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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장임기제 내건 교총회장이 장관차지

교장임기제 내건 교총회장이 장관차지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5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사 3불론으로 전교조에 맞불 주효

임기제 실시에 주눅든 교장들 냉가슴

교원 중국연수 빗나가 재정허비 고민

- 국회 법안심의 때 여당의원 “不知不知長官” 혹평-

31대 윤형섭 교육장관

<1990. 12. 27~ 92. 1. 22 재임>

 

취임하던 날 교육부로 개칭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2월26일 정원식 문교부장관을 경질하면서 정부조직법을 개정하고 문교부를 교육부로 개칭했다.(법률 제4268호)

 

교육부 명칭은 1991년 1월1일부터 시행했다.

 

다시 말해 문교부 시대는 제30대 정원식 문교장관 재임 기간으로 마감했고 교육부 시대는 제31대 윤형섭 장관으로 하여금 열게 했다.

 

개각을 하루 앞둔 12월26일 오전 일찍 장관실에 들르니까 분위기가 침울했고 당시 김홍원 비서관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출입기자들도 벌써 개각의 낌새를 알아차렸고 후임 장관을 알아내기 위해 정보망을 가동했다.

 

필자(출입기자)도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 조규향 차관을 만나 떠보았더니 “오시면 가시는 거고 가신 분 대신 새로운 분이 오시겠지요”라고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이전까지 개각은 내정자를 매스컴에 흘려 인물검증의 최종단계로 삼았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은 그래봤자 흠집만 드러나게 마련이므로 발표 때까지 보안을 유지했다.

 

이날 필자가 조규향 차관을 통해 확인했던 것은 조 차관이 청와대 정책특보인 박철언 공안검사 출신이 조직해서 가동한 ‘월계수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박 특보는 바로 전의 전두환 대통령 때 검찰에서 발탁되어 청와대에 입성했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과 대통령 선거에서 활약이 컸고 이 때 사조직인 ‘월계수’회원이 전국의 고위직 공무원 등 요직에서 6만여 명이 가입해서 영향력도 컸다.

 

월계수회의 조직은 당시 한국교총의 사무총장과 간부들도 일부 가입했고 이들이 인사에서 승진과 영전할 경우 월계수회 이름으로 축하 난분을 보내와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부와 긍지로 삼아 배후를 과시했다.

 

이처럼 월계수 회원들만 알 수 있는 교육부 신임 장관을 조규향 차관의 몇 마디에서 알만했고 집히는 데가 있어 그 길로 교총에 달려갔다.

 

마침 교총회장실에 윤형섭 회장은 자리에 있었고 비서는 “지금 중요한 일 때문에 누구도 들여놓지 말라고 했다”면서 “바로 뵙는 것은 어렵겠다”고 난색이었다.

 

이에 필자는 “기자가 회장을 만나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라고 내뱉듯 말하고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윤 회장은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서랍을 열어 급히 집어넣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밖에서는 오늘 오후 발표할 개각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한다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하고 무례했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해합니다. 기자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요”라고 응수했다. “지금 서랍에 감추는 것이 취임사 초안입니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피식 웃으면서 “눈치 하나는……” 말끝을 흐리더니 “알고 왔으면 좀 도와주시오” 했다.

 

이에 필자는 “취임사는 간단 명료하게 할 말만 하시고 덕담으로 채우시면 될 것입니다. 이임사라면 길어도 흉될 것이 없는데 지금까지 보면 경우가 바뀐 것에 아쉬움이 따랐다”고 조언하자 “간단한 게 좋겠군”하면서 흐뭇한 표정이었다.

어쨋든 1990년 12월27일 윤형섭 장관의 취임사는 간단했고 교육부 직원들도 좋아했다.

 

교장임기제 실현 작심 굳혀

 

윤 장관은 취임 후 1991년을 맞이할 신년구상으로 마음이 바빠졌고 당시 교육계는 전교조 교사의 대량 해직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교사3불론’이 어필해서 장관자리에 오르긴 했어도 학교장 중심 학교경영 정책에 편승한 일부 초·중·고 교장의 오만과 권한 행사가 지나쳐 교육현장은 전교조 활동을 오히려 반기는 사태로 교사들이 환영했고 교총회원이 탈퇴하는 것으로 이어진 악순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교총회장 때 작심했던 ‘교장임기제’를 실현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실제로 윤 장관이 교총회장 선거에 출마해서 경합자를 압도하고 당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교장임기제’공약이었고 선출권을 가진 교총 대의원 중 70% 이상은 교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에 교장들은 개별적으로 대항해서 반기를 들지 못했으나 마음은 지지하기 어려워 윤 장관의 반대세력에 의존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드디어 교육부 입법으로 ‘교장임기제’도입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고 심의과정에서 교장출신 의원과 교장회의 로비를 받은 의원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경기도 교육감출신 황철수 의원은 여당이면서 윤 장관의 교장임기제 제안에 반대했고 국회 심의 때 질의를 통해 “임기직은 선출이 전제인데 교장을 선출 보직제로 하자는 요구를 초래할 것”이라며 “자격직인 교장을 임기제로 바꿀 경우 선출을 막을 방안이 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윤 장관은 “너무 교장이 되기에 열중해서 폐단이 크므로 일찍 하지 말고 경력에 따라 한차례만 재직하고 떠날 수 있도록 정년과 맞추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황철수 의원은 계속 보충질의를 통해 “반드시 선출 보직제 요구가 있을 것”이라면서 “장관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부지부지(不知不知)”라고 몰아세웠다.

 

결국 교장임기제 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어 오늘에 이르고 4년 임기에 한차례 중임으로 8년 재직할 수 있게 하면서 연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하나 고민은 노태우 대통령의 특단으로 중국과 국교는 수교되지 않았어도 외화벌이를 위해 관광객을 대량으로 유치한 것에 우리도 초·중등교원들이 중국을 돌아볼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에 따라 연중 교원 시찰단이 중국에 들어가서 그 곳 학교의 교육편제와 수업참관 등 실상을 보고 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시찰에 나선 교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황청심환 등 한약과 술과 녹차를 사들고 오기 바빴고 이런 관광연수에 교육재정이 허비되고 있음에 윤 장관의 고심이 컸다.

 

반면, 뜻이 깊은 교원들은 중국에서 교원은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교육목표가 ‘흥취(興趣)교육’으로 우리의 진로·적성 탐색 교육과 유사한 것을 보고 왔다.

 

또 중국의 초·중·고교는 하루 정규수업이 4시간이었고 2시간은 흥취교육을 위한 동아리활동과 1시간은 하루 수업을 복습하면서 나머지 1시간은 뒷날 수업에 대비한 예습으로 마쳤다.

 

교원들은 임명 후 발령을 받으면 그 학교에서 정년(60세)까지 재직하고 하루 8시간 가운데 7시간은 학생을 지도하고 나머지 한 시간은 당원교육으로 일과가 끝난 것을 알았다.

 

이에 윤 장관은 중앙교육연수원에 교원의 중국연수 시찰을 바로잡을 ‘선험자 특강’을 신설케 하고 먼저 가서 보고 온 교원들로 하여금 유의할 사항을 일러주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