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정보화 시대 대비 컴퓨터교육 서둘러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4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조기시행 차질없게 컴퓨터보급 우선

초중고 교육과정 손질 교과서 개편

남북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 통일 합의

-한국 최초 잠수함 건조 진수 과학위성 첫 발사 성공-

32대 조완규 교육부장관

<1992. 1. 23~ 93. 2. 25 재임>

총리가 이끈 교개추위원회

<전호에서 계속>

 

당시 교육부장관에게 영향력이 막강했던 교육개혁추진위원회는 정원식 국무총리가 위원장이었고 최각규 경제기획원장관과 조완규 교육부장관이 당연직 부위원장으로 12명 위원과 전문위원 5명은 다음과 같다.

 

▲ 위원 이수정 문화부장관, 이진삼 체육청소년부장관, 한봉수 상공부장관, 최병렬 노동부장관, 김진현 과학기술처장관, 정범모 한림대교수, 이영덕 명지대 총장, 홍태표 전북교육감, 김창열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상임고문, 김순자 한국교총 부회장, 이순목 우방건설 대표, 손명원 (주)쌍용자동차 사장 등 이었다.

 

▲ 전문위원은 김신복 서울대 교수, 김중수 KDI국민경제교육 연구소장, 이종재 서울대 교수, 장용국 단국대 교수, 한종하 KEDI원장이었다.

 

이처럼 공교육에 대한 개혁열망과 의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역대 정권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다만, 시기에 따라 핵심과 강도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군부 독재 때는 혁명성을 강하게 부각했고 민주화 시기에도 민주와 자율에 바탕한 개혁의 상징성을 첨삭하기 바빴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외쳐온 교육개혁은 열망에 미치지 못했고 혁신이라 해도 될 만했음에도 마냥 개혁으로 이어져 온 것이 우리교육의 현주소가 되는 것 같다.

 

 

교과서 제도와 변화의 시작

 

조완규 교육부장관은 재임 2년에 접어들면서 교과서 제도와 발행의 불합리를 배제하고 정상화할 조치를 마련하는데 진력했다.

 

1992년 3월6일 ‘부교재(참고서)의 가격사정에 관한 규정’을 마련해서 대통령령(제13602호)으로 공포, 시행했다.

또 이 것만으로 학생들의 부교재 값 부담을 덜어주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대통령령으로 가격사정 근거를 마련한 것에 힘입어 그 해 5월29일 교육부령으로 예규(제224호)를 확정, 참고서 가격사정에서 적용할 기준이 되게 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교과서 출판업계의 결속력은 대단했다.

 

부교재까지 가격을 사정받게 될 것에 헌법에서 보장한 출판의 자유를 내걸어 대응한 것에 다음 날(5월30일) 교육부는 승인사항으로 부교재 가격사정 대행 업무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이에 앞서 3월31일 검인정 교과서 사건의 부과금 취소 소송이 대법원 판결로 승소하면서 출판업계는 더욱 의기양양했고 여전히 교육부의 행정력에 밀리지 않았다.

 

그 해 4월이 되면서 교육부는 재외 동포용 교과서 업무를 국제교육진흥원이 취급하도록 했으며 5월11일엔 재단법인 한국교과서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해 발기했다.

 

1992년 6월3일 UN환경회의에서 채택한 ‘리우선언’에 자극 받아 모처럼 환경교육을 준비했다.

특히 보름이 지난 6월17일 프랑스에서 남·북한 기계화를 위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 통일안이 합의되었다.

이에 남북한 교육교류의 물꼬가 트이는 듯 싶었으나 늘 그랬듯이 남북관계는 시작에 비해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이어서 6월30일 중학교 교육과정이 개정되어 고시되었다. (교육부 고시 제1992-11호)

 

1992년 8월3일 교육부는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대비한 초·중등학교의 컴퓨터 조기교육 시행계획을 확정, 발표하고 1994년까지 전량 보급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불과 22년이 지난 오늘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한 급진전으로 발전했다.

기성세대만 컴맹이 있을 뿐, 신세대는 스마트폰이 일반화 되어 정보화가 이미 학습의 도구로 진화했다.

특히 그해 8월11일 한국 최초의 과학위성 ‘우리별 1호’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발사한 것이 성공하고 지구궤도를 돌았다.

 

9월17일 조완규 장관은 “중학생까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이용한다”면서 “모든 학교에서 금연교육을 정례화하라”고 지시했다.

 

10월에는 우리 해군의 기술진이 건조한 최초의 잠수함이 진해 해군항만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뒤이어 11월27일 문화부 고시(제1992-31호)로 ‘외래어 표기법’이 개정되어 발표되고 오늘에 이른다.

이밖에도 1992년은 6월30일과 9월30일, 12월30일 등 세 차례에 걸쳐 21세기 대비교육 중학교 교육과정 개정에 이어 고등학교도 실업·가정의 8교과목을 2교과로 축소 조정해서 기술·산업·가정이 통합됐다.

또 9월30일은 유치원 교육과정을 개정해서 교육부 고시 제1992-15호로 공포했고 초등학교 교육과정도 개정하여 고시(제1992-16호)했다.

 

이때 편성에서 교과 특활 학교재량시간을 넓혔다. 대상은 9개 교과로 초등은 1~2학년 5교과를 통합했다.

10월30일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개정했다(교육부 고시 제1992-19호)

 

개정된 내용은 21세기 대비 교육을 위해 필수·선택 조정과 특성별 교과목 설정 및 외국어고등학교의 교육과정 편성을 보완했다. 또 고등기술학교 교육과정도 함께 개정해서 고시(제1992-20호)했다.

 

이처럼 교육과정 개정 작업은 1993년까지 이어져 6월30일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개정되면서 교련과목도 개정 고시했다.(1993-20호) 공업고등학교의 ‘2이 체제’운영학교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지침은 1993년 12월24일 시달했다.

 

6공 노태우 정부는 1993년 2월25일 임기까지 근로자에게 1994학년도부터 야간대학의 특별전형 50% 이상 확대를 권장했으며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의 교과서 관계자들을 초청해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한·일 양국의 교과서 개선협의를 추진했다. 이 사업은 1998년까지 존속하자고 쌍방이 합의했었음에도 흐지부지 되었다.

 

6공 마지막 교육부를 지킨 조완규 장관은 92년 8월29일 교과서 체제의 기준을 제정했고(교육부 고시 1992-13호) 1995학년도부터 사용할 중학교 2종(검정)교과서 검정실시를 공고(1992-14호)했다.

 

이때 검정과목은 영어 외 10과목으로 공청회를 통해 검정기준을 공개한 것이며 교육사상 처음이었다.

1992년 7월1일엔 교과서에 게재한 저작물의 출처를 명시하도록 했으며 12월4일 북한의 지명은 그대로 교과서에 표시해서 1995학년도용 교과서부터 사용했다.

 

1992년 11월12일 헌법재판소는 당시 국정교과서제도는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이 헌소는 1989년 5월 전교조의 남기정 교과위원이 교육법 제157조에 대한 위헌소지를 내세우며 냈던 것을 결정했다.

1992년 12월21일 교육부는 1996학년도부터 사용할 고등학교 2종 교과서의 검정실시를 공고했다.

이 때 대상교과목은 국어 외 58종으로 보통교과 54, 전문교과 5종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고교 졸업 해외유학 대학생 과외도 허용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4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농어촌 출신 대학생 학비조달 길 열고

고등학교 직업교육 위탁과정 신설

대졸 미만도 유학갈 수 있게 학벌타파

- 관공서 공휴일 줄이면서 한글날 국경일서 빼버려-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전호에서 계속>

노 대통령은 그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대중 총재는 그날 회담 준비를 치밀하게 해왔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내가 말한 것을 일일이 메모하며 빠짐없이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노태우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는 매우 현명하고 듣던 대로 머리가 치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국정 전반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고 거기서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리해서 회담이 끝난 후에 국민들에게 발표할 것으로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후에 노태우 대통령은 민정·공화·민주당 등 3당이 합당한 통합신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1990년 2월2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창당했다.

 

이로써 민자당은 국회의석을 민정계 129석과 민주계 54석, 공화계 34석 등 217석으로 거대 여당이 되었고 그 이전의 4당 체제에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과 양당구도로 달라졌다.

 

 

장관 재임 2년21일의 영욕

 

이렇듯 1990년은 정계개편과 국회의석이 여대야소 정국으로 바뀌면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관운도 상승했다.

 

1988년 12월5일 취임하여 1990년 12월26일 개각으로 퇴임하기까지 2년21일간 재임하면서 전교조 창립에 따른 가담교사의 대량해직으로 오명을 남겼고 국무총리 내정 후 외대 강의에 나갔다가 학생들로부터 계란세례와 밀가루를 뒤집어 쓴 모습이 TV에 비쳐지는 등 국무총리 재임기간 중 90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여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을 진행하고 있는데 김영삼 총재로부터 경질요구 기자회견으로 위상이 훼손되는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서울사대 교수 출신으로 문교부장관 재임 기간은 영욕이 반반이 되는 것으로 재6차 교육과정 개정 방향제시 등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교육은 최근 고교 한국사 검정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논란이 멈출길 없어 보인 것에서 당시를 재조명하게 된다.

 

이런 기회에 교육과정 및 교과서에 대한 추적은 무의미하지 않을 것 같다.

 

이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1894년부터 1910년까지 갑오경장과 신교육 및 통감부시대에서 근원을 더듬게 된다.

뒤이어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통치시대의 교육을 들 수 있고 1945년부터 1954년까지 미군정청의 과도기와 교수요목기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제1차 교육과정 시기(1954~1963)와 제2차 교육과정 시행기간(1963~1973)의 군사정권 때의 교육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제3차 교육과정 시기(1973~1981)는 유신시대로 꼽히게 되면서 제4차 교육과정 시기(1981~1987)의 신군부시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제5차 교육과정 시기(1987~1992)는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된 노태우 대통령의 재임기간이었고 제6차 교육과정 시기(1992~1997)는 김영삼 정부의 문민시대였다.

 

제7차 교육과정 시기(1997~2007)는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국민의 정부 시대이며 2007년부터 교육과정 차수가 없어지면서 수시개정체제로 2009년까지 노무현 정부가 주도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이명박 정부의 ‘2009교육과정’이 예행된 것으로 명맥을 이었고 2013년부터 박근혜 정부의 자유학기제 및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이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교육과정 교과서제도 손질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정원식 문교부 장관의 재임 기간 중 교육과정과 교과서 제도에 끼친 영향과 업적을 추적해 본다.

 

1989년 1월6일 고교졸업자의 해외 유학을 전면 허용한 지침을 발표했다.

 

이전까지 대졸미만 고졸자의 해외유학은 금지된 상태에서 풀어준 것이다.

그해 2월2일 대학생 과외를 전면 허용해서 학비조달을 도왔고 중·고교생의 학원수강은 방학기간만 허용했다.

 

4월13일 “고교 학군제를 광역학군으로 전면 개편할 방침”이라고 발표했으며 6월16일 학원법을 개정해서 규제사항 일부를 완화했다.

 

완화된 주요 사항은 재학생 학원수강을 자율에 접근시킨 수준이었다.

 

7월27일 문교부 직제를 개정하고 장학편수실을 유지시켰다.

 

10월16일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을 개정(7차)하고 발행자의 이윤을 25% 인상 조정 하는 등 기타 경비의 계산법을 확정했다.

 

1989년 11월 당시 문교부 교과서 발행 현황은 초등학교 146종, 중학교 127종 중 1종(국정)28종, 2종(검정)99종이었다.

고등학교는 781종 가운데 1종 445, 2종 336종으로 총합계 1054종이었으며 이 중 1종도서는 619종, 2종도서는 435종이었다.

 

정원식 장관이 마지막 재임한 1990년은 1월3일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문화부가 신설되어 문교부 편수관리관의 국어 및 한글에 관한 연구기관의 지도·감독권이 문화부로 이관되었다.

 

1월20일 문교부 고시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부분 개정해서 ‘직업교육 위탁과정’을 신설했다.

4월7일 독학에 의한 학위취득법을 제정하고 독학자에게 처음으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8월11일 고등학교 평준화제도의 개선방안을 확정, 발표했고 9월10일 문교부 훈령 제473호로 교과용도서의 주문과 공급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11월1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1991년 1월1일부터 적용되면서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제외시켜 빼버렸다.

 

이때 학계의 반발이 극에 달했고 한글학회는 삭발·단식투쟁으로 반기를 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원식 장관의 기억에서 가장 아픈 대목이다.

 

12월12일 문교부 직제를 개정해서 장학편수실에 ‘교육방송 관리관’을 신설했다.

EBS 교육방송에 대한 지도·감독이 주무였다.

그리고 2주일(14일)이 지난 12월26일 개각으로 교육부에서 떠났다. 떠나면서 재임 중 해직시킨 전교조 가입교사에 대한 얘기는 자제했다.

 

자신이 서울사대 교수로 있으면서 직접 가르쳤던 제자들도 해직의 아픔을 겪고 있었지만 한마디 하게 되면 상처만 건드린 것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에 유의한 것 같았다.

 

누구나 어떤 자리에 들어오면 언젠가는 나가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새삼 실감되었다.

정 장관 재임 때 해직된 교사들은 그 이후 다음 정권에 의해 대부분 복직되었고 정년까지 교단에 머물다가 정 장관보다 더 오래 재직한 뒤 떠날수 있었다.

 

이들이 복직 되었을 때 김영삼 정부는 “지난날의 아픔을 잊고 함께 교육을 발전시키고 개혁하자”고 위로 격려했을 정도였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6공 다음 정부 이을 3당 통합 정계개편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3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여소야대 국회의석 여대야소로 역전

교총회장 입각티켓설 후문 나돌아

사대출신 문교차관은 법통으로 교체

-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 민자·평민당 양분-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교총회관 연두보고에 의미

 

<전호에서 계속>

교육과정 개정안은 당시 문교부의 함수곤 편수국장이 보고했으며 정원식 장관도 서울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교부장관의 자문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어 연두보고가 어렵지 않았다.

 

이날 교총회관에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연두보고를 받은 노태우 대통령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교총의 상당수 평직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교총의 어용설이 달갑지 않은 상황에 청와대 연두보고회장으로 이용된 것은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교총 사무국 직원이라고 해서 모두 전교조에 적대감을 갖는 것도 아니었다.

 

간부직은 어쩔 수 없이 회장과 사무총장의 의중에 반하지 않고 따라 주는 것으로 직장인의 윤리를 지키고 나약했다.

그러나 하위직원 대부분은 교총회관에서 청와대 업무보고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긍지로 삼거나 자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총의 사무국 직원 채용이 공채로 바뀌면서 정실인사가 배제된 만큼 유능한 직원이 늘었고 간부들도 이를 의식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교총나들이에 힘입어 전교조에 미칠 반사적 영향을 기대했으나 생각만큼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다.

 

교사3불론의 대상에는 교총의 회원교사들도 남의 일 같지 않아서인지 공감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윤형섭 교총회장을 옹립했던 교총의 핵심세력은 “다음 개각 때 문교부장관으로 입각할 티켓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기세등등했다.

 

이와 같은 루머가 파다해진 상황에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심복들도 만만치 않게 맞대응했다.

당시 문교부의 어떤 국장은 “대통령이 전교조 때문에 교총회관에서 문교부 연두 업무보고를 받은 것을 갖고 오버센스한다”며 “교총사람들 수준으로 비쳐질까 걱정”이라고 핀잔이었다.

 

어쨌거나 교총의 윤 회장은 싫지않은 기색이었고 그날로부터 문교부가 발표한 교육정책 등 현안 대책을 챙겨 대안 수준으로 제시했다.

 

이에 문교부 간부들은 “벌써부터 장관 여행연습이냐?”고 반문섞인 어투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

 

 

뜻밖의 문교차관 경질 후문

 

윤 회장의 의중에 관계없이 정원식 장관에게는 불편한 관계로 이어지면서 정부 인사에서 문교부 차관의 경질이 뜻밖에 이뤄졌다.

 

차관 경질은 그 해(1990년) 3월 19일 발표되면서 장기옥 차관 후임에 서울법대 출신 조규향 차관이 3월 20일 취임했다.

 

전임 장기옥 차관은 정원식 장관이 총애한 같은 서울사대 출신인 점과 달랐다.

장기옥 전 차관은 1988년 12월 13일 제35대 문교차관으로 임명되어 1년 3개월 재임했다.

 

정원식 장관이 88년 12월 5일 입각한 날로부터 8일 만에 임명된 것으로 후임 조규향 차관과 함께 이·취임식을 가졌다.

 

이 때 이임사에서 “조규향 후임 차관은 행시합격 후배로 한 번도 나를 추월한 적이 없었다”면서 “다른 사람보다 조 차관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떠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볍다”고 말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기 어렵게 모호했다.

당시 문교부차관 경질을 놓고 부내 간부들은 “정통사범대학 출신 차관에서 법통으로 바뀐 것에 의미가 있다”면서 “전교조에 대한 대응책이 강경으로 급선회한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기자들에게 묻지도 않은 것을 반문하는 등 미묘했다.

 

정작 본인(조 차관)은 표정이 어둡고 고뇌에 찬 모습인데 반해 휘하의 간부들 가운데 강경파가 이처럼 차관인사에 민감한 것은 이변이었다.

 

그러니 출입기자들은 전교조에 대한 법적 대응책이 나올 것에 촉각을 세우며 차관실의 침묵을 지켜보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3~4월은 노동계의 춘투가 시작되는 때였고 5월과 6월에 이어 7~8월은 대학가의 시위가 절정에 이르면서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앞장선 가투 시위도 열기를 뿜었다.

 

 

3당 합당의 여소야대 타개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에 5공 청산을 마무리짓고 1990년에 접어들면서 국회의 여소야대 타개책과 차기 대권인계를 위한 3당 합당작업에 나섰다.

 

정치권의 동향에 넓은 귀를 갖지 못한 교육계는 노대통령이 교총회관에서 문교부 연두 업무보고를 받은 것에만 관심이 쏠린 것으로 그 정치적 향배는 가늠해보기 어려웠다.

 

이 와중에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가 합의하고 민정당과 합당으로 정계를 개편했다.

이로써 두 야당은 여당으로 길을 바꾼 셈이었고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만 이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3당 합당을 이룬 노 대통령은 1990년 1월 3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요지는 “사흘 전인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5공 청산 문제가 종결되었으니 더 이상 과거 문제를 재론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에 다음 날인 1월 4일 김영삼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지방자치제에 앞서 정개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 보수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써 노 대통령의 의중과 궤를 같이했다.

 

노 대통령은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했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민정당의 당직을 개편해서 대표위원에 박태준의원, 사무총장에 박준병의원, 국회 원내 총무에 정동성의원을 임명했다.

 

이어서 김종필·김영상 두 총재를 1월 6일 골프장에서 만나 회동하고 정계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데 기본인식을 같이 했다.

 

반면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반대 의사를 갖고 있어 난관이었다.

 

1990년 1월11일 노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서 오찬을 나누면서 단독회담을 갖고 ‘광주 보상 문제’와 ‘민생문제’등 광범위 의견을 나눈 끝에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하고 웃으면서 가볍게 의중을 떠보았더니 “노 대통령의 심중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여당과 합친다는 말이 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어려워질 것입니다.

 

비록 여소야대의 4당(민정·공화·민주·평민) 체제지만 협조할 것은 해드릴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노태우 회고록 上권 485페이지 수록)

 

노 대통령은 그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대중 총재는 그날 회담 준비를 치밀하게 해왔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내가 말한 것을 일일이 메모하며 빠짐없이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김대중 총재는 매우 현명하고 듣던 대로 머리가 치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국정 전반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고 거기서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리해서 회담이 끝난 후에 국민들에게 발표할 것으로…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문교장관 교총회관서 청와대 연두 보고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2회) -

노태우 대통령 보고 장소 변경 파격적

당시 윤형섭회장 ‘교사3불론’ 어필

전교조 활동에 대적할 교총위상 배려

- 문교부 제7차 초·중등교육과정 개정작업 박차-

현직 도종환 국회의원 증언

<전호에서 계속>

 

도종환 교사가 경찰에 끌려간 뒤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담임을 맡은 학급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가 났는지 헤어보기 어렵다는 등 성적이 뒤떨어지고 아이들을 다 버려놨다”고 헐뜯었다.

 

학교수업에서 4·19혁명과 3·15부정선거에 대해 얘기하면 징계를 받는 게 당시 교육계의 현실이었다고 한다.

 

통일교육을 하면 좌경의식화 교육을 한다고 의심받던 시절이었으며 한겨레신문에 실린 북한 사진을 수업시간에 보여주면서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주민들도 생각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강 모 교사는 “북침설을 가르쳤다”고 고발당해 감옥에 갔다고 했다.

 

당시 경찰의 조서에서 증인으로 불려온 학생 6명의 진술에는 “강 교사가 북침설을 주장하면서 북한체제를 찬양했다”고 증언한 대목이 있었는데 증인 중 한 학생은 그날 결석으로 수업을 받지도 않았다면서 그 시절 그런 왜곡된 고발과 잘못된 언론의 보도가 맞장구쳤다고 했다.

 

또 전교조 가입 교사 중 최 모 교사는 “북한의 샛별초등학교를 찬양하고 국화인 진달래를 가르쳤다”고 담임을 박탈당한 사례도 증언했다.

 

그런데 샛별초등학교는 북한에 있지 않고 경남 거창에 있는 학교로 KBS-TV의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는 프로에서 소개된 바 있고 진달래꽃 노래도 북한 노래가 아니라 오펜바하가 작곡하고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유경환 시인이 작사한 ‘진달래꽃처녀’였다고 한다.

 

어떤 신문은 전교조 교사가 초등학생들에게 ‘해방가’를 가르친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으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소설가 박태원 작가가 쓴 시에다 김성태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였으며 원 제목은 ‘독립행진곡’으로 8·15해방 직후 교과서에 실렸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 할 때 즐겨 부른 노래 중 하나라고 했다.

 

도종환 교사가 경찰서에 잡혀간 이튿날 아버지가 찾아와서 ‘나갈 방법이 있다. 탈퇴서를 써주면 교육청에서 풀어주겠다고 애비에게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른 써주고 나가자”고 재촉했다.

 

이에 도 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갈 수 있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내일이면 나갈 거예요”라고 듣지 않자 아버지는 화를 버럭 내면서 “에미 없는 어린 자식들은 누가 돌보란 말이냐? 네 새끼들 네가 돌봐야지. 너는 다른 사람하고 처지가 다르지 않느냐. 네가 탈퇴서를 써도 다른 사람이 다 이해한다. 걱정 말고 써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이에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걱정마세요. 곧 나가요”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에미 없는 어린 자식들”을 들먹일 때 당시 도 교사는 부인과 사별했고 그래서 쓴 시 ‘접시꽃 당신’의 상처가 너무도 아리게 가슴을 저미면서 되살아 왔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애원한 탈퇴각서를 쓰지 않은 탓에 포승줄에 묶인 채 교도소로 넘어가는 차를 타고 경찰서를 돌아 나올 때 담벼락에 이마를 맞대고 울고 계신 어머니를 보고 순간, 가슴이 미워지게 아팠고 아버지는 그날 이후 교도소에 수감된 뒤에는 면회도 오지 않았다.

 

힘겨운 해직의 나날 막노동

 

다음은 2011년 1월1일(한겨레신문) 전교조 창립과 가입한 해직 교사들의 해직 생활을 증언한 것으로 도종환 의원도 함께 겪었던 일이다.

 

살길이 막막해진 해직 교사들은 몰래 노동판에 나가 막일로 생계를 잇거나 조금 여유가 있는 교사들은 부인과 통닭집 등 음식점을 내어 연명했다.

 

새벽에 나와 신문과 우유를 배달한 교사도 있었고 부인이 파출부로 나서 어린 자녀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애쓴 경우가 태반이었을 정도라고 했다.

 

여러 해직 교사가 생각 끝에 ‘참교육 물품’을 만들어 티셔츠나 가방, 양말, 손수건, 공책, 편지지를 팔기도 했으나 크게 남는 것이 없었고 그래도 ‘참교육’을 새긴 것에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주는 행인들이 많아 크게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영광에서 사온 굴비장사를 했는데 학교에 남아 있는 동료교사들이 주문을 많이 해주어서 겉보기엔 제법 남는 것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못했고 이런 사정을 알게된 동료들은 매달 20~30만원 씩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전교조 합법화가 실현되는 날을 기다렸어도 정부의 탄압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기약 없이 세월만 흘렀다.

노태우 정권이 끝나도록 교원노조 교사에겐 봄소식이 없었고 교육민주화의 동토는 풀리지 않을 기미에 더 큰 시련과 인내로 극복할 의지 밖에 다질 것이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 직선 후 집권 3년차

 

1990년은 대통령 직선제가 회복되어 헌정질서가 바로 잡힌 듯 했으며 노태우 대통령의 3년차 집권시기에 접어들면서 교육계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이 와중에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가투시위는 절정에 달했고 진압 경찰의 강제해산 등 연행에 맞서 길바닥에 드러눕는 것으로 저항도 극에 달했다.

 

이때 윤형섭 교총회장은 ‘교사3불론’을 발표해서 문교부는 물론 노태우 대통령의 환심을 샀다.

윤 회장은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장 출신으로 군부의 현역장교와 전역장교 출신들이 행정학 강의에 몰려들었다.

특히 교총회장 취임 후 전교조 교사의 시위에 반대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이 때 ‘교사3불론’으로 매스컴을 탔다.

그가 말한 교사3불론은 첫째, 교사는 장사꾼이 아니다. 둘째, 정치꾼은 더욱 아니다. 셋째, 교사는 길바닥에 드러눕지(시위)않는다고 했다.

 

문교부와 청와대의 환심은 2불보다 3불의 끝에 붙인 ‘길바닥’이었다.

 

이에 주석을 단 윤 회장의 설명은 특유의 달변으로 전교조 반대세력의 체증을 가라앉혔을 정도라고 했다.

드디어는 1990년의 새해가 열리면서 각 부처장관은 청와대 연두보고 준비로 바빠졌다.

 

문교부도 정원식 장관과 장기옥 차관이 바빠졌다.

 

1월이 지나 2월 초에 이르러 노태우 대통령은 “문교부 정원식 장관과의 연두보고는 우면동에 있는 교총회관에서 받겠다”고 했다.

 

전무 후무할 파격이었고 보고회 당일 청와대 식당의 요리사들은 교총회관 식당으로 옮겨가 갈비탕을 끓였다.

 

교육계의 요직이 우면동 교총회관에 집합한 것으로 TV방송은 중계 수준 특집으로 방영했다.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보고 내용은 현안과 비전으로 구분해서 전교조 대책과 의식화 교사 대처 등 제7차 교육과정 개정안 방향을 제시했다.

 

이때 윤형섭 교총회장도 배석자로 자리가 마련되어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확실하게 눈도장을 받았다.

 

Posted by 아빠최고

24년 전 우리교육 부끄럽고 슬픈 자화상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0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승진대상 공무원 전교조 탈퇴에 이용

진술 못하게 출석막고 해임 의결 처리

징계절차 위반 묵과 불법조장 부추겨

- 사립학교 이사장 중 자택과 사업체서 징계위 열어-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전교조 탈퇴협조 인사 반영

 

<전호에서 이음>

이에 놀란 아버지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서울 태릉고등학교에 쫓아와서 딸에게 “아버지가 죽고 사는 것은 너 하기에 달렸다”고 통사정하는 바람에 탈퇴했다.

 

▲서울 난우중학교 김정림 여교사는 국가보훈처에 근무한 김 모 사무관으로 부터 탈퇴권유를 받았을 때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나 며칠 전에 출신고교인 광주대성여고에서 “국가보훈처 직원이 찾아와 신원조사를 하고 갔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 김 사무관에게 “왜 이러시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몰라서 묻느냐?”고 반문하면서 “집안의 친인척 중에 공무원도 있고 국영기업체 직원도 있는 사람이면서 알아서 할 일인데 어쩌자고 전교조는 탈퇴하지 않고 버티느냐”고 책망까지 했다.

 

김 교사는 더 참고 듣기 어려워 “나하고 어떻게 친척이 되는 거냐?”고 다시 물었다.

보훈처에서 왔다고 했던 사무관은 얼른 대답을 못하다가 “선생님 어머니의 친 고모님이 바로 우리 어머니의 외숙모”라면서 “이래도 친척인 줄 모르겠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김 교사는 더욱 알아듣기 어려워 난감한 표정인 채 “그러시다면 사무관님과 저는 피붙이인가요? 살붙이인가요?”하고 거듭 물었다.

 

이에 사무관도 물러서지 않고 “피는 뭐고 살은 뭐냐?”면서 “어쨋뜬 우리는 남이 아니니까 찾아온 내 심정도 이해하라”며 누그러졌다.

 

김 교사는 “그 심정이란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사무관은 “승진(서기관)을 앞두고 친·인척 가운데 전교조 활동 교사가 있으면 탈퇴시키라면서 실적으로 인정해서 승진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하니까 찾아 온 것”이라고 털어놨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김 교사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사무관님과 저는 친척뻘이 아니라 혼인도 할 수 있는 처지인데 승진할 욕심으로 이처럼 경박한대서야 누가 인정하고 존경하겠느냐”고 꾸짖은 뒤 “인상이 좋아서 좋게 봤는데 사무관 직책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실망했다”고 싸늘하게 퍼부었다.

 

그러자 사무관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급히 돌아서 교문밖으로 사라져 갔다.

 

 

사립교사 부당징계 공공연

 

1989년 7월31일 전교조 전북지부에서 종합한 뒤 발표한 사립학교 재단의 부당한 징계조치 사례에 따르면 전교조 가입교사에 대한 잘못된 처벌과 인사처리는 예외적으로 묵과된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해 7월, 김제서중의 가정과 담당 서철심(27·여)교사와 과학담당 한애란(26·여)교사는 출석통지서와 징계의결 요구서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 학교법인의 징계위원회가 1989년 7월25일자로 두 교사를 해임의결로 인사조치해서 도교육청에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두 여교사는 당시의 “사립학교법 제65조에 위반된다”면서 불복하고 법원에 무효확인 청구 소송으로 맞서 승소했다.

 

▲전북의 신동아재단 영생고등학교 미술과 담당 박세원(35·남)교사와 공업담당 이우송(42·남)교사는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89년 7월25일자로 징계에서 해임으로 의결되어 인사조치 한 뒤 도교육청에 보고됐다.

 

이에 두 남교사는 당시의 사립학교법 시행령 제24조 2의 3항에 의해 징계위원회는 교원이 절반이어야 하고 법인의 이사는 1인으로 구성되어야 함에도 동일구내 학교의 교장과 교감이 각 2인씩 4명으로 어긴 것을 들어 법원에 제소한 후 승소했다.

 

▲우석재단의 우석여고 국어과 이완우(34·남)교사는 전교조 가입 활동을 이유로 징계에 회부되었으나 1차 징계회의에서 소명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1989년 7월21일 제2차 징계위원회를 열면서 이 교사가 출석한 것을 막은 채 비공개로 해임의결했다.

 

이날 이 교사에게는 오전 10시까지 우석빌딩 7층에 있는 전북일보 사장실로 출석하라고 통지했으므로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까 전경을 동원해서 저지함으로 출석하지 못했다.

 

징계위원회는 본인 불출석을 이유로 궐석 징계에서 해임의결한 뒤 도교육청에 보고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사립학교법 제65조 1항에 징계 의결전 반드시 본인 진술을 듣도록 규정했음에도 어긴 것이어서 법정으로 옮겨갔다.

 

▲전북의 사립 상은여고 영어과 담당 박중신(44·남)교사는 전교조 가입후 탈퇴종용 및 권고에 불응한 것을 이유로 1989년 7월25일 징계에서 해임의결한 다음 도교육청에 보고되었다.

 

그러나 박 교사의 징계는 출석통지서와 의결요구서를 1회만 통지한 채 해임을 의결한 것으로 당시의 사립학교법 제65조에서 규정한 2회 이상 서면 소환 조항을 어긴 것이다.

 

그랬어도 이를 보고 받은 전북도교육청은 묵과했으며 문교부는 더욱 이같은 사실을 알면서 보고를 접수해서 처리한 것으로 불법조장에 여념이 없었다.

 

 

징계위 회부의 부당성 사례

 

▲서전주여중의 과학담당 이복순(29·여)교사는 전북도민신문 1989년 6월11일자 8면에 ‘교원노조의 당위성’제하의 논단을 기고한 이유로 “교원의 노동행위를 고무 찬양했다”는 혐의를 씌워 부당하게 징계에 회부했다.

 

▲진안여고 국어과 담당 김인봉(36·남)교사는 1989년 6월25일 전교조 전북지부 발행 ‘교직원 노조’소식지를 교무실에서 배포한 혐의로 징계에 회부했다.

그러나 당일은 일요일이었고 출근하지도 않았음이 밝혀졌어도 친전교조성향 이유로 징계에 회부했던 것이다.

 

▲1989년 6월4일 남원에 있는 보절중학교 체육담당 최명우(35·남)교사와 남원중학교 국어과 담당 유정미(30·여)교사는 그날 오전 11시10분부터 50분까지 KBS남원방송에서 방영된 ‘KBS광장’에 출연하여 “전교조는 왜 결성되었나” 주제의 당위성 주장에다 노동행위를 위한 집단행동혐의로 부당하게 징계에 회부되었다.

 

▲전북 이리중학교 국어과 담당 안도현(30·남)교사는 전교조에 가입하고 활동한 이유로 징계에 회부되었으나 장소가 서울이어서 참석하기 어려웠다.

 

이는 징계에 출석하는 것을 막고 진술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이처럼 징게위에 출석하여 진술할경우 목적한대로 ‘해임의결’이 어려워지므로 불출석으로 처리하기 위해 저지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전북에서만 3건이 더 밝혀졌는데 배영종합고등학교는 이사장 집에서 징계위원회를 열면서 대문을 닫아 출석을 막았고, 김제서중학교는 이사장의 사업체인 김제주유소에서 비공개로 징계위원회를 열었으며, 군산제일고등학교도 이사장이 경영하고 있는 서풍제지 사업본부 건물에서 열었다.

 

 

실정법 위반 친북매도 얽어

 

전교조 불법화로 정권의 탄압이 노골화된 6공 노태우정부의 교원정책은 당시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주도한 대로 고발과 구속·폭행도 주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89년 5월 28일 전교조가 창립된 후 8월까지 가입교사 전원 파면과 해임 조치 외에도 구속에 의한 폭력행사가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42명 투옥되었다.

 

Posted by 아빠최고

교사의 혼맥으로 살려낸 우리교육 숨결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9회) -

회유와 탄압 이긴 지성의 고통은 방벽

현장의 젊은 피 끓어 스승자리 지켜

80년대 신군부 독재 맞서 민주화 지켜

- 권력의 무리 총동원 농간에도 굽히지 않았던 투쟁-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1988. 12. 5~ 90. 12. 26 재임>

24년 전 우리 교육의 모습

<전호에서 계속>

 

▲서울 이문초등학교의 정명원 교사는 남편마저 “전교조 활동을 계속하려면 이혼을 각오하라”는 말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5월이지만 밤바람은 싸늘했고 하늘에 별만 총총한 것에 눈물이 솟구쳐 뺨 위에 흘렀다.

결국 밤잠을 설치고 생각한 끝에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 교사는 탈퇴각서를 쓰고 말았다.

 

▲공립과 달리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법인에서 협력하지 않으면 전교조 가입을 막거나 탈퇴가 쉽지 않은 것에 일부 시·도교육청은 “국고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끊기도 했다.

 

이에 대부분의 사립학교 법인들은 “최대한 협력하겠다”며 “징계완화 내지 철회 허용을 재량에 맡겨 주면 그만한 성의를 보이겠으니 재고하라”면서 여유를 요청했다.

 

이유는 유능한 교사를 채용하기 위해 스카웃 등 애쓴 것에 반해 전교조 가입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있는 교육청은 “학교분회 전교조 조합원 수를 다만 몇 명이라도 줄여 달라”는 것으로 양보했다

 

▲1989년 5월에서 6월까지 사이에 서울시내 공립학교에서는 전교조가입교사를 탈퇴시키기 위해 벼라별 일들이 속출했다.

 

관악구 신림본동에 살았던 김원호 초등교사에게 느닷없이 시청의 김 모 운영과장이 찾아왔다.

 

김 과장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고 관악구청의 직원 한 명을 데리고 방문했다.

 

처음 만난 사이라 김 교사가 “누구시냐?”고 묻자 명함을 내밀면서 “선생님과 제가 같은 고향사람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보라며 향우의 불리한 징계처분을 막아 구제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떨어져 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김 교사는 구청에서 안내하고 온 직원에게 “이 분(김과장)과 제가 같은 고향사람인 것을 어떻게 알고 모시고 왔느냐?”고 묻자 “향우회 명부를 보고 알게 된 것 같다”면서 “저도 윗분께서 안내하라는 지시를 해서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가 막힌 김 교사는 시청에서 온 과장에게 “제가 고향 분에게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 오늘 출장명령으로 나왔기 때문에 들어가면(시청에) 복명을 해야 하는데 종친(김교사)께서 탈퇴할 의향만 보여줘도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김 교사는 “의향은 제 마음인데 아직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단정하시면 곤란하다”고 역정을 내자 “그 정도면 제 입장은 곤란을 면한다”고 말해 “마음대로 생각하시고 돌아가 달라”고 했는데 뒷날 교육청에서 “어제 고향분에게 탈퇴의사를 밝혔느냐? 확인해 보는 것”이라며 전화로 물어 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김 교사는 “그렇게도 할 일이 없으면 낮잠이나 자라”면서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 화근으로 징계 받았다.

 

▲같은 때에 서울 구로구 시흥1동에 사는 박 모 교사의 집에도 동장이 찾아와 “상부의 지시로 왔다”면서 “전교조 탈퇴를 권고하라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호소했다.

 

이에 박 교사는 “제가 탈퇴하지 않으면 동장님 목이 날리게 되는 거냐?”고 물은 뒤 “나설 일이 아니니까 그냥 돌아가라”며 타일러 보냈다.

 

▲같은 날 영등포여고의 송 모 교사는 사복경찰관 한 사람이 찾아와서 “마포경찰서 대공계 소속인데 선생님 행적을 조사해 봤더니 과거 학생운동 경력도 없으신 분이 왜 전교조에 가입해서 노조운동을 하시느냐?”고 물었다.

 

이에 송 교사는 “꼬옥 학생운동을 했어야 전교조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묻고 “학생들이 보고 있으니 죄없는 사람 오래 붙들고 이런말 저런말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돌아가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난들 이러고 싶겠느냐”면서 “나도 둘째 남동생이 고등학교 교사”라고 말한 뒤 발길을 돌렸다.

 

▲서울 성북구 장위1동에 살던 박 모 교사의 집에 “종암경찰서 정보과 소속 이 모 경장”이라며 찾아와 “정부에 대한 불만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왔다”면서 “전교조에서 탈퇴하면 이런 일도 없을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했다.

 

▲서울 태릉고교 이계림 교사는 수업을 막 끝내고 교무실에 돌아오자 고교와 대학교 동창인 중앙정보부의 임 모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만나 반갑고 옛 생각이 나서 동창 가운데 맥주홀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의 안부를 묻던 중 “같이 있는 동료(중정직원)인데 인사 나누라”며 동행한 사람을 소개했다.

 

서로 첫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그는 “함께 나가서 차라도 한 잔 나누며 애기하자”고 했다.

이 교사는 “아직 퇴근시간 전이라 교문밖에 나가려면 교감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주저하자 동창께서 “벌써 다 얘기 해뒀으니까 지금 퇴근해도 된다”고 했다.

 

마침 교감이 다가와 “이 선생! 가도 돼요”하면서 허락함으로 세사람은 학교 인근 괜찮은 음식점에 들어가 술잔을 나누었다.

 

이때 동창은 “전교조 까짓 것 탈퇴해버려! 그게 그렇게도 좋은 것이냐”면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게들 사는 거라”고 빈정거렸다.

 

그날은 그냥 가볍게 한 잔씩 나누고 헤어졌으나 뒷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일 집으로 이른 아침과 저녁 늦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왔고 그 때마다 “탈퇴했느냐?”고 확인한 것에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참다 못한 이 교사는 “이런 얘기 그만 하자”고 말하자 “그래도 교사라면 다 들 알아주는 직업인데 왜 그걸 놓치려고 그러느냐”면서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충고했다.

 

이에 “지금 내가 탈퇴하지 않으면 너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거냐?”고 묻자 “남의 직장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며 “넌 구제불능이야! 이젠 나도 모르겠다”고 짜증섞인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뒷날 학교에서 교감이 “서로 형편을 봐주면 든든한 빽이 되는 건데 왜 동창하고 등지고 살려고 그러냐”면서 조언을 서슴지 않았다.

 

같은 학교(태릉고교)의 유용태 교사도 고교 1년 후배인 중정직원 2명이 가끔씩 찾아와 전교조 탈퇴를 종용했으나 이계림 교사와 함께 굽히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 학교의 김현주 여교사는 아버지가 대한전매공사 신탄진담배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사장실에서 부른다기에 들어갔더니 “지금 막 중정분실에서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당신 딸이 서울 태릉

고등학교 교사가 맞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하자 “거 왜 하필이면 딸이 전교조에 가입해서 속을 썩히게 하느냐”면서 “당장 서울에 올라가서 탈퇴시켜버리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듣던 중 처음”이라며 “전교조가 나쁜 것이냐?”고 묻자 “거 참 몰라도 너무 모르네. 빨갱이들이니까 중정분실까지 나서는 것 아닌가. 일 커지기 전에 당장 탈퇴시켜야지 안 그러면 당신과 내가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에 놀란 아버지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서울 태릉고등학교에 쫓아와서 딸에게 “아버지가 죽고 사는 것은 너 하기에 달렸다”고 통사정하는 바람에 탈퇴했다.

 

▲서울 난우중학교 김정림 여교사는 국가보훈처에서 친척인 김 모 사무관이 집으로 찾아와 “전교조에 있지 말고 탈퇴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김 교사는 며칠 전에 출신 고교인 광주 대성여고에서 “국가보훈처 직원이 찾아와 신원조회를 하고 갔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 이 사무관에게 “왜 이러시는 거냐?” 물었다.

 

그러자 “몰라서 묻느냐?”고 반문하면서 “가족 중에 공무원도 있고 국영기업체 직원도 있는 선생님이 알아서 할 일인데 어쩌자고 전교조는 탈퇴하지 않고 버티느냐”고 책망까지 했다.

 

이에 미모의 김 교사는 “사무관인데 생각이 고작 그 수준이냐”면서 “아닌것 같아 실망했다”고 안타까워하자 말없이 돌아섰다.<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교육민주화 초석이 된 교사운동의 수난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8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포기강요 속출

문교부 전국 일일보고 집계 실적 홍보

교육청 학교장 경찰 정보형사 총동원

- 학교분회 결성 때 “나좀 살려달라”며 누워버린 교장-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덮고 갈 수 없는 격동기 상처

 

<전호에서 계속>

▲1989년 7월20일 경북 울산의 언양초등학교 정찬모 교사는 전교조 지회장이 되면서 담당 정보형사가 집에 찾아와 가족이 보는 앞에서 조사를 벌이고 직위해제 상태의 정 교사를 강제 연행, 감금시킨 후 “탈퇴각서만 써주면 풀어주고 징계도 면하게 해줄테니 남 사정도 좀 봐달라”고 통사정했다.

 

이에 정 교사는 “전교조 합법화가 법으로 제정될 때까지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써주면 되겠느냐?”고 묻자 “그렇게 하라”고 해서 탈퇴각서를 써주니까 뒷날 신문에 “전교조 가입교사 대부분은 법 제정 때까지 활동을 유보할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고 있다”면서 “법 지킨 교사들의 용단”제하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정 교사의 동료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성토하고 “배신행위”로 내몰자 다시 평조합원으로 가입해서 “백의종군하는 심정”이라며 “합법성 쟁취의 그날까지 견결하며 싸워나가겠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때 전국의 전교조 시·군지회장 탈퇴종용과 회유대책의 한 방법으로 채택된 근거는 바로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충남 홍성에서는 결성고교와 광동고교, 학계초등학교, 황천초등학교, 홍남초등학교에서 교육청 직원과 당해 학교장 등이 전교조 가입교사의 집에 떼로 몰려가 부모와 가족이 보는 앞에서 “탈퇴하지 않으면 징계에 회부해서 파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날(1989.7.20) 서울에서도 숭인·중화초등학교와 신남·대림여중, 신도림중학교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탈퇴를 강요한 협박 사례가 있었으며 전남은 교육청 직원이 지시받은 사항을 폭로하면서 “전국에 동일한 숫법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으나 이런 일로 공무원이 동원되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호소한 일이 벌어졌다.

 

또 전교조 교사의 집에 몰려가지 않고 전화로 애원하면서 “목구멍이 포도청으로 시키니까 하긴 하지만 차마 집으로 몰려갈 수 없어서 전화를 한 것이니까 우리가 왔다 간 것으로 해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서울의 망우·연동·면일·군자초등학교 등 몇 곳은 전교조 학교분회 결성일에 학교장이 각 교사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부모님께서 직접 학교에 나오셔서 데리고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전화를 받은 부모들은 “수업하고 있을 텐데 잘못도 없이 학생들 보는 앞에서 그럴 수 있겠느냐?”고 난색을 표하면 “수업 중이라도 관계없으니 집이든지 멀리든지 데리고만 가라”고 대답한 것에 “그 일이 그렇게도 나쁜 것이냐?”고 되묻고 “죄가 되면 경찰에 연락해서 잡아가도 될 일을 왜 집으로 전화질이냐”고 꾸짖으며 항변했다.

 

▲특히 전교조의 산실로 찍힌 전남은 광주 제일고교와 체육고교, 화정·서석초등학교에서 학교분회 결성일이 되자 참가 교사 중 일부를 강제로 납치하여 격리시키고 결성장에 몰려와 플랜카드를 찢고 가슴에 달고 있는 리본을 억지로 떼어내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완도에서도 군지회 창립 결성식을 막기 위해 섬마을학교에서 참가하려고 배를 타고 올 교사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여객선 기항을 막았으나 주민들의 항의가 거세 교사만 타지 못하게 했다.

 

이때 지역의 경찰지서에서 협조하여 불심검문 형식으로 저지토록 했으나 듣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유지들에게 알려 “어찌해야 좋겠느냐?”고 묻는 등 자문을 구했으나 “말이 안 된다”고 핀잔을 준 것에 유야무야했다.

같은 날 우산초등학교의 교장은 학교분회 결성장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나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다 듣지 않자 교실바닥에 누워버리는 촌극이 벌어졌다.

 

▲강원도 정선여고의 이상근 교사는 89년 7월15일 교장이 아버지에게 “전교조 탈퇴서를 쓰지 않으면 파면·고발·구속되게 할 것”이라는 전화로 겁을 준 것에 놀라 달려온 부친과 누나의 애원에 못 이겨 탈퇴각서를 써 주었다.

 

그러나 이상근 교사는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교장실에 들어가 “차라리 사직서로 바꿔 쓸 테니 탈퇴각서를 돌려달라”고 했다.

 

이에 교장은 “이미 도교육청에 보고 된 것을 어떻게 바꾸겠느냐”면서 “나는 더 괴롭고 밤잠이 오지 않는다. 이 고비를 우리 서로 참고 견디면서 의지해 극복하자”고 위로했다.

 

그렇지만 한 번 교직을 떠날 결심이 굳어진 이 교사는 다시 사직서를 내고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앞으로 너희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민주화된 나라에서 자랑스럽게 성공하기 바란다”고 당부한 뒤 교문을 나섰다.

 

▲같은 해(89년) 7월20일 경기도 하남시 교육장은 전교조에 가입한 동부여중 홍명숙 교사에게 “부부가 함께 전교조 활동해서 얻어질 게 뭐가 있느냐”면서 남편인 박동건 교사를 탈퇴시키면 그 공로로 홍 교사만이라도 시지역(하남시) 근무는 보장하겠다“고 회유했다.

 

이에 홍 교사는 “남의 부부일에 까지 간섭할 권한이라도 있느냐?”고 항의하면서 거부하자 교육장은 “좋은 말로 타이를 때 듣지 않으면 경기도의 가평군 접적지역에 있는 산골중학교로 쫓아 보내겠다”고 위협, 임신 8개월인 홍 교사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이에 앞선 89년 5월17일 교원노조 창립 결성이 눈앞에 다가오자 서울시교육청의 본청과 지역교육청 장학사가 총동원되어 휴일을 이용한 가정방문 활동으로 회유대책을 강행했다.

 

이날 이문초등학교 정명원 여교사는 교육청의 김문범 장학사와 이광희 교장이 집으로 찾아와 “전교조 가입을 지금이라도 그만 두면 지난 일들은 일체 불문에 붙이겠다”고 탈퇴를 종용했다.

 

그러자 정 교사는 “오늘 같은 날은 두 분 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휴일을 보내지 않고 왜 이렇게 헛수고를 하시느냐?”고 응하지 않은 것에 말없이 돌아가더니 잠시 후 “교육청으로 나오라”고 전화로 연락이 왔다.

 

그랬어도 정 교사가 응하지 않고 교육청에 나오지 않는 것에 공직자인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의식화 교사로 전교조 활동이 지나쳐 가족이 나서지 않으면 구제할 길이 없다”고 일러 바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게 선동했다.

 

이와 같이 목적한대로 화가 난 시아버지는 며느리인 정명원 교사에게 “긴 말 할 것 없이 당장 탈퇴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정 교사는 “아버님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일이므로 맡겨주세요”라고 불응하자 노발대발한 시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너만 공직자냐”면서 “집안에 화가 미치는 것에 용서할 수 없고 빨갱이 활동한 며느리를 그냥 둘 수 없다”고 단호했다.

 

정명원 교사는 그날 밤 남편과 의논했더니 “아버지 뜻에 따르지 않으면 당신만 불효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불효자가 되는 것이니 당신 태도에 따라 우리가 갈라서는 일(이혼)까지 생각하라”며 냉엄했다.

 

Posted by 아빠최고

24년 전의 全敎組 對策 다시 보면 이렇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6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신규 조합원 시위가담 교사 계속 늘고

발붙일 수 없게 존속막을 방법 찾아

문교부 교육청 학교장은 역부족 한계

- 당시 장관은 정부 불허방침에 일손 놓고 이에 몰두-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문교부장관 징계 요령 시달

 

나. 징계 처리 절차

<전호에서 계속> 징계에 응하도록 출석 통지서를 보낼 때는 두 차례에 걸쳐 우편으로 보내지 말고 관계 직원이 지참하여 찾아가 전달토록 함으로써 징계 처리에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할 것.

 

단, 수령 거부 후 소청 제기 등에 대비하여 교직원 2명 입회 등은 교육감이 판단, 처리하기 바람.

특히 징계의결요구서 작성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물증이 될 수 있는 사진(예:농성장면) 등의 증빙서류를 최대한 활용하여 간략하게 작성하되 물증확보에 관계 기관과의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고 관계 서류 작성 등에 필요한 인원의 증가 배치 등 조치를 적극 강구할 것.

 

다. 징계 처리 일정

징계위원회 회부 일정은 주동자의 경우 89년 7월10일까지 회부해서 7월25일까지 15일 안에 의결하고 단순 가담자는 89년 7월15일까지 징계위원회에 회부해서 8월5일까지 20일 안에 징계 의결을 완료할 것.

 

라. 사립학교 교사

전교조에 가입한 사립학교의 교사 등은 국·공립학교 교원에 준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행정지도를 강화할 것.<이상 끝>

이렇게 해서 1989년 8월 말까지 집계된 전국의 전교조 가입 교사 징계 현황은 총 1천711명으로 파면 156명, 해임 925명, 직권면직 380명, 직위해제 250명이었다.

 

다음은 문교부 지시에 따라 시·도교육감이 이행한 것으로 충북도교육청의 ‘교직원 노조관련 교사 지도 대책’ 원문이다.

 

1. 방침

가. 교직원노조 관련 교사 전원 탈퇴해산 유도.

나. 불응교사 전원 징계 해임.

 

2. 추진 방법

가. 교육감 서한을 관련자에게 3차 발송, 탈퇴유도.

나. 학교장 책임하에 관련자 설득, 탈퇴유도.

다. 담당 부서별 면담 설득.

라, 관련교사의 성향을 분석하여 강경, 적극 가담자부터 징계.

 

3. 추진 일정

 

▲1단계 징계의결 : 89년 7월1일 주도자와 도지부장급 ▲초·중·고등학교 교장회의 교육감 서한(1차)발송 : 89년 7월15일 오후 2시 정부방침 천명 ▲직위해제자 징계의결 신청서류 제출 : 89년 7월5일 ▲교육감 교육청 부서 담당자 협의회 : 89년 7월6일 오후 2시 시·군지역교육청 인사담당자, 도교육청의 각 과단위 담당자 참석 ▲학교장 설득 회유 : 89년7월6일부터 20일까지 15일간 실시 ▲ 부서별 설득 면담 및 성향진단 : 89년 7월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노조탈퇴 유도 ▲2단계 직위해제자 징계의결 요구 : 89년 7월8일 ▲직위해제자 징계위원회 출석 통지서 교부 : 89년 7월10일 ▲탈퇴권유 공문(2차) 발송 : 89년 7월10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탈퇴서 요구 ▲징계대상자(탈퇴 불응교사 전원) 선정 및 징계의결 요구 신청서 작성 완료(제출) : 89년 7월15일 ▲2단계 직위해제자 1차 징계의결 및 최종 설득 : 89년 7월18일 1차 징계출석 불응시 ▲2단계 직위해제자 최종 설득 : 89년 7월22일 2차 출석 통지서 교부시 ▲2단계 직위해제자 2차 징계의결 : 89년 7월24일 처분일자는 7월30일로 ▲탈퇴권유 최후 통첩(3차) : 89년 7월26일로 7월13일까지 탈퇴서 요구자 ▲3단계 1차 징계위원회 개최 : 89년 8월1일로 7월23일 출석통지서 교부자 ▲3단계 징계위원회 개최 : 89년 8월8일로 8월2일 출석통지서 교부자 ▲3단계 징계처분 : 89년 8월10일. 적용일자 8월15일.

 

다음은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1989년 7월31일 긴급소집한 시·도교육감 대책회의 때 시달한 회의서류 원문이다.

 

1. 교원노조 결성상황

 

▲결성추세 : 19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조결성대회가 있은 후 5월30일 강원도 홍천군내 명덕국교 분회 결성을 시발로 6월15일까지 학교분회결성이 확산되어 불과 15일 동안에 4001명 가입했다.

 

이 가운데 6월10일부터 하루 평균 26개 분회를 결성했고 가입 교사는 506명으로 에상을 뛰어 넘었다.

 

그러나 6월16일 이후 결성 및 가입이 둔화되어 6월 30일까지 15일간은 1일 평균 11개 분회 결성으로 174명 가입했다. 드디어는 6월28일부터 탈퇴자가 늘기 시작하여 65명에 이르고 이는 동일기간 가입자 56명을 능가했다.

 

특히 6월30일 강경조치에 신규가입이 둔화되고 탈퇴자가 계속 늘고 있으며 7월1일부터 17일까지는 1일 평균 3개 분회결성으로 24명 가입에 불과하고 7월18일 이후 분회결성은 12일간 총3개 분회 29명 가입한 것으로 저조하다.

 

89년 7월29일 현재 15개 시·도지부와 96개 시·군지부 및 325개 학교분회가 잔유해서 유지되고 있으나 그동안 탈퇴한 교사는 7,946명으로 67.3%이고 파면 117명, 해임 140명, 미 탈퇴자 3,578명이다.

 

 

▲분석결과 : 성향분석 대상은 89년 6월23일 현재 총 5,682명으로 직위별로는 평교사 5,307명(93.4%) 20세~35세 4,456명(78.3%) 5년 경력 미만 교사 2,857명(50,3%)이다.

 

활동을 분석한 결과 초기 시·도지부 결성시 학생(공주사대·전남대·경상대·경북대) 등과 연계해서 교원노조교사 징계에 반발한 대학의 학생 소요가 발생했고 대학교수를 교원노조에 가입 유도한 것으로 89년 7월28일 현재 430명 가입으로 방지가 시급하다. 또한 교수의 가입으로 합법성 쟁취를 위한 집단행동이 7월26일부터 감행되고 있으며 징계방해 지연작전과 징계위원회장소 점거, 상당액의 활동자금이 신문광고(7회)와 5월28일 창립대회·6월25일 대의원회의 등 협찬을 통해 확보되었다.

 

 

2. 향후 전망

 

가, 결성과 탈퇴 : 새로운 학교분회 결성 및 신규가입이 둔화되고 은익 되었던 교원노조가입교사 상당수가 노출되고 있으며 분회 해산 및 가입자 탈퇴가 계속 증가할 것이다.

 

나. 교원노조활동(문제점) : 노조합법화 쟁취 및 확산은 재야 세력과 학부모 지지 성원을 위해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단식농성 강행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동조를 유도한다.

 

이는 일부 동조학부모들을 조직화하여 지원활동을 계속하고 교원노조지지 사회단체와 공동으로 공청회 등 대국민 홍보활동을 전개할 것이다.

 

여름방학 중 자체연수집회를 통한 조직 강화 노력이 예상되고 징계조치 지연을 위한 학생선동 및 집단행동으로 징계위원회 소집을 저지하면서 징계위원회에 대한 기피 신청과 징계위에 출석해서 장시간 진술 등 진행을 방해할 것이다.

특히 강경징계에 대한 비난 여론조성과 유도로 징계절차를 8월말 개학 후까지 연장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탈퇴 교사에 대한 회유와 압력으로 양심선언 미명하에 번의를 획책하고 정규 연수활동 방해 농성(연수내용 강사 등)과 2학기 개학 후 교내 농성, 학생 선동으로 수업 결손을 초래할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임명직 교육감 전교조 부수기 충성경쟁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5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가입교사 탈퇴 실적에 임기보장 달려

공사립 모두 중징계 파면 해임 겁줘

교육장 교장도 덩달아 추종 자리보전

- 탈퇴강요 항의 여교사 아버지 딸 구타에 분통 자살-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탈퇴 종용 징계 해직 병행

 

<전호에서 계속>

이에 앞서 문교부는 89년 5월14일 ‘노조결성 주도자 형사처벌과 함께 관련자 100여 명 파면·해임방침’을 발표한 바 있고 5월17일에도 적극 가담교사 60여 명 징계 방침과 5월22일엔 처벌 대상자 54명(파면·형사고발 37, 면직 17, 구속예정 3~4)을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5월25일 국·공립교사 37명을 직위해제한 것으로 결성대회에 사전 조치했다.

 

이어서 결성대회(5월28일) 후에도 6월21일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김상준)은 숭신초등학교 이규삼 교사 등 2명을 파면했다.

 

다음 날(6월22일) 문교부는 “단위학교의 분회장급은 중징계하고 조합원 교사는 모두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6월24일엔 광주시와 전남도교육청에서 “주도교사 121명을 징계 대상자로 확정, 중징계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전국 교육감은 임명제였다.

 

6월30일 문교부는 전국 지역교육청의 교육장·학무과장 연석회의를 열고 “전교조 참여 교사는 모두 8월1일까지 주동자는 파면·해임·형사고발하고 단순가담자는 감봉으로 처분 하되 탈퇴하면 불문처리하라”고 지시했다.

 

7월4일은 서울시교육청이 “전교조 가입 교사는 여름방학 전에 파면·해임하고 이를 위해 7월20일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발표했다.

 

문교부는 7월17일 “중징계 대상은 4천900명(공립 1500여 명, 사립 3천400여 명)”이라고 밝히면서 “결성 초기에는 전교조 집행부의 주도급 교사에 대해 사법처리와 함께 파면·해임토록 했으나 확산을 막을 수 없어 각급학교의 분회를 대상으로 중징계해서 조직의 뿌리를 뽑겠다”고 강경했다.

 

이와 같이 전교조 가담 교사 처벌은 1천527명 가운데 1989년 9월8일까지 1천407명으로 공립 782(파면 136, 해임 646)명, 사립 625(파면 17, 해임 231)명이었다.

 

이를 시·도교육청별로 보면 ▲서울 505(공립 398, 사립 107)명 ▲부산 67(공35, 사32)명 ▲대구 53(공9, 사44)명 ▲인천 39(공14, 사25)명 ▲광주 142(공11, 사131)명 ▲대전 9(공1, 사8)명 ▲경기 81(공34, 사47)명 ▲강원 36(공35, 사1)명 ▲충북 23(공22, 사1)명 ▲충남 53(공47, 사6)명 ▲전북 66(공35, 사31)명 ▲전남 164(공57, 사107)명 ▲경북 78(공38, 사60)명 ▲경남 60(공36, 사24)명 ▲제주 11(공10, 사1)명이다.

 

같은 날(89.9.8)까지 기간 중 직위해제는 58명으로 서울 40명, 강원·충북 각 1명씩, 전북 2명, 전남 13명, 제주 1명이었다.

 

또 일부 학부모를 동원해서 전교조 반대시위를 벌이도록 하고 친관변 언론으로 하여금 이를 부풀려 해설까지 곁들이는 등 기회주의자를 동원, 아세곡필로 왜곡시키는 투고 와 파괴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장인 장모 시부모 등에게 접근하여 “형사처벌과 파면 해임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겁을 주면서 “빨갱이 집단”이라고 매도하는 등 아내와 남편을 시켜 “탈퇴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하라는 것도 모자라 부모에게 “자살극을 연출하라”고 사주한 뒤 “농약병을 들고 탈퇴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교조 탈퇴공작 사례 폭로

 

당시 문교부(장학실)와 시·도교육청(학무국)은 대책회의 때마다 지역교육청의 교육장이나 관내 학교장 가운데 전교조 가입교사의 탈퇴공작 사례 가운데 ‘우수하다’고 분류한 것을 모아서 발표시키는 등 ‘예시자료’에 담아 배포했다.

 

특히 부산시교육청에서 문교부에 보고해서 우수사례로 채택한 것은 전교조 조합원 교사 몰래 본인 도장을 훔쳐 탈퇴각서를 작성한 경우 등 가족에게 대리각서를 받은 것이 포함되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교부 장학실의 대책반(상황실)에 보고된 이들 사례를 보면 전교조가입 교사가 수업에 들어가고 자리에 없는 기회를 이용해서 설합에 넣어둔 목도장을 본인 모르게 ‘탈퇴각서’에 날인해서 교육청에 보고하면 교육청은 이를 모아 출입기자 중 친관변 측으로 하여금 특종한 것처럼 보도시키는 와해공작에 이용했다.

 

이로 인해 전교조의 시·도지부와 학교분회는 당사자에게 추궁하면서 배신자로 몰리게 한 것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가 되는 등 어이없이 당한 교사는 너무도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말문이 막히게 되고 이에 예민해져 날카로워진 동료교사마저 “너 배신했구나”하고 몰아 부쳐 관제탈퇴가 성공시킨 전략에서 주효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구청과 동사무소 직원을 동원해서 통·반장을 앞세우고 전교조 가입 교사의 가족에게 탈퇴를 종용하도록 하는 등 대리각서까지 받았다.

 

이 각서는 교육청에서 수합한 뒤 상부에 실적으로 보고되었다.

 

이와 같이 가정파괴도 서슴지 않았던 반인륜적 탈퇴 강요와 공작은 수많은 교사들을 고뇌와 번민의 수렁으로 밀어 넣고 괴롭혔다.

 

교사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번민하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것을 볼 수 있었다.

 

1989년 6월26일 모 광역시의 D초등학교 이성림 여교사의 아버지(이상효)는 딸이 교장에게 탈퇴강요에 반항했다고 구타당한 것으로 모자라 좌경용공으로 매도된 것에 분을 못참고 자살로 항의했다.

 

문교부는 교육현장의 실상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시·도교육청에서 보고된 전교조 가입교사의 탈퇴각서 제출을 종합하고 집계한 다음 89년 8월2일 현재 “8천600여 명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당일 석간신문과 방송을 통해 즉각 보도되었으며 이에 맞선 전교조 가입교사들은 탈퇴종용에 굴복하지 않는 대신 ‘결단서약서’를 모아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맞불을 놓고 대응했을 정도로 첨예하게 맞섰다.

 

 

문교부장관 징계 지시 원문

 

당시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임명직이었던 시·도교육감에게 시달했던 ‘교원노조 관련 초·중등교원 징계처리(교직01110-490)’지시 공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1, 89년 2학기 수업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하기 위하여 교원노조 관련 교원에 대한 징계처리와 이에 따른 교사 신규 임용 및 전보조치가 (89년) 8월 중순 이전에 완료될 수 있도록 다음 사항을 통보하니 업무추진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 징계 처리 방침

징계위에 회부하기 전에 탈퇴한 교사는 교육감이 경고처분하고 징계위 회부 이후에 탈퇴한 교사는 징계위원회를 개최하여 불문(주의·경고)처리 후 인사기록카드에 기재할 것.(의무사항)

나. 징계 처리 절차

조속한 징계 처리를 위하여 징계 혐의자에 대한 출석 통지는 2회까지만 하되 우편으로 보내지 말고…

Posted by 아빠최고

국회 추궁에 “의식화 탄압 아니다” 맞서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92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원노조 결성 임박 차단위해 총동원

보안법 혐의 교사 연행 구속 잇따라

서울지역 사대학생협 지지 성원 결의

-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개성 창의 인재양성” 선언-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1988. 12. 5~ 90. 12. 26 재임>

교원노조 결성 찬·반 막판

 

<전호에서 계속>

사회여론의 일각에서 전교협에 대한 긍정적 반응과 전교조 결성을 성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재야세력과 정치권의 야당은 이를 옹호하고 성원하는데 앞을 다퉜다.

 

이에 상대적으로 정부·여당 등 친관변세력은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정권의 앞날을 우려하는 수준으로 저지에 총력을 경주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사태가 역전되는 것에 당황한 집권세력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대처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국회에서도 전년(1988.10.5)도 국정감사 때 문교부의 ‘교원정보부’를 적발, 파헤친 것을 상기하면서 몰아부쳤다.

 

이에 정원식 문교부장관은 1989년 5월16일 열린 임시국회 문공위에 출석하여 “의식화 교사 명단은 파악한 적 없고 공안 당국의 31명 내사 보도에도 확인된 것이 없다”면서 “탄압이 아니다”라고 맞섰다.

 

이는 당시의 국회 문공위원회 분위기와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5월 초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김상준)이 배포하면서 물의를 빚었던 ‘의식화 교육 폭로’도 제보했다는 교사의 이름과 소속 학교를 알 수 없어 조작의혹으로 뒤끝이 안좋았다.

 

이렇듯 전교조 결성이 임박하면서 다급해진 공안당국은 의식화 입증을 위해 감시했던 교사를 연행 조사하고 구속하기 시작했다.

 

5월22일 서울 인덕공고 조태운 교사와 3일 후(25일) 충북 제원고교 강성호 교사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연행되면서 구속되었다.

 

조 교사는 1년 전의 혐의로, 강 교사는 “북침설을 교육한 혐의”라고 발표했다.

 

경북 영주에서도 동산여중의 이수찬 교사가 “북한을 찬양하는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의식화 매도 사례는 후에 법원 판결에서 증거부족으로 풀려나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그해(1989) 5월11일엔 전국교원노조추진위원회의 교과모임연합과 서울지역 사범대학생회협의회가 ‘민주교육 탄압 저지를 위한 결의문’을 공동으로 발표하면서 참여했다.

 

이날 결의문은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면서 “우리의 민주교육은 독재권력으로 상실되어 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과 개성과 창의성을 지닌 창조적 인간형으로 민족의 일꾼을 키워내어 민주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맡은 바 임무”라고 밝혔다.

 

이어서 “교사들은 지금까지 최소한의 시민적 권리와 연구활동의 자유마저 빼앗겨 왔으며 학생들은 극한적인 입시 경쟁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화된 채 비인간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규탄했다.

 

또 “교사들은 반 교육적 비인간적 교육 현실을 바로잡고 참교육과 인간화 교육을 구현하기 위해 민족·민주 교육으로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고 호소했다.

 

아울러 “교단에 선 교사와 이에 뒤를 이을 사범대학생들은 스승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결의문으로 밝힌다”면서 다음과 같이 7개항을 선언했다.

 

첫째, 민족·민주 교육에 대한 모략과 탄압을 즉시 중단하라.

 

둘째, 교육 현장의 자발적인 연구 활동과 연구결과를 왜곡하고 방해하는 반 교육적인 작태를 즉각 철회하라.

 

셋째, 국정교과서를 줄이고 검인정교과서를 늘려 발행케 하여 교육 내용의 자주성을 제도적으로 민주국가 답게 보장하라.

 

넷째, 민정당원인 대통령(노태우)과 행정관료인 문교부장관(정원식)에게 교육의 모든 권한을 백지 위임한 교육악법을 즉각 개정하라.

 

다섯째, 교사 블랙리스트와 교원정보부를 즉각 철폐하고 학교장의 교사 감시·보고를 강요하는 탄압 음모를 즉각 중지하라.

 

여섯째, 사범대학 졸업생을 선별 임용하고 민주교사를 학교에서 축출하려는 교육법 개악 음모를 즉각 중지하라.

 

입곱째,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확실하게 보장받는 교직원노조를 결성하여 민족·민주 인간화 교육 실현하자 등 이었다.

 

그로부터 7일 후인 5월18일 전남 나주시교육청에서 도교육청의 이첩(중등 25110-980. 89. 5. 17)을 받아 관내 초·중·고교에 ‘학생에 대한 편향된 의식화 교육 예방에 철저를 기하라’고 10개항을 시달한 것이 폭로되었다.

 

당시의 10개항은 다음과 같다.

 

1, 고교생 의식화 예방 지도 철저로 학교 교육의 비판, 좌경 의식화 기도 등 가치관 혼란을 조장하는 사례가 발생할 우려에 대비해서 예방 지도를 강화하도록 촉구한 바 있으며

 

2.교과서 왜곡 비판 및 임의교재 제작사용 단속 지도로 교육과정 및 교과서 왜곡, 의식화 교육 내용을 담은 자료를 임의 제작 보급하여 미성숙한 학생의 가치관 및 인격 형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단속 지도를 지시한 바 있었고

 

3, 학무 01100-784(89.5.11)호 교원노동조합 결성 예방지도로 국·공·사립학교를 불문하고 명백한 실정법 위반 행위이므로 교원노조의 불법·부당성 계도 및 집회참여를 방지하고 참여 교원에 대한 주의 촉구, 경고·징계 인사조치 등을 지시한 바 있으며

 

4, 1989년 5월13일(토) 초·중·고 교장 회의에서 ‘문교부장관 담화문 송부’로 교원노조 움직임과 관련하여 정부의 확고한 방침을 밝힌 바 있었으므로 이와 관련하여

 

5, 각 급 학교에서는 학생에 대한 편향된 의식화교육 예방을 위하여 자체 계획을 수립,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를 다시 강조하니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주시고

 

6, 특히 학부모들에게 ‘내 자녀는 내가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하는 한편, 학부모의 공조체제를 강화하고 편향된 의식화 교육 차단에 대처해야 할 것으로 사료되어 별첨(예시)자료를 송부하는 등 참조해서 지역과 학교실정에 맞는 공조체제를 수립, 학생에 대한 편향된 교육 예방에 철저를 기해 주시기 바라며

 

7, 의식화 교육 예방을 위해 각급학교에서 추진 중인 대책(학부모와 공조체제 구축사항 포함)과 실적(89.3.1 이후)을 89년 5월20일까지 교육청(나주시)에 필착토록 보고하여 주시기 바라며

 

8, 학교에서는 육성회, 어머니회, 명예교사, 상담 자원 봉사자 등으로 연합 조직하고 공조체제를 구축하여 의식화 예방 지도를 하시기 바라며

 

9, 위와 같은 상황 발생 보고 및 결과 처리 보고를 다음 양식에 의거 처리, 기관별로 분류해서 교육청에 보고하기 바라며

 

10, 89년 5월20일 이후 이와 관련한 보고는 다음 체계에 의하여 사안 발생 즉시 주관과로 보고하여 주시기 바람. 이때 보고할 내용은 ① 교원노동조합 가입 및 활동 ② 편향된 의식화 교육 ③ 의식화된 게시물 제작 및 부착 ④ 의식화된 교육과정 내용 및 지도 사례 ⑤ 의식화를 위한 각종 집회 활동 및 기타였다.

 

이 밖에도 첨부할 사항은 1. 학생에 대한 편향된 의식화 예방을 위한 학부모와의 공조체제 구축 방안(자료) 1부 2. 사안보고 양식 1부, 끝(인) 나주시교육장으로 되어 있었다.

 

 

문교장관 예방 지시 공문

 

당시 정원식 문교부장관은 교원노조 결성이 눈앞에 닥친 것에 마지막(89.5.2 교직0100-304-720-3318)으로 노조결성을 예방할 지도에 최선을 다해주도록 시·도교육감에게 공문으로 시달했다.

이는 행정명령이었고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