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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육무용 ‘행복은 성적순 아니다’ 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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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무용 ‘행복은 성적순 아니다’ 선풍

- 교과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61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과학기술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민주교육 교사협의회 지역조직 활발

전교조 결성은 1년 후부터 태동일어

12월 대통령선거 앞둔 때라 감시 완화

- 청주대 강혜숙교수 안무 우리춤연구회 구성 -

<전호에서 계속>

 

28대 서명원 문교장관

 

강원·충북교사회 창립

한편, 청주 YMCA쪽과 연결된 도종환·김미영·양현조·홍주일·오형균 등 ‘청소년교실’의 지도에 참여했던 교사들이 서울쪽의 Y교사회와 민교협 등과 유대하면서 전국의 교사운동 흐름에 합류했고 유일하게 서울 출신이면서 충북에서 근무하고 있던 김민순 교사가 참여하면서 중앙과 연줄이 튼튼해졌다.

 

그해(87년) 7월 중순경 서울에서 Y교사협의회와 흥사단교육문화소모임측이 기치를 올린 교사 대중운동의 흐름은 각 조직의 라인을 통해 충북의 교사들 사이를 잇는 연결망이 되면서 표면화 된 것이다.

 

이 때 공주사대의 권영국이 졸업 후 6년만에 교사로 발령받아 교육현장에 들어섰고 도종환 교사도 좌천으로 밀려나 시국을 관망하던 차에 청주시내 중심학교로 되돌아왔다.

 

▲6·29선언 후 석달째인 1987년 9월 중순경 강원도교사협의회가 창립되자 충북은 Y교사회와 흥사단분회가 이를 계기로 강원교사협의회 창립행사에 참관하면서 단일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강원교사협의회 창립행사가 원주에서 갖게 된 것을 반기면서 충북과 가까운 거리여서 대거 참여하기 쉬웠다.

바로 그해 9월 9일 원주행사에 참석한 교사는 청주지역의 도종환·최환규·김병우 교사와 제천·단양의 김병태·강성일·김민곤 교사들로 의기투합했다.

 

이 때 김민곤 교사는 서울에서 ‘민교투’ 관련 징계로 해직되었다가 6·29선언이 구제한 것인양 복직발령하면서 서울사대부고에서 충북으로 내몰아 벽촌인 단양의 단산고등학교에 유배되었다.

 

특히 김민곤 교사는 유배지(단산고교)에서도 교사운동의 열기를 되살려 87년 9월 19일 원주행사에 수명의 교사들을 모아 함께 참석한 것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고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문교부 장학실은 “6·29선언 때문에 못해먹겠다”고 불평했다.

 

이날 원주에서 모인 교사들은 원주기독병원에 입원한 김시천 교사를 찾아 문병했고 전국의 교사흐름을 정보삼아 듣고 전하면서 결속을 다졌다.

 

그 이후 청주YMCA교사회는 당국에서 말한 ‘문제교사’의 은밀한 거점으로 달라졌고 매주 2~3차례씩 모여 깨어 있다고 알려진 교사들과 은밀하게 접촉해 나가면서 충북교사회 창립을 서둘렀다.

 

이 상황에서 도종환 교사의 활동은 회합이 거듭될 수록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교사가 늘었고 창립일까지 김익중·나용환 등 70여 명의 교사들로 똘똘뭉첬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한 충북도교육청은 문교부 보고에서 “충북에서는 하라고 해도 못할 것이니 마음 놓으라”고 장담하면서 호언을 일삼다가 당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교사들은 그해(1987년) 11월 21일 ‘민주교육추진충북교사협의회’를 창립했다.

 

▲충북의 김병우 교사가 남긴 증언은 계속 이어지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도교육청의 감시가 무색하게 충북교협(민주교육추진 충북교사협의회)을 창립한 교사들은 신탄진 근교의 ‘기독교 매포수양관’에서 결성식을 가진 다음 도교육청 유성종 교육감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이를 접한 충북도교육청과 경찰은 “뒤통수를 맞았다.”면서 매포수양관에 급거 출동해서 주모자를 찾는 등 당황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태연자약한 채 “우리는 선성사 후 공개 방식으로 결성했다.”면서 “백발단식이 아니라”고 비아냥거렸다.

 

백발단은 당시 시·도교육청과 경찰이 교사회 조직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했던 강경진압 용어였다.

이를 지시한 것은 경찰청과 문교부상황실이었고 ‘교원정보부’라는 별칭이 붙었다.

 

충북교사회의 결성식은 100여 명의 교사가 참석해서 초대 회장에 고흥수 교사와 부회장에 황연길·김미경 교사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아울러 충북교협의 임원직과 시·군교협준비위원장을 공개하고 뒤따를 탄압과 징계 등에 공세적 대비책을 강구했다.

이들은 결성식 다음날인 1987년 11월 22일부터 도교육청과 경찰이 손을 뻗치려는 연행·구금·징계 등 십자포화에 대처했다.

 

도교육청과 경찰은 이와 달리 손을 쓰기 어렵게 결성한 것에 혀를 내두르면서 타 시·도의 처리방침대로 조치 없이 불문처리 했다.

민주교육을 좀 더 알차게 해보자고 나선 것 이상 불순한 것을 찾기 어려워 계속 감시의 대상으로 매듭지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교협)는 문교부와 시도교육청 및 경찰의 사전 봉쇄방침을 누르고 결성되어 출범하자 전두환 신군부정권도 ‘불법단체’에서 ‘임의단체’로 바꾸어 부르면서 감시는 하되 12월 선거까지 막지말자고 선회했다.

 

이 상황은 전교조 결성이 태동하기 1년 전의 일이다.

또 교사회 조직의 전면봉쇄 강경책이 감시의 대상으로 한 단계 완화된 조치에는 당시 서명원 문교부장관과 이를 보필하는 김상준 차관의 남모를 노력과 지혜가 배경으로 작용했다.

 

한편 결성식을 마친 충북교사협의회와 회원교사로 가입은 하지 않아도 성원한 교사들의 성금으로 청주시내 고속터미널 맞은편 동양치과 건물 4층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상근 간사까지 두었다.

 

그 이후 상근 간사의 교사회 업무능력이 뛰어난 것에 힘입어 시·군단위 교사협의회 결성을 완료하는데 진척이 빨랐다.

이를 위해 각종 홍보물을 제작 배포하면서 격월간 소식지 등 교사문화교실과 지역순회 강연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눈길을 끈 것은 교육무용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주제인 교육무용 공연은 학생들과 학부모의 관심이 집중되는 효과에 도교육청과 경찰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교육무용은 시·군지역까지 순회공연을 하면서 시민·학부모의 관람이 늘어 성황이었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유행어로 관객이 2천명 넘게 동원된 효과를 보였다.

 

이 기회에 충북교협은 활동과 뜻을 홍보하는데 자신감이 붙었고 교육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교사협의회 창립과 활동에서 산소처럼 신선한 효과를 보인 교육무용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청주대학교 강혜숙 교수가 안무를 맡았고 ’우리춤 연구회‘가 공동 구성한 …

것으로 충북교협창립식에서 축하공연으로 첫 선을 보인 뒤 전국의 교사협의회 행사장에서 초청이 쇄도하였으며 서울에서는 일반 공연으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성가를 자랑했다.

 

충북교사협의회 활동은 도내 사범계열 학생회와 자연스럽게 연계되면서 충북대학교와 교원대학교의 교생실습 등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회원 교사들과 학부과정 학생들의 토론회가지 갖게 됐다.

 

이처럼 나날이 다르게 발전한 충북교사협의회는 타 시·도 협의회와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비교학력고사와 보충수업, 인문영재고교 설립 등 현안에 반대성명으로 맞서 저항하고 도교육청에 항의 방문해 창립취지와 목적을 드러냈다.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전국적인 조직망과 호응이 큰 현장교사의 가입이 늘면서 시·도·시·군 교사회의까지 결성이 끝나기를 기다려 가칭 ’민주교육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에 호소력이 강했던 ‘사학 부조리 척결운동’은 어떤 활동보다 국민공감대 형성에 성공했고 일부 악덕사학의 재단측에서 교사 채용에 금품이 오간 것을 교사회에 가입한 사립교사들이 스스로 밝혀 진상을 공개하면서 채용 때 건넨 돈을 되돌려 받는 사태로 진전했다.

 

‘민주교육법’ 제정을 위해 정치권에 직접 찾아가 여·야당을 막론하고 찬성과 호웅약속가지 받아 냈으나 시기적으로 그해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때여서 여당은 검토형식의 반응이었고 야당은 적극호응으로 갈렸다.

 

이에 교사협의회는 전국적인 가두 성명을 받아 ‘민주교육법’제정이 성사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 1987년 12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적인 가두 홍보에 나서 교사협의회는 휘몰아친 설한풍과 눈보라를 맞으며 서명운동을 벌였고 지나가는 행인들도 언 손을 불면서 서명지에 이름과 싸인을 해주었다.

 

그대 정치권은 “민주교육법을 제정해서 전국에 번진 교사협의회 요구를 수용하자” 는 야당의 호응과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으니 지켜보자”고 유보적이었던 여당의 주장으로 엇갈렸다.

 

이 와중에 서명원 문교부장관은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누가 당선 되든 1988년 2월 새 정부가 들어서게 마련이고 장관자리가 계속 보장 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관망 이상 견지 할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장관이 되기 전 자신이 서울사대에서 직접 가르쳐 내보낸 제자들이 교단에서 민주교육법 제정을 요구하고 법제정 취지와 목적을 가르쳤던 것과 다르지 않은 것에 더욱 할 말을 잃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