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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민주화 토양에 역능환경 잔존 단호 대처

민주화 토양에 역능환경 잔존 단호 대처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25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육감 전횡에 맡겨진 교육자치 기틀

교육정책 흔드는 외풍은 강공 방어

우군될 성원 구할 기회 쉽지 않은 상황

-행정은 예산이 명령 정책은 여유가 추진력 소신-

 

김영삼 정부 두번째 임명

34대 김숙희 교육부장관

<1993. 12. 22~ 95. 5. 12 재임>

시도교육청 부교육감 포석

 

<전호에서 계속>

지방교육자치의 기틀은 시·도교위에서 간선한 교육감의 전횡에 맡겨진 시기였고 부교육감은 교육부 임명으로 관리관(서울) 및 이사관급에서 나가 포진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때 서울부교육감은 유해돈(괄호안 교육감 이준해) 부산 정순택(우명수) 대구 김홍원(김연철) 인천 김종석(유병세) 광주 김재연(안준) 대전 김상은(박경원) 경기 최만식(한 환) 강원 김용배(김병두) 충북 박동기(정인영) 충남 한상우(백승탁) 전북 안준태(임승래) 전남 이강렬(오영대) 경북 박치욱(김주현) 경남 박숙재(강신화) 제주 문채기(강정은)였다.

 

 

국회 교육위와 교개위 외풍

 

정치권의 외풍에서 진원인 국회 교육위원회 여·야의원과 교육부 위에 군림할 수준의 교육개혁위원회가 교육부장관에게 미친 영향은 유형 무형으로 중량급에 속했다.

 

김숙희 장관도 예외없이 국회와 교혁개혁위원회를 외면하기 어려워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였다.

 

당시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여·야의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이영권(민주당 전남 장흥) ▲민자당(여당)소속 간사 김인영(수원 권선구) 백남치(서울 노원갑) 송광호(충북 제천 단양) 최영환(전국구) 김중위(서울 강동을) 최재욱(대구 달서을) 구천서(전국구) 김호일(마산 합포) ▲민주당(야당)소속 간사 김원웅(대전 대덕구) 박석무(전남 무안) 홍기훈(전남 화순) 이협(전북 이리) ▲비교섭(무소속) 김동길(서울 강남갑)의원 등이었다.

 

다음은 교육개혁위원회 명단이다.

▲위원장 이석희(대우재단이사장) ▲부위원장 김윤태(서강대 교수) ▲상임위원 이명현(서울대교수·후에 김영삼 정부 제37대 교육부장관) ▲위원 곽병선(KEDI 컴퓨터교육연구센터소장·후에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 교육담당) 권숙일(서울대 교수) 김동진(유한공고 교장) 김신일(서울대 교수 ·후에 노무현 정부 제50대 부총리겸 교육부장관) 김춘강(대한어머니회장) 문상주(한국학원총연합회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박용상((주) 남흥교역 부사장) 백락원(안제대 총장) 신일철(고려대학원장) 이강혁(한국외대교수) 이강훈(경향신문사 주필) 이규범(거제전문대학장) 이기준(서울대 교수·후에 노무현 정부 제47대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이대근(성균관대 교수) 이돈희(서울대 교수후에 김대중 정부 제42대 교육부장관) 이상선(경기 성남동초교 교감) 이영희(인하대 법대학장) 이인호(서울대 교수) 정진위(연세대 부총장 원주캠퍼스) 조웅규(계명대 외국학대학장) 홍태표(전 전북교육감·한국지도자육성장학재단이사) ▲전문위원 최충옥(경기대 부교수) 김재웅(한국교육개발원책임연구원) 송기창(서울 북공고교사) 강인수(수원대 교육대학원장) 강충렬(서울행당초교 교사) 서정화(홍익대 교수) 윤건영(연세대 부교수) 이주호(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후에 이명박 정부 제51대 교육부제1차관 및 제53대 교육부장관) 이칭찬(강원대학교 교수) 정태용(대우학원 교수)등이다.

 

이처럼 당시 교육개혁위원과 전문위원 중 교육부장관자리에 오른 사람은 5명으로 김숙희 장관이 퇴임한 이후 재임했다.

 

 

장관의 신념과 환경의 영향

 

이미 앞에서 밝히고 전한대로 김숙희 교육부 장관의 토양에 관한 세평은 “학구적이고 사심이 없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터라 걱정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환경에서 정치권의 외풍이 우려될 소지였고 정책의 창구에 속한 자문세력 또한 한입으로 두말하기 십상인데다 기회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로 포진한 것에 주목이 따랐다.

 

이는 국회와 교육개혁위원회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면에서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었고 입증할 근거가 될 수 있도록 실명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으며 일부는 “내 노라”하는 자만과 매명에 익숙하고 승부욕도 강해 장관의 정책 결정과 이행에서 알게 모르게 작용하면서 역능환경을 잔존시킨 것에 단호하게 대처할 때마다 심증을 갖고 지켜보게 됐다.

 

어떤 날은 장관 비서실에 들러 낌새를 엿보면 오후 3시 전후해서 피로회복에 좋은 메론접시가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 때마다 장관의 뇌가 혹사당할 만큼 고심에 찬 것이 직감되었다.

 

특히 김 장관은 자택의 FAX에 들어온 교육 현장의 제언과 고충을 수용해서 문제의 본질을 풀어나갈 해법을 찾는 것으로 달라 보였다.

 

그래서인지 장관실 비서진에 학부모회장이면서 중·고생 자녀를 둔 어머니를 불러다 앉혀놓고 민원담당으로 장관의 의지를 대신해 주도록 일을 맡겼다.

 

또 일부 예술고교에서 대입전형과 관련된 민원을 제기했을 때 실제로 예고에 자녀를 입학시켜 재학 중인 부모의 마음으로 예능교육을 위한 해법을 모색, 대처했다.

 

그럼에도 여의치 못한 구석이 있었고 장학실의 윤 모 담당관(연구관)은 교육부를 떠난 일까지 겪었다.

 

때로는 의외의 돌발상황에 고심해야 할 경우 진솔한 자문과 조언에 목말랐고 그 때마다 교육부 출입기자 중 지나칠 만큼 직언이 체질인 혹평에도 마다하지 않고 독대했다.

 

역대 교육부장관 대부분이 이런 경우를 겪게 되는 것은 다반사였지만 정책과 행정의 본질을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우군이 되는 성원을 구할 기회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정책은 여유가 추진력이고 행정은 예산이 명령”이라며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보호막을 삼았고 버팀목이 되는 것은 행운이었다.

 

필자가 출입기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김숙희 장관은 행운을 누리는 측에 속했다.

 

장관실 방문객의 모습에서 제발로 찾아온 사람 보다 필요해서 보기를 원한 초청객이 대부분이었고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장시간 장관실에 머물다 간 방문객의 공통점은 쓴소리 보다 단소리에 능한 사람들이었고 때문에 “교활한 능변보다 정직한 눌변이 이롭다”는 말도 있었다.

 

 

전교조 선별 복직 바로 잡아

 

취임 후 열흘만에 1994년 1월 새해를 맞이한 김숙희 장관은 4일 시무식 뒤 정해숙 전교조 여성위원장에게 “점심 때 만나자”고 연락했다.

 

김 장관의 1994년 첫 일정이었고 장소는 장관실이 아닌, 이화여대에서 가까운 자신의 집 근처 식당이었다.

 

이날 만남에는 장관 쪽에서 친오빠인 김용준 고려대학교 교수와 박형규 목사가 함께 했고 전교조 정 위원장은 유상덕 수석부위원장이 동반 참석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