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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글

참교육 어찌 두고 가셨습니까


참교육 어찌 두고 가셨습니까
참스승 윤영규 선생님을 기리며
김병옥 <새교육신문> 편집국장
세속화 경계 가르침

40여 년간 교육언론에 종사하면서 항상 그릇이 크다고 여긴 인물 두 사람을 꼽고 있다. 첫 스승은 고 성내운 선생님이며, 다음으로 윤영규 선생님을 마음에 두고 있다.

두 분 모두 비길 데 없이 큰 스승이다. 또한 대표적인 아버지상으로 두 분을 내세울 때가 많다. 어려운 일, 큰 일을 만날 때마다 이 두 분 스승과 나눈 얘기들을 되새기며 실마리를 푼다.

윤 선생님이 주신 감명깊은 충고는 “사심만 없으면 뭐든 훤하게 보이게 마련”이라며 만사에 사심을 경계하라고 일러주신 가르침이다.

같 은 나이 또래이면서도 윤 선생님이 커 보이고 의젓한 모습에 압도당하는 까닭이 이에 있다. 선생님은 세속화를 경계하며 주위를 되돌아보는 교직자상 그대로다. 자기 관리에 한치도 빈틈없지만 사심에서 먼 탓으로 가족들의 고생이 그 몇 배로 큰 것을 알게 됐다.

선생님이 수배 중일 때는 물론, 참교육하자고 앞장 선 것도 죄가 되어 옥고를 치를 때 만난 사모님의 고초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게 가슴이 아팠다. 그토록 어려운 두 분을 항상 빈손으로 만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어 느 날은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사모님께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냐?”고 물으니까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전교조 선생님들 행사가 있는데, 늦지 않게 가려고 달려왔다”고 대답했다. “식사는 하셨느냐?”고 걱정했더니 “뱃창시도 알아서 이해하겠지요”라고 웃어 넘겼다. 마침 쥐고 있던 전철권 차표 한 장을 손에 쥐어 드렸더니 “이걸 날 주면 선생님은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웃었다.

그 뒤 오병문 교육부 장관 때 잠깐 차 한잔 나누면서 화제 중에 윤 선생님 얘기가 튀어나왔다. “장관님이 좀 도와주세요”라고 수배 중인 윤 선생님의 처지를 걱정했더니 오 장관은 “사실은 윤 선생님이 우리(정부)를 수배한 셈이지. 그 양반은 사심 없이 참교육을 하자고 외치다 당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막는 결과로 수배했으니 세월이 지나면 역사는 누구를 수배자로 정의하겠어. 잘못됐어도 아주 크게 잘못된 것이지….”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 윤 선생님은 수배가 해제됐다. 이 때 윤 선생님은 소감을 묻자 “몸만 가두고 마음은 가두지 못했으니 내 양심은 그대로 풀려 있었다”면서 눈을 감는 시각까지 참교육 앞장이 자신의 몫이라고 단호했다.

언 제나 이렇게 진실된 모습에서 사람의 마음을 끌었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윤 선생님의 매력이다. 어느 서예가가 윤 선생님의 꿋꿋함을 일러 ‘진수무향(眞水無香)’이라고 표현했다. 참 샘물에 향기가 따로 섞일 수 없음이며 물 냄새가 따로 나야할 이유도 없다.

몰래 준 우산 한 개

윤 선생님이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특별면회로 만난 적이 있다. 그 날 김영진 전 국회의원이 가는 기회에 덤으로 따라 붙듯 함께 나섰다. 윤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요즘 문교부(현 교육부) 사람들은 좀 달라지던가요?”
“개꼬리 10년에 여우꼬리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마음은 편치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안양교도소에 면회차 갖다 온 며칠 뒤에 직장에서 내게 영향을 끼쳐 왔다. 그 때 나는 한국교총의 전신인 대한교육연합회 기관지 <새한신문>(현 한국교육신문)에서 취재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전 교조와 정면 반대 위치에 있는 교총 사람이 전교조 위원장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서 특별면회를 하고 왔으니까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채널을 통해 모종의 싸인이 있었던 것은 불문가지다. ‘대화내용을 적어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거부했다.

6공 말기에 윤 선생님은 또 지명수배로 어딘가에 꽁꽁 숨었다. 그것이 나에게도 현실로 찾아왔다. 하루는 일요일인데 점퍼 차림의 세 사람이 찾아왔다.

“누군데 어디서 왔느냐?”며 신분을 확인하려 드니까 ○○경찰서 정보과 형사인데 윤영규를 잡으러 왔으니 조용히 데리고 가게 협조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런데 일은 정작 며칠 뒤에 벌어졌다.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더니 “접니다. 좀 만났으면 해서요….” 영낙 없이 윤 선생님이었다.

만나자는 곳까지 가서 윤 선생님이 일러 준대로 접선은 성공했고 초췌한 모습의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손을 꽉 잡았다.

윤 선생님의 첫 물음은 “요즘 공기”였다. “삼엄하다”고 말해 주고 동지보다 매섭게 추운, 대한이 지나면 곧 입춘이 빨라지니까 해금이 올 것이라고 위로했다.

헤 어지면서 나는 가지고 있던 우산을 접은 채로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윤 선생님 필요할 때 가리개가 되어 주고 비를 막아 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먹을 것이라도 좀 싸들고 가고 싶었지만 워낙 형사대의 급습에 놀랐던 가슴이라 행여 미행에 걸려 들까 싶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복직보다 살신 봉사

문민정부 초기에 거론되던 전교조 해직교사의 복직 문제가 지지 부진으로 늑장이었다. 이 때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복직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머리를 꺼내자 “되긴 될거요. 그런데 워낙 게으른 정부라 해가 중천에 떠야 늦잠에서 깨어날 걸”하고 점쳤다.

현장 교육 개선과 교육개혁의 길을 트는 일에서 전교조 교사만큼 희생을 크게 치르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한 교육자도 없다. 복직된 교사들도 의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전교조 활동 때 이상으로 학생지도에 헌신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외쳐 온 참교육의 깃발이 헛되지 않도록 분필대신 다른 것을 쥐고 희생과 봉사에 나선 모습이 바로 지금까지의 윤영규 선생님이다.

이 제 사별을 맞고 보니 지나온 세월이 구비마다 고뇌에 찬 낙엽들이 깔린 것을 새삼 회고하게 된다. 젊은 청춘이 제자들에게 참된 교육을 하려고 애썼다. 중년에 이르러 참교육을 외치며 못된 교육관료들과 싸우느라 감옥을 내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옥고의 한 서린 나날들은 육신을 괴롭히는 병마를 안겼고 건강에 마음 쓸 겨를도 없이 교육계 곳곳의 비리와 부정, 불합리와 싸우다 갔다.

인자무적이란 윤 선생님의 경우를 두고 이른 말이다.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 모두 선량하고 악의가 없었다.

삼가고인에게 절하며 맺음.

2005년04월10일 14: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