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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사 대량해직 악역 빠져나온 전화위복

교사 대량해직 악역 빠져나온 전화위복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8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취임 후 하루도 편치않았던 재임기간

굶어도 고프지 않은 날도 있어 추억

이임식장 나올 때는 발이 허공에 떠

- 공제회 이사장 되자 제주도 해변에 특급호텔 지어-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개각 전날의 장관실 이변

 

교원정보부 못지않게 대학을 감시하고 탄압한 학사담당관들까지 폐지했다 되살아난 직후임에도 본색이 도진 듯 새로운 역할과 기능이 수혈되고 있었다.

 

문교부 장학실의 교원정보부가 초·증등교사를 대상으로 삼는 사찰업무인 것처럼 대학교육정책실의 학사담당관은 교수와 학생회까지 휘어잡는 것으로 기세등등이었다.

 

마치 장관위에 교원정보부와 학사담당관이 있는 듯이 문교부 기능은 이질화 되었으며 최종 집약은 청와대 교육수석실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8년 11월의 마지막 가는 날이 되자 며칠 뒤(12월 4일) 단행할 노태우 대통령의 첫 개각은 이미 설이 무성했던 대로 시각을 다투면서 후문이 난무했다.

 

드디어 1988년 12월 3일 오후 개각의 윤곽이 TV뉴스를 통해 예보되면서 문교부 출입 기자들도 다음날 발표될 개각보도와 이에 따른 신임장관의 프로필을 준비하느라 모두들 바빠졌다.

 

이렇듯 제29대 김영식 문교부장관은 1988년 2월 25일 임명·취임하여 12월 3일까지 9개월 8일간 재임하고 뒷날 떠날 일만 남았었다.

 

그날 오후 6시가 임박할 무렵, 개각 발표가 있기도 전에 문교부 장관실로 축하 난분이 들어왔다.

꽃집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난을 보낸 사람의 이름이 리본에 적혀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황당했다.

꽃집에서 온 사람도 다시 가져갈 수 없었던지 장관실에 내려놓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지켜본 비서관이 “새 장관님이 취임하시기 전이라도 발표만 있으면 놔 드릴테니까 그냥 놓고 가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별로 고급(난)도 아니구먼”하면서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식 장관은 오후 6시 퇴청시간에 맞추어 문을 열고 나오면서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고 했다.

이에 장관실 직원들은 다음날 신임 장관의 취임준비를 위해 김 장관이 복도로 나가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선채로 기다렸다 앉은 다음 새삼 바빠졌다.

 

 

신·구장관댁 직통전화 교체

 

그때는 장관이 바뀔 때마다 이를 지켜본 기자들은 신·구장관의 댁에 설치했거나 설치할 대통령의 직통전화에 촉각을 세웠다.

 

경우에 따라서는 입각설이 파다했던 인사의 집에 전화를 미리 걸어 확인해 보고 발표보다 먼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퇴임 장관의 집에 설치되었던 직통전화와 신임장관의 직통전화는 동시에 교체가 이루어진다.

 

직통전화를 뜯어가면 가족들도 “끝났구나”생각하고 급하게 들이닥쳐 가설하면 “웬 일이냐?”고 물었다가 “장관님 사모님이세요”하고 응수하면 비로서 남편이 장관자리에 오르게 된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날 일찍 집에 들어간 김영식 장관은 직통전화에 눈이 갔고 잠시후 뜯겨 나가는 것을 보고 다음날 이임식을 위해 정부 청사에 마지막 출근하게 되었다.

 

이임식장에 들어섰으나 특별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역대 장관들에게 듣게 된 후일담 가운데 “취임식장에 들어갈 때는 몸이 둥 뜨는 것 같고 퇴임 때 이임식장을 나와 떠날 때는 발이 허공에 뜬 것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고 한다.

 

이게 권력의 마력이고 약발이란 것이다.

 

취임식 날은 아침을 굶어도 점심참이 지나도록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하루 온종일 상기된 표정이다.

 

퇴임장관을 떠나 보낸 문교부 간부들은 신임 장관에게 보고할 주요 업무를 챙기느라 바빠졌다.

퇴임 장관의 이임식 이후부터 새 장관의 취임식까지 차관이 주도해서 새로운 출범을 준비한다.

전임 김영식 장관이 취임했을 때는 김상준 차관이 재임하면서 서명원 전 장관의 이임식을 치렀다.

그 후 88년 3월 4일 차관인사로 경질되어 후임 장병규 차관이 임명되었다.

 

김영식 장관의 이임은 장 차관이 치렀고 그로부터 8일 째인 12월12일 차관인사로 그도 경질되어 떠났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김영식 장관이 9개월 9일 만에 떠난 것처럼 장병규 차관도 88년 3월 5일 임명되어 취임해서 그해 12월 12일 떠났으니까 9개월 7일 재임했다.

 

장·차관자리에서 떠난 두 전임 교육각료들은 여느 장·차관과 다름없이 두문불출로 칩거하게 마련이며 권력의 무상이었다.

 

 

마지막 봉사기회 생기

 

그러다가 2년 5개월이 흐른 1991년 4월, 김영식 전 장관은 한국교직원공제회 제10대 이사장으로 교육계에 되돌아왔다.

 

당시 교육부장관은 제31대 윤형섭 한국교총회장 출신이었다.

 

공제회 이사장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던 날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좋지! 안 좋겠어요?”하고 되묻는 것에 “그렇게 좋으시면 할 일도 많으시겠네요?”라고 거듭 묻자 “세계적인 호텔 하나 지어서 우리 선생님들 가족과 함께 휴양다운 휴양 좀 할 수 있게 봉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호텔이 지금 제주도에 있는 ‘(주) 교원나라 제주호텔’이다.

 

국제수준의 특1급 해변호텔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RAMADA PLAZA JEJU)’은 세계적인 관광도시 제주도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김영식 전 장관은 고향 마을에 되돌아가는 마음으로 꿈과 낭만의 섬 제주도 요지에다 전국교직원공제회 가족이 주인인 특급 관광호텔을 마련한 것이다.

 

세계적호텔 체인인 라마다 인터내셔널사와의 프랜차이즈를 통해 국제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내 최초 해변호텔로 지하 1층 지상 9층 규모에 총 330실의 객실과 1,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홀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비즈니스는 물론, 국제학술대회까지 최상의 여건으로 치를 수 있다.

 

김영식 전 장관이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취임 후 1993년 6월까지 2년 2개월 재임하고 떠나면서 남긴 말은 “장관자리 못지않은 기회였고 교육가족에게 빚진 것을 갚은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때(1988. 12. 4) 장관을 그만 두고 떠났기 때문에 전교조 결성에 따른 가담 교사의 대량 해직이 빚은 악역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전화위복이었다.

 

그 이후의 교육장관들도 김 전 장관을 말할 때는 서슴없이 “복인”이라며 장관자리가 가시방석인 것을 되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