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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육의 진수는 ‘母性愛’로 정의 감명 안겨

교육의 진수는 ‘母性愛’로 정의 감명 안겨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31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국방대학원 특강 때 파월용병설 화근

그런 뜻 아니었다 해도 경질로 이어져

대서특필 언론 보도에 자극 민감 반응

-이임사 중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상” 어머니 곁으로-

김영삼 정부 두번째 임명

34대 김숙희 교육부장관

<1993. 12. 22~ 95. 5. 12 재임>

교육청 편찬 교과서 첫 사용

<전호에서 계속>

 

특히 1995년 3월엔 제6차 교육과정에 의거한 고등학교 2종교과서의 검정기준을 개선해서 확정했다.

 

그러나 그해(1995년) 상반기에 빚어진 고등학교 2종교과서 검정 출원을 둘러싼 불협화는 연초인 1월20일 76개사 출원 예정자들이 “고등학교의 2종교과용도서 검정제도 변경에 따른 입장”을 성명, 발표하는 등 교육부를 난감하게 했다.

 

이날 성명의 요지는 “검정 출원 1주일을 앞두고 돌연 검정을 연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면서 “초·중·고교의 교과서 정책은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김숙희 장관은 “시간을 두고 충분히 검토하고 협의해서 세계화 국정지표에 부응한 질 좋은 교과서를 만들자”고 간곡히 요청, 사태를 수습했다.

 

이어서 1월30일 국제교육진흥원의 95년도 재외동포교육용 교재개발 및 공급실적을 발표했다.

 

실적은 ‘한국어’외 47종이었다.

 

3월2일엔 전국 15개 시·도교육청별로 편찬한 초등학교 4하년용 ‘지역화교과서’를 사용케 했고 ‘우리들은 1학년’도 함께 서둘러 편찬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3월6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서 신문 활용교육 ‘NIE(Newspaper in Education)’에 대해 초·중·고 교육의 교재로 활용해 주도록 요청해 오자 “내용을 충분히 검토해서 이용할 수 있다”면서 주저없이 수용했다.

 

 

뜻하지 않은 용병설로 경질

 

장관에게도 관운이 있는 것일까?

관직에 있으니 관운을 배제하기 어렵지만 남이 보기에 장관이 되었을 때는 상승했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지는 해 노을처럼 떠나갈 운을 맞게 되는 것으로 하강하는 듯 싶었다.

 

김숙희 장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1995년 5월11일 ‘스승의 날’을 나흘 앞둔 날 국방대학원의 영관급 고위 장교 연수에서 특강을 맡게 된 것은 불운이었다.

 

핵심은 파월장병을 “용병”으로 표현하게 되자 연수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이를 ‘조선일보’가 대서특필해서 치명상을 안겼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해명도 사후약방문처럼 먹히지 않았다.

 

너무 억울해서 조선일보측에 특강을 녹음한 복사본까지 요구해 해명해 보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국방대학원에 녹음된 것을 요청한 것도 대답이 없었다.

 

사태는 김영삼 대통령이 내린 ‘장관 경질’로 일단락 된 채 이임해서 교육부를 떠나게 되었다.

 

후임은 연세대 총장 출신 박영식 장관이었다.

이임식 소식이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교육부가 있는 정부서울청사 후문에 김 장관을 성원했던 사람들이 몰려들고 발을 구르면서 안타까워 했다.

 

드디어 이임식장에 들어선 김숙희 장관은 상기된 표정으로 “교육부 직원 여러분! 작별이 이렇게 서럽고 슬픈 것인 줄 처음 알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떠나면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상을 지니신 제 어머님 곁으로 돌아가 대과없이 장관직을 마치고 왔다고 고하겠습니다”라고 맺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 오전에 필자는 김 장관 댁에 미리 연락을 드린 후 찾아갔다.

 

이화여대 후문을 지나 봉은사 맞은 편 언덕받이에 있는 자택을 찾아 골목가게에서 레몬쥬스를 사들고 대문 앞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연락이 미리 되어 있었기에 김 장관이 대문을 열어주면서 “웬걸 들고 왔느냐?”고 했다.

 

이에 “제가 마실 것”이라고 대답하고 현관에 들어서자 어머니께서 “손님이 오셨구나”하시면서 반겨 맞았다.

 

처음 뵌 분 같지 않게 온화한 표정이었고 손엔 구멍이 난 헌 스타킹을 접착제로 메우다 나오셨는지 백열전구를 끼어 들고 있었다.

 

“그게 무엇입니까?”하고 조심스럽게 묻자 김 장관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이 신다가 버린 것을 조금 손봐서 구멍만 막아 시골에 보내주면 무논에 들어갔을 때 거머리에 물리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볼 일 보시고 살펴가시라”며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김 장관의 어머니는 황희남(黃喜男)여사였다.

 

아들을 원했던 부모님께서 너무도 아쉬워 아들 이름으로 지어 불렀고 특별히 기쁠 희(喜)자를 쓴 것에도 깊은 뜻이 있었다고 했다.

 

김숙희 장관의 이름에서 희(喜)자도 “어머니가 물려주셨다”는 설명에 이해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