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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문교장관 교총회관서 청와대 연두 보고

문교장관 교총회관서 청와대 연두 보고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2회) -

노태우 대통령 보고 장소 변경 파격적

당시 윤형섭회장 ‘교사3불론’ 어필

전교조 활동에 대적할 교총위상 배려

- 문교부 제7차 초·중등교육과정 개정작업 박차-

현직 도종환 국회의원 증언

<전호에서 계속>

 

도종환 교사가 경찰에 끌려간 뒤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담임을 맡은 학급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가 났는지 헤어보기 어렵다는 등 성적이 뒤떨어지고 아이들을 다 버려놨다”고 헐뜯었다.

 

학교수업에서 4·19혁명과 3·15부정선거에 대해 얘기하면 징계를 받는 게 당시 교육계의 현실이었다고 한다.

 

통일교육을 하면 좌경의식화 교육을 한다고 의심받던 시절이었으며 한겨레신문에 실린 북한 사진을 수업시간에 보여주면서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주민들도 생각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강 모 교사는 “북침설을 가르쳤다”고 고발당해 감옥에 갔다고 했다.

 

당시 경찰의 조서에서 증인으로 불려온 학생 6명의 진술에는 “강 교사가 북침설을 주장하면서 북한체제를 찬양했다”고 증언한 대목이 있었는데 증인 중 한 학생은 그날 결석으로 수업을 받지도 않았다면서 그 시절 그런 왜곡된 고발과 잘못된 언론의 보도가 맞장구쳤다고 했다.

 

또 전교조 가입 교사 중 최 모 교사는 “북한의 샛별초등학교를 찬양하고 국화인 진달래를 가르쳤다”고 담임을 박탈당한 사례도 증언했다.

 

그런데 샛별초등학교는 북한에 있지 않고 경남 거창에 있는 학교로 KBS-TV의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는 프로에서 소개된 바 있고 진달래꽃 노래도 북한 노래가 아니라 오펜바하가 작곡하고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유경환 시인이 작사한 ‘진달래꽃처녀’였다고 한다.

 

어떤 신문은 전교조 교사가 초등학생들에게 ‘해방가’를 가르친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으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소설가 박태원 작가가 쓴 시에다 김성태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였으며 원 제목은 ‘독립행진곡’으로 8·15해방 직후 교과서에 실렸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 할 때 즐겨 부른 노래 중 하나라고 했다.

 

도종환 교사가 경찰서에 잡혀간 이튿날 아버지가 찾아와서 ‘나갈 방법이 있다. 탈퇴서를 써주면 교육청에서 풀어주겠다고 애비에게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른 써주고 나가자”고 재촉했다.

 

이에 도 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갈 수 있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내일이면 나갈 거예요”라고 듣지 않자 아버지는 화를 버럭 내면서 “에미 없는 어린 자식들은 누가 돌보란 말이냐? 네 새끼들 네가 돌봐야지. 너는 다른 사람하고 처지가 다르지 않느냐. 네가 탈퇴서를 써도 다른 사람이 다 이해한다. 걱정 말고 써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이에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걱정마세요. 곧 나가요”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에미 없는 어린 자식들”을 들먹일 때 당시 도 교사는 부인과 사별했고 그래서 쓴 시 ‘접시꽃 당신’의 상처가 너무도 아리게 가슴을 저미면서 되살아 왔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애원한 탈퇴각서를 쓰지 않은 탓에 포승줄에 묶인 채 교도소로 넘어가는 차를 타고 경찰서를 돌아 나올 때 담벼락에 이마를 맞대고 울고 계신 어머니를 보고 순간, 가슴이 미워지게 아팠고 아버지는 그날 이후 교도소에 수감된 뒤에는 면회도 오지 않았다.

 

힘겨운 해직의 나날 막노동

 

다음은 2011년 1월1일(한겨레신문) 전교조 창립과 가입한 해직 교사들의 해직 생활을 증언한 것으로 도종환 의원도 함께 겪었던 일이다.

 

살길이 막막해진 해직 교사들은 몰래 노동판에 나가 막일로 생계를 잇거나 조금 여유가 있는 교사들은 부인과 통닭집 등 음식점을 내어 연명했다.

 

새벽에 나와 신문과 우유를 배달한 교사도 있었고 부인이 파출부로 나서 어린 자녀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애쓴 경우가 태반이었을 정도라고 했다.

 

여러 해직 교사가 생각 끝에 ‘참교육 물품’을 만들어 티셔츠나 가방, 양말, 손수건, 공책, 편지지를 팔기도 했으나 크게 남는 것이 없었고 그래도 ‘참교육’을 새긴 것에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주는 행인들이 많아 크게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영광에서 사온 굴비장사를 했는데 학교에 남아 있는 동료교사들이 주문을 많이 해주어서 겉보기엔 제법 남는 것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못했고 이런 사정을 알게된 동료들은 매달 20~30만원 씩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전교조 합법화가 실현되는 날을 기다렸어도 정부의 탄압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기약 없이 세월만 흘렀다.

노태우 정권이 끝나도록 교원노조 교사에겐 봄소식이 없었고 교육민주화의 동토는 풀리지 않을 기미에 더 큰 시련과 인내로 극복할 의지 밖에 다질 것이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 직선 후 집권 3년차

 

1990년은 대통령 직선제가 회복되어 헌정질서가 바로 잡힌 듯 했으며 노태우 대통령의 3년차 집권시기에 접어들면서 교육계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이 와중에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가투시위는 절정에 달했고 진압 경찰의 강제해산 등 연행에 맞서 길바닥에 드러눕는 것으로 저항도 극에 달했다.

 

이때 윤형섭 교총회장은 ‘교사3불론’을 발표해서 문교부는 물론 노태우 대통령의 환심을 샀다.

윤 회장은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장 출신으로 군부의 현역장교와 전역장교 출신들이 행정학 강의에 몰려들었다.

특히 교총회장 취임 후 전교조 교사의 시위에 반대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이 때 ‘교사3불론’으로 매스컴을 탔다.

그가 말한 교사3불론은 첫째, 교사는 장사꾼이 아니다. 둘째, 정치꾼은 더욱 아니다. 셋째, 교사는 길바닥에 드러눕지(시위)않는다고 했다.

 

문교부와 청와대의 환심은 2불보다 3불의 끝에 붙인 ‘길바닥’이었다.

 

이에 주석을 단 윤 회장의 설명은 특유의 달변으로 전교조 반대세력의 체증을 가라앉혔을 정도라고 했다.

드디어는 1990년의 새해가 열리면서 각 부처장관은 청와대 연두보고 준비로 바빠졌다.

 

문교부도 정원식 장관과 장기옥 차관이 바빠졌다.

 

1월이 지나 2월 초에 이르러 노태우 대통령은 “문교부 정원식 장관과의 연두보고는 우면동에 있는 교총회관에서 받겠다”고 했다.

 

전무 후무할 파격이었고 보고회 당일 청와대 식당의 요리사들은 교총회관 식당으로 옮겨가 갈비탕을 끓였다.

 

교육계의 요직이 우면동 교총회관에 집합한 것으로 TV방송은 중계 수준 특집으로 방영했다.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보고 내용은 현안과 비전으로 구분해서 전교조 대책과 의식화 교사 대처 등 제7차 교육과정 개정안 방향을 제시했다.

 

이때 윤형섭 교총회장도 배석자로 자리가 마련되어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확실하게 눈도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