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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육과정 교과서에 눈길 돌려 마음 잡아

교육과정 교과서에 눈길 돌려 마음 잡아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7회) -

○… 본고는 이달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전교조 어찌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초중등교육 핵심에 교과서 혼맥 심어

교육감은 영향권 밖의 교육자치 관장

-미군정기 첫 교육부장관은 부장 왜색추방 철저-

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

<1993. 2. 26~ 93. 12. 21 재임>

 

교육자치의 역학구도 모호

 

문민정부 출범 당시의 지방교육자치는 15개 시·도의 교육청에 교육부장관이 복수제청한 내정자를 김영삼 대통령이 교육감으로 임명하여 4년 임기로 재임했다.

 

이 때 장관의 제청은 추천수준도 안되는 것으로 시·도지사의 의중과 추천절차에 더 힘이 실려 있었다.

또 교육감을 보좌한 부교육감은 교육부 승진인사로 배치했으며 장관의 의중 보다 외풍에 영향받았다.

 

당시 교육감(괄호안 부교육감)은 다음과 같다.

서울 이준해(김득수) 부산 우명수(심명섭) 대구 오동희(김연철 후에 김홍원) 인천 신홍균(이종인) 광주 안준(홍기문) 대전 박경원(김상은) 경기 한환(최만식) 강원 김병두(허만윤) 충북 정인영(박기동) 충남 백승탁(한상우) 전북 임승래(안준태) 전남 이양우 후에 오영대(조형수) 경북 김주현(박치욱), 경남 강신화(정수상) 제주 강정은(장주열)교육감이 재임했다.

 

이들 가운데 부산의 우명수 교육감은 대통령선거 때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치열하게 겨룬 것에 복집회동에서 “우리가 남이가…” 일화로 화제가 되었던 인물 중 한사람이며 김대중 후보의 라인으로 찍힌 오병문 교육부장관과 계보가 달랐을 정도다.

 

그 밖의 교육감들도 광주·전남만 예외일 뿐이었다.

또 전교조 해직교사의 복직 등 원상회복 성사에 주역이 될 각오로 입각한 오 장관에게 이들 시·도교육감은 우군이 될 수 없었고 실제로 초·중등 교사의 인사권도 장관이 아닌 교육감이 쥐고 흔드는 상황에서 그냥 장관실을 지키는 의미 이상 권한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하루는 장관집무실에서 마주 앉아 차를 나눈 기회에 “전교조 문제는 청와대 보고할 사항이 뜻대로 잘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묻고 있다”면서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우리 대통령이 잘못하시는 것인지, 내가 잘못 들어 온 것인지 모르겠다”고 힘든 표정이었다.

 

이에 “그렇게 힘이 드시면 정치권(야당)의 힘이라도 빌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떠보자 “이 사람아! 생사람 잡을 소리 말어…”하면서 더 이상 뒷말을 잇지 못하다가 “나 요새는 어디 조용한 바닷가에라도 나가서 갈매기하고 얘기 좀 나눴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 이 꽉막힌 가슴이 뚫리고 풀릴 것 같단 말이시”하면서 듣기에 민망했고 “장관 자리에 잘못 들어 왔다”고 푸념하듯 말한 하소연에 연민의 정이 갔다.

 

오 장관은 평소 낙천적이었고 호인으로 좀처럼 표정에 그늘이 없었던 것에 비추어 지금은 고인이 되어 유명을 달리한 그에게서 장관자리는 바늘방석과 다름 아닌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새삼 기억에 떠오른다.

엣말에도 “부귀(富貴)를 탐하지 마라 영욕이 반이더라”는 말이 있었듯이 속설에서 전한대로 “쌍가마 뒤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은 연유가 없지 않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평균 수명 1년으로 길지도 않은 교육부장관의 애환은 어제 오늘의 일 만도 아닌 것에 전·현직 장관 모두를 생각하며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정치·권력은 무상한 것이었고 세월과 함께 빛이 바랬다.

역대 정권의 장관은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고 떠나고 싶다고 그만 둘 수 없었으니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처지도 아니었다.

 

 

初中等 6차 교육과정 기틀

 

그해(93년) 2월26일 임명된 오병문 장관은 취임 후 3월과 4월을 보내고 5월에 접어들자 무언가 각오가 선 듯했다.

하루는 장관실 입구에서 만난 김에 “신수가 밝아 보입니다”라고 덕담삼아 인사를 하자 “나 요새 할 일이 생겼네, 급하면 부를 테니 좀 도와줘! 그리고 초·중등교육과정과 교과서 제도에 관한 공부도 좀 하시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짚히는 것이 있어 그 길로 교육과정담당관에서 옮겨 앉은 함수곤 편수관리관을 찾았다.

함 관리관은 찾아온 이유를 눈치챘는지 “귀신이 기자인지 기자가 귀신인지 모를 일”이라며 “장관실에서 전에 없이 우리쪽(교육과정) 일에 관심이 깊어 신바람이 난다”고 했다.

 

또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취재하기 바빠졌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장관님께서 할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대답하자 “지금은 제6차 초·중등교육과정기의 기틀을 다질 시기에 들어선 때라”면서 “오 장관은 정말 중요한 시기에 임명되어 취임하셨다”고 말했다.

 

그 때까지 전임장관 대부분은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고 교과서제도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교육과정은 본무가 아닌 듯 열정이 미지근했다.

 

우리나라의 초·중등교육과정은 1945년부터 1954년까지 미군정의 과도기부터 교수요목기에 거슬러 올라간 다음 더듬어 내려오면서 고찰하면 연혁이 쉽게 잡힌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면서 그해 9월17일 조선교육위원회 건의로 ‘산수와 이과 외에는 일제 때 교과서를 사용할 수 없다’고 미군정청의 일반명령(제4호)이 일선학교에 통보(지시)되었다.

 

또 수신(修身)과목을 없애고 대신 공민(公民)과목이 등장했다.

 

미 군정청은 이어서 다음날(1945. 9.18) 법령 제6호 ‘교육조치’에서 “조선학교의 교육용어는 조선어로 한다”고 했으며 이 때 “교육과정은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과목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다”고 단호했다.

 

미군정청 법령 제6호(1945. 9.22)는 당시 6년제 초등학교의 교과 편제와 시간배당표를 제정하고 교과는 공민, 국어, 역사지리, 산술, 이과, 체조, 음악, 습자, 도화, 공작, 요리, 재봉, 실과 등 13과목으로 결정했다.

 

한 주가 지난 9월30일에는 중등학교 수업과목과 시간표 등 교과를 발표했다.

이 때 과목은 공민, 국어, 역사지리, 수학, 물리화학, 생물, 가사, 재봉, 영어, 체육, 음악, 습자, 도화, 수예, 실업 등 15과목이었다.

 

미군정청은 이듬해인 1946년 1월21일 군정청 학무국 편제와 조직을 3실 7과로 개편하고 교육과정 운영 및 교과서제도를 관장했다.

 

이 때 3실은 연구실, 특수과학실, 총무실이었고 7과는 편수과, 초등교육과, 중등교육과, 고등교육과, 성인교육과, 문화과, 기상과 등 이었다.

 

미군정청은 1946년 3월29일 미군정령 제64호로 조선정부 각 부서의 명칭을 부여하고 군정청 학무국을 문교부로 승격시키면서 부장은 유억겸씨를 임명, 첫 교육부장관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문교부 편수국에 번역과, 편성과, 경리과, 교재과를 두었으며 편성과는 초등교과서계와 중등교과서계를 따로 두어 분리했다.

 

이에 힘입어 1946년 11월20일 문교부는 일본 용어 추방을 위해 ‘학습용어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교과서에 남아있는 왜색용어를 모두 삭제하거나 수정, 정비했다.

 

이것이 해방 후 미군정의 과도기때 교과서 정책이었다.

 

이후 1948년 8월15일 광복절을 계기로 삼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우리의 교육과정기를 맞게 되어 제1차에서 제7차를 거쳐 수시, 2009교육과정에 이어 지금은 융합형교육과정이 준비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