 가꿔온 참교육을 지키겠다”고 거부했으며 조합원 교사 전원이 투표로 결정해서 대응한다. 사진 양쪽은 이에 관한 해외 사례와 법외노조로 환원될 경우 예상되는 일들이다.

Posted by 아빠최고

장관귀를 열어 준 出入記者 조언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0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장관 취임 후 차관을 두번씩 바꾸면서

전주에 내려가 학부모 5백명과 만찬

전교조 결성 가담교사 대량해직 수습

- 추모탑 있는 것 처음 듣고 놀라 스승의 날 행사 준비-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전호에서 계속>

 

서울師大 출신 長·次官

 

6공 노태우 정부의 첫 개각은 문교부장관만 바꾸지 않고 차관도 함께 경질했다.

 

이것은 역대 정권에서 반복한 것이었고 예외가 아니었다.

 

정원식 장관이 임명된 날로부터 7일 만인 1988년 12월 12일 장병규 차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서울사대 출신 장기옥 기획관리실장이 승진, 임명되었다.

 

제35대 장기옥 차관은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나온 고학도 였다”고 알려졌다.

 

가정교사 때 가르친 학생 가운데 대학을 나온 뒤 법관이 된 사람이 많았다.

 

꼼꼼하면서 잔잔한 성격으로 “다정 다감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인물평이다.

 

1988년 12월 13일 차관으로 취임하여 1990년 3월 19일까지 재임하는 동안 정원식 장관을 보필하면서 전교조 가담교사 1,460명을 해직할 때 괴로워하고 외로웠다.

 

해직교사 가운데 서울사대 후배가 여러사람이었고 이들의 죄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기옥 차관이 기획관리실장일 때 교육개혁심의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을 선정하면서 하루는 필자에게 “사회(평생)교육분과 위원으로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왜 하필이면 나를 찍느냐?”고 되묻자 “출입기자(문교부) 가운데 일간신문과 방송기자 외에 교육전문지 기자도 한사람 포함시킬 계획이어서 묻는다”고 대답했다.

 

이에 “나는 국민교육헌장선포 기념일에 훈장을 주겠다고 해도 받지 않았는데 교개심위원을 하겠느냐”면서 “나는 빼고 대신 다른 기자를 넣으라”고 했더니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으면 조언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너무도 진지한 표정이어서 “기자는 넣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설이나 기사 등 기자와 논설위원이 쓴 것이 바로 참여가 되는 것이므로 교개심의 홍보에 이용할 의도가 아니라면 불참이 도움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진짜 조언이네”하면서 웃기에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교개심위원 명단이 확정되어 발표된 것을 보니까 언론인은 한사람도 없었다.

 

장기옥 차관은 문교부에서 떠난 뒤 강원도 횡성에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 창립을 부탁받고 개교담당 초대 교장이 되었다.

 

교명을 ‘민족사관고등학교’로 발표하자 대학입시 명문을 지향한 3군사관(士官)학교와 같은 뜻으로 대부분 잘못 알고 있었으나 민족사관(民族史觀)을 뿌리로 심은 사립고등학교였다.

 

때문에 교복도 신라의 화랑도가 입었던 복색에 가까운 것으로 특징을 삼았다.

 

 

法大출신으로 次官 교체

 

정원식 문교부장관은 취임 후 첫 장기옥 차관을 경질하면서 두 번째로 조규향 기획관리실장을 “승진·임명해 달라”고 국무총리에게 추천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차관은 장관의 추천으로 총리가 제청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수순이다.

 

1990년 3월 20일 제36대 문교부 차관으로 취임한 조규향 차관은 서울법대 출신이었다.

 

김해(경남)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불우소년이었으나 근면하고 성실했다.

 

법대 졸업 후 행시에 합격하고 서울시교육청 총무과에서 수습(사무관)한 것이 교육행정의 출발이었다.

 

정원식 장관에 의해 1989년 5월 28일 전교조 결성에 가담한 교사의 대량해직 후유증을 수습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서울사대(교육학과)출신 차관보다 법대출신 차관의 보필이 더 도움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인지 조규향 차관은 첫 기자간담회 때 “기성세대의 계몽주의 사상 영향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교조 해직교사를 문제삼은 재야의 반기를 겨냥한 것으로 “내가 한 마디 해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야 말로 계몽주의에 영향받은 대표적 사례”라고 예거했다.

 

이처럼 전교조 해직교사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확산되면서 국정에 미치는 영향 또한 지대했다.

 

때문에 정원식 문교장관은 법률상 제기된 문제는 조규향 법대출신 차관에게 맡기고 자신은 민심수습에 나서는 것으로 사태의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순직교원추모탑 알려줘

 

이를 위해 그해(1990년 5월14일) 전북도교육청을 돌아보는 기회에 전주시내 및 인근 시·군의 학부모 대표 5백명을 교육청 강당에 초청해서 모으고 저녁을 함께 나눴다.

 

이때 문교부 출입기자단을 대동한 것으로 규모를 과시했고 당시의 언론이 끼친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후문을 낳았다.

 

이날 필자도 출입기자단 일원으로 참여해서 만찬은 기자단 지정석에서 일행과 함께 했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다가 정원식 장관의 식탁에 눈이 갔고 전북도지사와 전주시 부시장, 홍태표 전북도교육감이 합석한 것에 취재 낙수를 위해 접근했다.

 

정 장관과 눈이 마주치자 “식사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서 마침 빈자리가 있어 “앉아서 차 한 잔 함께 하자”고 했다.

 

홍 교육감의 소개로 전북지사와 전주부시장과 인사도 나누었다.

 

바로 앞자리에 앉았던 김홍원 장관비서관이 “오늘 좋은 기사 많이 취재했지요”라고 말을 걸었다.

 

이 때다 싶어 정 장관에게 “내일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다.

 

장관이 대답하기 전에 홍태표 교육감이 “스승의 날 아닙니까?”하고 가로챘다.

 

그래서 “제가 왜 묻는지 아시겠습니까?”라고 역습하자 “글쎄요”하면서 머뭇거렸다.

 

더 이상 여유를 주지 않고 “전주시내 공설운동장 경내에 전국에서 하나 뿐인 ‘순직교원추모탑’이 있잖아요. 그러니 장관님은 오늘 저녁만 먹고 서울로 돌아가지 말고 내일 아침 일찍이 추모탑에 참배하고 올해 스승의 날 행사를 치르면 당장 전주KBS와 MBC 등 TV뿐만 아니라 언론이 전국에 중계·보도할 것이고 그러면 유례가 없었던 스승의 날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에 정원식 장관은 “홍 교육감은 왜 이런 일을 알려(보고)주지 않았느냐”면서 질책을 서슴치 않았고 김홍원 비서관에게 “오늘 밤에 전주시내 꽃집을 뒤져 최고의 화환을 마련해서 내일은 진심으로 스승을 기리는 헌화가 되도록 준비하라”고 각별히 지시했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국감 때 장관모습 집권층 눈밖으로 밀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6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원정보부 부인않고 야당돕나?”

윗선의 장관 색갈 검증에 관운 막장

여당의원 눈길 곱지않아 불안한 예고

- 차관이 장관보다 바빠지는 분위기에서 알아차려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당시 박석무의원 증언

<전호에서 계속>

 

‘교원정보부’에서 동향감시를 했던 교사들은 참담한 우리 교육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된 민주교육을 갈구하고 있었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고, 교육이 바로서지 못하면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는 교사들이다.

 

문교부와 교원정보부 노릇을 하고 있는 관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가를 뼈저리게 반성했어야 한다.

특히 전담반 책임자 박 모 장학관은 교직경력이 많은 분이어서 그 직책을 맡았다고 했으니 더욱 그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88년 10월 국정감사를 계기로 그동안 공화당정권 때부터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해묵은 갖가지 문제들이 잇따라 폭로되었다.

 

삼청교육대 문제·일해재단 문제·새세대육영회 비리·우리마당 테러사건 등등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어느 하나 책임감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모습들을 본 적이 없다.

 

88서울올림픽을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외국인들 보호는 철저히 해서 사고하나 없이 끝낸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어었으나, 장기수 탈주사건이 일어나 막상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치안질서는 엉망이 되고 있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끝인지,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느낌이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했고 교직은 성직이라고 했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교육은 어느 때에나 정상화될 것인지, 교육을 보는 문교관리들의 시각은 언제나 정상화 될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

 

하루빨리 교원정보부를 해체하고 신뢰받는 공정한 문교행정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었다.

 

그 해(1988. 10. 5) 문교부 국정감사가 불러온 후유증은 밖에서는 연일 문교부 질타가 잇따르고 안에서는 청와대의 눈길이 곱지않은 것에 겹쳐 내부에서 조차 간부들의 김영식 장관에 대한 시선이 차갑고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었다.

 

국감 당일 정보기관의 청와대 보고에서 “교원정보부를 들춘 야 3당의 삼총사(이철·박석무·강삼재의원)는 물론, 정대철 국회문공위원장까지 장관(김영식)을 두둔한 모습이었고 그만큼 차관(장병규)의 입지가 흔들렸다”고 적시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또 이를 입증한 것으로 “이철·박석무의원 등이 교원정보부를 장관도 모르게 운영했다고 매도하면서 질타했고 ‘장관도 모르는 청와대 보고’라는 표현이 공공연했다는 것은 국감에 제보한 배후를 짐작케 한다”고 몰아부쳤다.

 

이에 집권여당의 배수진과 보수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국감이후 개각이 따를 경우 김영식 문교장관의 경질이 점쳐지는 등 어수선했다.

 

특히 국감장에서 쾌도난마처럼 교원정보부를 파헤친 이철의원 등은 국민정신교육의 핵심에 칼을 겨눈 것으로 5공의 신군부를 이어받은 6공 노태우 정권에게 김영식 문교장관의 불신감을 부채질하는데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 국정감사를 함께 했던 여당의원들도 야당이 신이 났던 것 이상으로 배신감이 드는 등 그냥 물러서기 어려워 대안을 찾는데 부심했다.

 

이에 김영식 문교장관의 국감에 임하는 태도는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비쳐졌고 직선 대통령인 노태우 정권의 출발이 허약하고 호락호락하게 비쳐질 수 없음에 의기상통했다.

 

이로 인해 문교부장관실은 찾는 사람이 줄었고 국감 때 질타의 대상이었던 교원정보부 관계관과 국민정신교육담당 장학관의 입지는 윗선에서 더욱 신망이 두터워지는 것을 장관도 모르지 않았다.

 

이 무렵 문교부출입기자들도 정치권의 여·야를 닮은 듯 보·혁갈등의 기운이 심각하게 드러났고 아세곡필과 정론이 맞부딛치는 것을 조·석간 신문의 보도 기사는 물론 방송뉴스에서 확인해 보기 어렵지 않았다.

 

하루는 김영식 장관을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고 기회에 심경을 묻자 “문교부 국감을 교원정보부가 받았다면 나는 더 무서운 사람들로부터 국무위원(장관) 자질을 검증받고 있다”면서 “관운인 걸 어찌하겠느냐”고 한숨이었다.

 

이렇게 1988년 10월이 가고 11월에 들어서자 계절도 가을로 접어들어 설악산 단풍 뉴스가 TV를 통해 전해지면서 개각설이 나돌고 국회 일정에 따라 새해(1989) 정부예산안의 심의가 소관 상위의 의결을 소수의견으로 달아 예결위에 넘기자 부별심의가 본격화 되었다.

 

국감은 새해 예산안 부수법안과 전년의 결산심의자료를 얻기 위해 실시되는 것으로 인식된 마당에 정부도 국감뒤에 예산안 심의 대비가 현안이었던 만큼 소관 상위에 이은 예결위 심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문교부도 차관을 중심으로 국회예결위 심사에 대처하는 일 이상 긴급한 것이 없었고 이를 위해 어떤 것도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관실은 바빠지고 장관실은 한가해지는 상반된 분위기였고 국회에서 예산안 처리가 끝나기 무섭게 정국은 연말 개각에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국무위원은 연말 개각이 홍역처럼 무서운 시류병이었고 6공 정부의 첫 문교각료가 맞게 되는 1988년 12월은 이미 추풍낙엽처럼 엄동이 머지않은 것을 예고했다.

 

 

당찬 서울사대 출신 입각설

 

당시 김영식 문교장관이 서울사대 교수 출신이면서 한국교육개발원장에서 입각한 사실이 떠올려지더니 드디어는 “당찬 서울사대교수출신 입각을 기대하게 된다”는 루머가 보수성향 관변학자들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때만 해도 ‘당찬 사람’은 월남한 실향민을 뜻했고 강인한 의지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상징성이었다.

 

이로 미루어 김영식 장관은 제주도 출신으로 전형적인 학자타입이었고 출세가도에서 경쟁할 상대를 만나면 조우하는 것 조차 피할 만큼 심성이 고와서 경쟁력은 제로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문교장관 후임으로 같은 서울사대 교수 출신이 거명되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성격상 ‘물태우’라는 별칭에도 반응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개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오판한 측도 있었다.

 

그러면서 국감 때 있었던 사안을 이유로 문교장관을 바꾸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같은 서울사대 출신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침에 “옳다”고 해놓고 저녁에 실세에서 “아니다”라고 하면 즉각 “그렇다”고 뒤집어 합리화 하는데 이골이 난 어용성향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교육각료는 이런 타입을 요구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사기에 충분했다.

 

집권층의 실세를 찾는 관변학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친관변학자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문교부에도 미묘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Posted by 아빠최고

정부‘국민정신교육 강화’에 송곳 질문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3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장관이 생각하는 ‘국민정신’묻고 추궁

교육보다 정권안보 우선 사찰에 쐐기

애매 모호한 개념 ‘획일 강제주입’ 질타

 

- 고교생도 교육민주화 투쟁 호응 담벼락에 낙서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이철 의원이 밝힌 폭로내용

아래쪽에는 보고한 교육청의 표시와 송화자 및 수화자를 밝히도록 빈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민주교육추진 서울교사협의회 창립대회개최 결과 보고’라는 커다란 제목이 달린 1987년 9월 22일 23시00분의 ‘보고사항’ 문서에는 대충 이런 식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① 「사안의 개요」 난에는 일시 장소 참석기도인원(약5백여 명)을 기록한 다음, ② 현장지도라는 항목에는 ▲87년 9월22일 17:00시 서울교위 장학진 교장 2백50명, 경기교위 장학진 교감 93명, 계 3백43명이 현장에 도착, 지도 ▲ 동일 16:30분 서초경찰서 전경 3중대, 사복경찰 2개 중대, 진압경찰 1개 중대 현장에 도착, 집회 장소의 정문 후문을 봉쇄하고 주변 통제, ▲ 교위는 시경학원반장에게 동부교회 집회 봉쇄시 개최지를 변경할 가능성에 대비, 예상개최지(강남YMCA지회, 마리스타수도원)에 경계요청 등의 내용이 있었다. 계속되는 보고 내용을 한번 더 살펴보자.

 

③ 지도 및 진행경위 내용에서 ※ 18:10분 교장, 교감이 동부교회 진입기도 교사 50여 명을 개별 설득 귀가시킴, 회장 주변에는 교회진입기도자 1백여 명이 산재하고 있음 ※18:40분 서울교육감이 현장지도요원 격려차 도착 ※18:50분 교회 정문 앞에서 5백여 명이 연좌농성, 서초경찰서장이 금일행사는 교회사정으로 취소되었으므로 귀가 할 것을 종용, 불응시에는 강제해산시킬 것을 통보 ※19:00분 농성참가자들이 불응하자 경찰에서는 사복 1개 중대를 투입, 강제해산시킴 ※19:15분 제2의 집회장소 집결에 대비, 장학진과 교장, 교감을 역삼국민학교에 대기 시킴 등.

 

▲시·분별로 정보접수 송, 수화자 이름도 명기

 

그 후 일부 교사들이 서울 구로구에 있는 갈릴리교회로 장소를 옮겨 창립대회를 마치자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관기관의 제보를 받고 서울교위 학무국장 외 현장지도요원 다수가 갈릴리교회에 갔으며, 구로경찰서에서는 전경을 승차시킨 버스 2대를 배치하였음.

 

문교부 대책반은 주동자, 적극가담자 및 임원에 대한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지도대책 수립을 당부함.

이게 교육 2세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문교부와 교육청에서 하고 있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른바 업무(?)의 일부였다.

 

초·중·고 대학까지 사찰

 

12대 국회 초반부터 나(이철)는 상임위(문공위)에서 문교부를 상대로 정책질의를 할 때마다 이른바 ‘국민정신교육 강화’라는 문교부의 정책방향에 대해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대체 ‘국민정신교육’이라는 게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자유·민주·정의 그리고 평화 등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들을 저절로 간직하고 이런 것을 소중하게 키워나가면 되는 것이 바로 국민의 도리요, 인간의 도리인데 국가가 굳이 애매모호한 ’국민정신‘이라는 있지도 않은 개념을 만들어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요? 나치하의 독립국민들이 강요받았던 소위 파쇼적 국가이념, 국민정신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아니 다 접어두고 대체 장관은 ‘국민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하고 아무리 추궁하고 캐물어도 문교부관계자들은 적당히 둘러댄 채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비단 나(이철)뿐만 아니라 당시 같은 문공위원이었던 趙蕣衡의원도 빠지지 않고 질문공세를 퍼부었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趙의원이 되받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그리고 나면 또 다시 내가 이어가는 식의 회의진행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국민정신교육을 강화시켜나가겠다는 문교부의 복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에 앞서 2~3년간 그렇게 ‘정신교육, 정신교육’하며 열을 올리던 실상이 ‘교원정보부’였다니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문교부가 스스로 명명한 ‘교원정보부’의 명칭이 ‘국민정신교육담당관 소속의 전담실’임을 미루어 볼 때 그간에 이루어진 ‘국민정신교육’이란 민주적 교육을 하고자 자신을 희생해가며 애쓰는 참된 교사들의 꽁무니를 비밀리에 쫓아다니며 감시하고, 그것의 빌미를 마련하는 ‘정보사찰교육’ 바로 그것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대학과 중·고교를 구분함이 없이 학생과 교사·교수를 불문하고 문교부 본부에서부터 일선의 학교현장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교육은 없고 마치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정보사찰 기능만이 무서운 눈초리를 번득이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감시에 장학관 명찰

 

문교부 대학정책실은 시간시간마다 전국의 대학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는 야전사령부로 변했고, 마음에 맞는 교직원들을 마구잡이로 선발하여 연구사니 장학관이니 하는 명찰을 달아 대학 학생처 구석구석에 배치하여 학생과 교수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 수집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른바 어디를 지칭하는 지 뻔한 ‘유관기관’과의 대책회의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첩보’가 오고가고 경찰의 출동을 무시로 ‘요청’하는가 하면 교육청마다, 대학까지 가리지 않고 ‘보안위원회’가 설치되어 이를 구실로 국가안전기획부는 말 그대로 합법적인(?) 감시로 교육계를 유린하고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심지어 담벼락에 쓰인 몇 구절의 낙서가 불온(?)하다고 하여 지역경찰서 형사가 한 학교의 고3학생 전체를 밤늦게까지 붙들어 놓고 ‘필적조사’를 한답시고 “이 글자를 한짜로 써보아라”는 식의 문초 아닌 문초까지 학교에 지시하고 학교관계자들은 꼼짝없이 순응하는 것은 물론, 상호 정보교환까지 하고 있음을 확인 했을 때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또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이런 충격적인 파탄상이 유신시대의 폭압구조 아래서부터 총체적으로 자행되기 시작하여 5공 시대에는 철벽의 구조로 자리 잡았으며 소위 민주발전을 운위한 6·29선언 이후 6공화국이라 불리는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모양새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새 시대’와 ‘보통사람’을 내세우는 큼직한 활자를 볼 때마다 그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탄스러운 작태가 상기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정권담당자들은 또 무엇이라고 미화하고 어떤 구실을 갖다 붙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민주교사들이 구속되고, 파면 당하고, 느닷없이 서울한복판에서 서해바다 백령도로 발령받아 신판 유배를 떠나야 했던 긴박한 사안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속출하면서부터 문교부에 이런…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속칭 「교원정보부」 이렇게 찾아냈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1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문교부 국정감사 전날 밤 늦게 전화제보

1988년 10월 5일 정권의 치부 드러나

팻말도 없는 밀실 교육민주화 교사 탄압

- 李哲의원 당시 상황 “훗날 교훈되게” 소상히 밝혀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당시 서울교육감 증언

 

6공 노태우 정부의 초기에 있었던 전교조 가담 교사에 대한 징계 당시를 전한 김상준 전 서울교육감의 증언은 “아까운 인물(교사)들이 있었다”면서 “건져 보려고 유도심문까지 했었다”는 징계위원들의 후일담에서 여러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직의 힘이 크다는 것은 알지만 참으로 두렵다”고 했다.

 

최후 진술에서 어떤 교사는 “제가 여기 징계위원회에 들어설 때까지는 징계위원 여러분들을 우리의 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여러분은 긴 시간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제가 오해 했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갈 길을 갈 수밖에 없다하고 나갈 때는 힘이 쭉 빠지더라”고 말했다면서 “순진한 젊은 교사들이 마술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했고 그러니까 나는 그들에게 미련이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이 근래 전교조는 특별히 이상 징후가 없다. 그래서 우리 교육계는 대체로 평온하다”고 그날의 일들과 비교했다.

 

 

장관 단명 부른 국감폭로

 

1988년 10월 5일 실시한 당시 국회 문공위원회의 문교부 국정감사에서 이철(무소속)의원이 폭로한 속칭 ‘교원정보부’사건은 그해 12월4일 개각에서 김영식 문교부장관을 경질시킨데 결정적인 것으로 장관의 단명을 불러왔다.

이철 전 의원은 당시의 폭로에 대해 “감사 전날밤 전화제보로 문교부에 밀실이 있다고 알려왔고 속칭 교원정보부는 이렇게 찾아냈다”고 밝혔다.

 

또 “아부를 서슴지 않던 문교부 공무원들은 막상 문제의 팻말도 없는 조그만 방을 지키면서 서류함 열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1988년 10월 5일 문교부 국정감사 때 이철 의원은 자신이 폭로했던 장면을 “훗날 교훈이 되도록 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밝혔다.

 

 

▲문교부 직원도 잘 모르는 ‘교원동태파악 전담실’

 

1988년 10월 5일 낮 문교부 국정감사장에서 나는 “아, 잠깐만요!”하고 교육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원들의 열기에 가득찬 질문에 가까스로 답변을 마치고 김영식 문교부 장관이 다음 사항으로 말문을 돌리려는 순간, 말을 멈추게 했다.

미처 고개를 들 틈조차 없이 모두 숨가쁘게 질의 응답을 메모하고 있던 기자들과 문교부 관계자들은 일순 시선을 나에게로 집중시켰다.

 

물론 장관도 나에게 급히 고개를 돌렸다.

“문교부는 이 종합청사의 몇 층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16, 17, 18층을 문교부가 쓰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까?”

 

그날 문교부에 대한 국정감사장으로 쓰고 있던 곳이 바로 16층의 대강당 상황실임을 상기시키면서 장관에게 연속된 질문을 던졌다.

 

이 말이 나오자 긴장의 연속이었던 국정감사장의 분위기는 직전과는 달리 약간 누그러지는 듯이 보였다.

내가 갑자기 핵심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문교부 청사 얘기를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잠깐 동안 멍해 있던 장관도 친절히 대답했다.

“예, 저희 문교부는 이 종합청사의 16, 17, 18층까지 3개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말을 받았다.

“그런데 15층에도 문교부 소관 사무실이 하나 더 있지요?”

 

장관은 곧장 답을 하지 못한 채 옆자리의 張병규 차관에게 자문을 구하는 몸짓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張차관은 역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했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재차 다그쳤다.

 

“이 청사 15층에 문교부 업무와 관련된 사무실이 있을 텐데요”

나의 확신에 찬 거듭되는 질문에장관은 급기야 뒷줄에 배석해 있던 국장과 실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제서야 묵묵부답으로 쳐다보고 있던 국·실장 가운데 한 사람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朴용진 장학편수실장이었다.

“예, 자료실로 사용하는 방이 있습니다마는…”

 

그도 마치 자신의 소관 업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말로 꼬리를 흐렸다.

일련의 뚱딴지 같은 사무실 사용문제가 제기되자 방청석은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질문하는 목소리에 강한 힘을 넣었다.

 

“자료실 말고는 분명히 15층에 다른 업무를 맡아 보는 방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여전히 張차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얼굴만 붉히고 있었고 朴 장학편수실장은 답변인지 혼잣소리인지 모를 말로 “그 외 특이한 사항은 없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마이크를 잡아당기며 정색을 하고 마지막 포문을 열었다.

“15층에 朴찬봉장학관이 책임자로 있는 문교부 소관의 사무실이 하나 있지요?”

 

이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朴 장학편수실장은 몇 차례 판에 박힌 답변을 늘어놓았다.

문교부의 직제와 듣기좋은 업무분장을 얘기하며 어떻게든 의원들을 설득해서 적당히 넘겨보려는 눈치가 역력했다.

문교부관계자들의 솔직한 답변을 듣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쉽게 내려졌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파헤쳐 추궁해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방의 구체적인 담당업무는 무엇이며 박찬봉 장학관 외에 직원은 모두 몇 명인가요? 그런 식의 우물쭈물한 대답을 할 바에는 차라리 업무일지를 제출하시오.“

 

그 방의 성격과 구체적인 업무까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朴장학관이 책임자로 있는 그 방은 여기 있는 장관도 모르고 있을 뿐더러 문교부 직원 대다수도 그런 방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특수한 곳으로서 이른바 교육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교사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탄압하는…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바꾼 교육정책”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9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민주화 열기

교사 학생 학부모가 “교육주체” 선언

역사의 필연이며 막을 수 없었던 대세

- 교육 바로 세울 최소한의 조건 5개항 구체 제시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교육민주화 선언 전문

 

‘오늘날 우리 사회에 요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는 역사의 필연이며 각 부문의 민주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교육부문의 민주화는 사회전체의 민주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교육의 민주화는 사회민주화의 토대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해방 이후 우리 교육은 전 민족의 노예화를 획책하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시류에 따라 부침한 정치권력의 편의대로 길들여진 충직한 시녀로 전락하였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누더기 같은 헌법 속에 그나마 사문화된 채 보장받지 못했고 식민지하에서 구조화된 교육행정의 관료성과 비민주성이 온존되어 왔다.

 

그 결과 민족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교사들은 국민의 교사가 아니라 극도로 통제된 관료기구의 말단으로 떨어졌고 교직은 성직이란 미명 아래 점수 매김과 서열 짓기에 급급한 사이비 교육의 굴레 속에서 무조건적 희생을 강요당했다.

 

참다운 교육을 위한 교사의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노력과 자율성도 배척되고 있다.

 

힘써 진리를 탐구하고 심신이 건전한,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비정한 점수경쟁과 물질만능적 상업주의 문화의 홍수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방황하고 있다.

비민주적 교육현장은 일방적으로 선정된 경색된 가치만을 학생들에게 주입할 뿐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모순에 찬 사회구조와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교육제도로 말미암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학부모들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당면한 과열경쟁 속에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의 인간다운 삶을 저당 잡혔다.

 

산적한 교육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당국의 행정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그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음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조령모개(朝令暮改)는 한국교육정책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이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 학생, 학부모가 소외된 상태에서 추진되는 이른바 교육개혁이란 기술적이고 지엽적인 절차상의 손질일 뿐,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국민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교육개혁은 교육, 인간, 사회를 보는 관점의 개혁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 학생, 학부모를 교육주체의 자리에 확고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육의 민주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교육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사들의 역할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무기력한 말단관료, 역사 속의 방관자의 위치를 탈피, 새로운 교사로서 참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교육의 주체로서 국민의 교육적 요구를 올바르게 실천할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교육의 민주화는 민주사회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바탕이라는 자각에서 새로운 교육건설의 역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모든 장애와 고난을 이기며 민주교육을 실천해 나갈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교육민주화의 최소 조건

 

이에 우리는 교육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5개항을 천명하는 바이다.

1.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중립성 보장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은 정치에 엄정한 중립을 지켜 파당적 이해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2.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3. 교육행정의 비민주성 관료성이 배제되고 교육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해 교육자치제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4 .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은 배제되어야 한다.

5.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저해하는 온갖 비교육적인 잡무는 제거되어야 하며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학습은 철폐되어야 한다.

1986년 5월 10일

한국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교육민주화 투쟁 험난

 

1986년 5월 10일 Y중등교사회의 교육민주화 선언을 막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5공 전두환 정권과 당시 손제석 문교장관 및 김찬제 차관은 대책을 강화하고 전국적인 차단 정책을 수립했다.

 

이는 노태우 정권 이전이었고 때문에 노 대통령은 취임하기 무섭게 “불법조치”를 엄명한 것이다.

특히 1986년 전국 Y교사회장이었던 윤영규 교사는 그 해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으로 해임되었으며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해임 전 그의 신분은 전남 고흥군에 있는 공립 백양중학교 교사였다.

법원은 윤 교사에세 교육민주화선언을 한 죄를 물어 2년을 선고하면서 3년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

 

이에 힘입어 1987년 상급법원의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로 복직되어 교단에 되돌아 왔다.

전남도교육청은 윤 교사의 선고유예에 따라 1987년 담양에 있는 공립 고서중학교 교사로 발령했다.

고서중학교는 광주광역시에 인접해 자택(광주시내)에서 버스로 출·퇴근이 가능했다.

 

이날 이후 고서중학교장은 전남에서 가장 힘든 최악의 근무여건에 시달려야 했다.

윤 교사가 출근해서 퇴근하기까지 동태를 감시해야 하고 잠시만 눈에 안보여도 군교육장과 도교육청에 직보한 것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윤영규 교사가 수업이 없는 것을 기회로 교무실에서 사라졌고 옆자리에 앉은 교사에게 “화장실에 좀 다녀와야겠는데 설사가 심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지 말아달라”고 해놓고 종무소식이었다.

 

교감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안심한 것도 잠깐, 30분 이상 지나도 나타나지 않은 것에 화장실에 급히 가서 찾아 보면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학교안의 이곳 저곳을 이잡듯 뒤졌어도 보이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묻게 되고 이 때 “뒷문으로 나가시더니 택시를 잡아타시고 서울방향으로 가시더라”는 말에 낙심천만이었다.

 

이런 날은 대개 토요일이었고 학교에서 사라진 윤 교사는 서울로 직행하여 Y교사협의회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로 확산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87년까지 결성에 필요한 준비작업을 끝낸 뒤 이듬해(88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로 변모했다.

 

윤영규 교사는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2대까지 중임했으며 전남도교육청은 그해(88년)학년초 인사 때 윤 교사를 광주체육고 교사로 전보시켜 학교일로 바쁘게 해서 바깥일에 열중할 수 없도록 외부와 차단을 시도했다.

 

Posted by 아빠최고

“국민은 일방적으로 이끈 대통령 불원”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4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이면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되는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국민의 동행자로 꿈과 아픔 같이해야

자유 평등 행복이 가득한 나라 되게

이것이 진실로 추구할 대통령의 모습

- 뛰어난 한사람 보다 평범한 여러사람의 협력 필요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노대통령 미래지향 취임사

 

‘아울러 사회정의의 실현을 가로막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어떠한 형태의 특권이나 부정부패도 단호히 배격하겠습니다.

폭력과 투기와 물가오름세를 반드시 막고자 합니다.

 

부의 부당한 축적이나 편재가 사라지고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과 결실을 거두면서 희망을 갖고 장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입니다.

 

민주개혁과 국민화합으로 이제 우리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화합은 정부의 정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피는 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온 국민의 화합을 정부차원의 해결과제로만 미루지 맙시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너그럽게 풀어 나가야 할 문제로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이런 뜻에서, 앞서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을 끌어 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에게 자제와 아량을 보여야 합니다.

 

50억 인류 서울올림픽 축제

국민 여러분!

우리 겨레의 큰 경사인 서울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50억 인류의 평화대축제가 바로 이 땅에서 열리게 됩니다. 세계 속의 한국을 새롭게 드러내는 민족 재탄생의 자리에, 너와 내가 따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합심 협력하여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에게 길이 기억될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승화시킵시다.

서울올림픽은 민족사적 의미에서, 이를 계기로 우리가 민족통일의 항로로 진입한다는 데 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물줄기를 타고, 12년 만에 처음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의 세계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이 화해의 거대한 합창은 한반도에 마침내 통일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렁찬 합창 소리에 화답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국제평화와 협력의 외교적 노력을 더욱 더 쏟고자 합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과의 유대를 더 한층 강화하는 한편 제 3 세계와의 우의를 더욱 굳게 하겠습니다.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국가에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게 하여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것입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북방에의 이 외교적 통로는 또한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분단의 조속한 해소를 열망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민족통일의 길은 낙관할 수 있는 길도 아니요, 비관 할 길은 더욱 아닙니다.

 

오로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길일 뿐입니다.

 

때마침 우리 내부에서도 민족의 자존을 높이려는 분위기가 크게 자랐습니다.

이 기운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통일과 세계적 진출을 북돋을 힘찬 원동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자존의 바탕 위에서 민주역량을 다지고 안보태세를 강화하면서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기회는 그저 기다리는 자에게보다 착실히 준비하는 자에게 먼저 온다는 교훈을 항상 기억합시다.

 

저로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길이 보인다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개의하지 않고 방문해 어느 누구와도 진지하게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 당국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공산국가들조차 거부하고 있는 교조적 이념을 민주의식이 체질화된 이 땅의 자유 시민들이 수용하리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폭력이 아니라 대화가 분단을 해소시키고 민족의 재결합을 가져오는 정직한 지름길임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대화의 문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열려 있음을 확인합니다. 민족자존의 새 시대에 부응하여, 대화하며 공존하고 공존하며 협력함으로써 휴전선에도 화해의 봄을 가져옵시다.

 

그리하여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함께 통일의 열매를 거둡시다.

 

관련 국가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당사자들이 민주적 방식을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의 전령사가 그 어느 곳으로 부터든 서울을 방문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특별 대우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사람의 한걸음에 힘실어

국민 여러분!

 

우리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겨 주는 것으로 시작했던 20세기는 그 극복의 토대를 마련해 준 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수평선 너머에 활짝 핀 통일조국의 미래상이 우리를 손짓하고 있습니다.

 

이미 치솟고 있는 우리 국민의 저력과 민족적 자존을 국가적 도약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활활 태울 때 우리 조국은 분명히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끄는 세계의 젊은 거인으로 뛰어오를 것입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손에 넣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열과 국민이 희생을 했고 땀을 흘렸던 것입니까.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어느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주보다 평범한 상식을 지닌 여러 사람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상식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라의 발전이 곧 국민 개개인의 자유·풍요·행복으로 이어지는 ‘복지의 시대’입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이 거룩한 단상에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자리는 국민 여러분이 만든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제가 서 있는 것은 국민 여러분의 명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와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는 국민 여러분들로부터 별개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저는 오로지…’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