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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金海後人 김대중 대통령과 한핏줄 李氏

金海後人 김대중 대통령과 한핏줄 李氏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73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특별 전재한다. 또한 생존한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신군부 청와대 교육수석 역임해 뒷말

세출예산 지금의 절반도 안되는 22조원

국민의 정부 교육장관 7명 중 마지막

-야당인 한나라당 배수진 대안교과서 막는데 혼신-

김대중 정부 7번째 임명

44대 이상주 교육부장관

<2002. 1. 30~ 2003. 3. 6 재임>

국민의 정부 공교육 마무리

 

2002년 1월30일 임명되어 취임한 이상주 교육부총리 겸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국민의 정부 마지막 교육각료로 교육정책 전반을 정리·인계할 책무가 주어졌다.

 

동시에 특별한 시정대책은 불요불급이었고 전임 한상완 장관 때 대통령이 당부한 ‘글로벌 교육’ 이상 펼치기 어려웠다.

 

이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 때 청와대 교육수석을 역임했고 강원대학교 총장 재임시에는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이면서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와 동성 동본”이라며 비난한 티켓을 들고 행진한 것에 분을 참지 못하고 할 말을 잃었다.

 

이를 지켜본 당시 허만윤 강원대 사무국장이 시위 중인 학생들을 꾸짖고 “너희들이 잘 못 알고 총장님을 욕보인다”고 항의했다가 휘두른 각목에 이마가 터져 피를 흘린 험한 꼴도 보았을 정도였다.

 

본래 이상주 장관은 인천 이씨의 후손으로 가락국 김수로왕의 김해 김씨 일족이었고 선대조가 신라 때 중국에 들어가 무술대회에서 우승한 시상으로 하사받은 성씨인 인천이씨를 쓰면서 현을 다스렸다. 지금도 중국에는 당시의 집성촌이 있다. 또 시위 학생들의 각목에 맞아 이마가 터진 허만윤 국장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인도 출신 허 왕후 후손으로 김해 김씨와 인천 이씨, 김해 허씨는 혼인을 할 수 없는 동성동본이다.

 

이처럼 이상주 장관의 입각은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와 동성이었기 보다 김해 김씨의 후인인 김대중 대통령과 한핏줄인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관 임명 때까지 알지 못했다.

 

이 장관이 제44대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으로 취임했을 때 교육부는 전년도인 2001년 1월29일 정부조직법 개정(법률 제6400호)으로 교육인적자원부로 개칭해서 출범한 때였고 교육기본법을 다듬어 기구와 편제가 정비된 시기였다.

 

휘하의 인천교대 교수출신 최희선 차관은 2000년 6월1일 임명되어 재임하고 있었으나 2002년 3월30일 교체되어 떠나면서 김신복 서울대 교수가 제44대 차관으로 임명되어 4월1일 취임했다.(별표 참고)

 

또 별정 1급인 차관보는 고재욱 관리관이 유임했고 공보관은 김철 대구교대 출신 부이사관을 앉혔다.

감사관은 김홍진 부이사관, 국제교육정보화기획관은 김정기 이사관, 총무과장은 이종항 부이사관, 기획관리실장은 이기우 관리관, 학교정책실장은 이상갑 장학관, 교원정책심의관은 박경재 이사관, 인적자원정책 국장은 정기오 이사관, 평생교육국장은 조성종 이사관, 대학지원국장은 서남수 이사관(후에 박근혜 정부 첫 장관) 교육자치지원국장은 김평수 이사관이 유임했다.

 

이 때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의 교육문화수석실은 조영달 수석비서관이 재임했고 국무조정실은 고용 교육문화심의관이 재직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은 한나라당 이규택(현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경기도 여주 출신 의원이 재임했고 야당 간사엔 황우여(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인천 연수구 의원이 맡아 활약했다.

 

이밖에 야당(한나라당)의 국회 교육위 위원은 권철현(부산 사상갑) 김정숙(비례대표) 박창달(비례대표) 이재오(서울 은평을) 조정무(경기 남양주시) 현승일(대구 남구) 의원 등 8명이었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간사에 이재정(비례대표·현 경기도 직선 교육감) 김경천(광주 동구) 김덕규(서울 중랑을) 김화중(비례대표) 설훈(서울 도봉을) 임종철(서울 성동구) 전용학(충남 천안갑) 의원이 포진했고 무소속(비교섭단체) 조부영 의원 등 8명이었다.

 

이처럼 국회 교육위의 영향력이 막강한 상황에서 이상주 장관은 교육인적자원부를 이끄는데 힘겨운 때가 더러 있었다.

 

출입기자는 통신사 1(연합뉴스) 일간지 8, 영자지 1(코리아헤럴드) 방송사 TV 4(KBS, MBC, SBS, YTN) 라듸오 3(BBS, CBS, PBS) 교육방송 1(EBS) 교육전문(주간)지 7개사에 1명씩 모두 25명이었다.

 

당시 시·도교육위에서 선출한 16개 시·도교육감은 서울 유인종, 부산 설동근, 대구 신상철, 인천 나근형, 광주 김원본, 대전 홍성표, 울산 최만규, 경기(구속 재판 중 공석 장기원 부교육감 대행) 강원 한장수, 충북(구속 재판 중 공석 유선규 부교육감 대행), 충남 강복환, 전북 문용주, 전남 김장환, 경북 도승회, 경남 표동종, 제주 김태혁 교육감이었다.

이렇듯 이상주 장관의 정책 환경은 배수진이 만만치 않았고 교육부 안팎이 가시철망을 방불케 했다.

 

 

세출예산 22조3천억 규모

 

이상주 장관의 취임 첫 해인 2002년도 교육인적자원부 세출예산 규모는 교육부의 현 년도(2015) 53조3천537억 원의 절반도 안 되는 22조2천783억 원이었다. 당시 지방교육재정도 14조9천823억 원으로 현 년도(2015)의 39조4천55억 원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