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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대통령 직선제 해도 盧후보 당선 자신감

대통령 직선제 해도 盧후보 당선 자신감

 

- 교과부 47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58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과학기술부 출입기자 47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28대 서명원 문교장관

<1987. 7. 14~ 88. 2. 24 재임>

노태우 회고록의 증언

<전호에서 계속>

 

‘특히 권복경 치안본부장의 손을 잡고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해결해야 군 출동을 막을 수 있다”고 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끝까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나의 모든 직위를 걸고서라도 군 출동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다행히 1987년 6월 19일 오후 전 대통령은 이기백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군 출동을 유보시켰다.

여러 상황으로 보아 국면을 대전환시킬 어떤 특단의 조치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었다.

 

▲”직선제 해도 이기지 않겠소?”

야당 총재들과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고 난 이틀 뒤인 1987년 6월 22일 오전 청와대에 올라가 전(全)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분들을 만나 보시는 것이 좋겠다”고 여·야 영수회담을 건의했다.

 

당시 전(全) 대통령의 입장은 우선 시위로 촉발된 혼란을 막고 보자는 것이었다.

민주화 세력과 타협이나 대화를 하기보다 먼저 물리적인 힘으로 시위사태를 막아 놓고 그 다음에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행히 전 대통령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전 대통령은 그날(6월 22일) 오후 윤보선·최규하 전 대통령을 만난 데 이어, 이틀 뒤인 6월 24일에는 김영삼 민주당 총재, 이민우 신민당 총재, 이만섭 국민당 총재 등을 잇따라 만났다.

 

나는 그 회담을 지켜보면서 ‘무슨 변화가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6월 24일 오후 7시쯤 전(全)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로 올라갔다.

전 대통령이 내 천거에 따라 각계 인사들을 만난 직후였다.

서쪽 별관에서 만났는데 영식인 제국군도 동석했다.

 

화제는 시국문제에서부터 시작되어 당내문제, 특히 당의 단결과 국민의 신뢰 등으로 옮겨 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전 대통령은 불쑥 “당의 신뢰도나 노(盧) 대표가 쌓아 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하고 내 의중을 떠보았다.

 

나는 속으로 ‘옳지! 내가 의도했던 대로 일이 잘 풀리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이만섭 총재가 내게 한말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수긍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당원들을 데리고 국민들에게 내각제를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갑자기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반문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 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 대통령의 생각을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게 되겠는냐”는 식으로 반어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으로 해서 내가 직선제를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된 듯하다.

 

여기서 잠시 덧붙이자면 이미 나의 지시를 받은 박철언 특보는 6월 18일부터 직선제 수용 관련 선언문 기초 작업에 들어가, 20일과 22일 두 차례 보고를 하고 나의 보완 지시를 받아 수정 작업을 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내가 6·29선언으 초안을 잡도록 지시한 후에도 박 특보를 비롯한 내 참모들은 ‘직선제’이야기가 나오면 “무슨 말이냐? 직선제 하면 나라 망한다. 올림픽을 치를 때까지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내 책임하에 내가 한다”

하여튼 전(全) 대통령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시킨다 해도 노 대표가 그동안 국민들에게 심어 놓은 좋은 이미지로 보아 틀림없이 이길 것 같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밀어줄테니 직선제로 하는 것이 어더냐?”고 했다.

 

나는 “변함없는 생각이십니까?”하고 전 대통령의 말을 재차 확인했다.

 

그랬더니 “그 방법 밖에 없지 않느냐”고 해서 “알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날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앞으로 모든 책임은 다 제가 지겠습니다. 이제 각하의 뜻을 알았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제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주십시오. 앞으로의 운명은 제가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겠습니다.”

 

전 대통령은 내 말을 받아들였다.

옆에 있던 제국 군이 내게 큰절을 올렸다.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1987년에 들어서서 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갖가지 방안들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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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장’

 

그 해 투표직전인 12월 15일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여의도 유세장에 150만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당시 1노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대결에서 야권은 분열 난립으로 노 후보만 목이 쉬지 않았고 선거연설도 자신감이 넘쳤다.(우측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