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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세금 잘 걷히고 교육재정 걱정없던 시기

세금 잘 걷히고 교육재정 걱정없던 시기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40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또한 생존한 전임 장관들의 자료제공에 도움받고 있으며 널리 읽혀지고 있다. 〈편집자〉…○

 

 

97년 교육부예산 16.8% 증액 18조원

양여금 증액교부금 등 긴축할 이유 없어

지방교육재정 9조3천억 8.1% 늘어

-교과서에 잘못 실린 신군부 12·12사태 ‘5·18광주’ 수정-

김영삼 정부 네번째 임명

3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1995. 12. 21~ 97. 8. 5 재임>

한번 요직은 훗날 기약 담보

 

<전호에서 계속>

이처럼 교육정책에서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따로 있었다.

 

대통령 직속인 교육개혁위원회(교개위)만 있지 않았고 교육부장관에게 자문과 조언을 주는 중앙교육심의회(중교심)도 있었다.

 

중교심의 기능과 역할은 교개위 보다 한 수 아래인 것 같았지만 당시 위원장은 청와대 교육수석 출신이 아니면 넘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어도 한번 요직은 훗날을 기약할 담보가 되었다. 때문인지 중앙교육심의회는 5공 때 청와대 교육수석인 신극범(교원대 교수)위원장이 재임했고 장학·편수, 고등교육, 지방교육, 과학기술교육, 교직, 평생교육 등을 망라한 6개 분과를 두었다.

 

각 분과위원장은 ▲장학·편수:임동권(서울양재고 교장) ▲고등교육:우종옥(교원대 총장) ▲지방교육:김신복(서울대 교수) ▲과학기술:김창식(국민대 교수) ▲교직:최희선(인천교대 총장) ▲평생교육:김난수 광주대총장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97년 예산 18조2876억 확보

 

안병영 장관이 확보한 1997년도 교육부 예산은 전년(96)도 보다 2조6천348억 원(16.8%) 증액된 18조2876억 원으로 걱정없이 쓸 만한 재정이었다.

 

또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9조2천6백8억5천4백만 원으로 96년 보다 6천9백31억9천200만원(8.1%) 증액 되었다.

이 가운데 봉급교부금 2조9천557억8천100만 원(10.5%), 경상교부금 6조1천250억7천300만 원(8%), 증액교부금 1천800억(19%) 원이었고 특별회계 중 지방교육양여금 5조2천717억6천600만 원(28.2%), 교육환경개선 7천억(75% 증액) 원이었다.

 

이를 2014년 및 2015년과 비교해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정은 사정이 좋은 편이었고 긴축운영 할 이유가 없었다. 1997년 1월8일 통계청은 우리나라 인구는 1월1일 현재 4천575만7천명으로 발표했다.

 

 

학력인정 학위취득에 도움

 

97년 1월13일엔 학력인정 등에 관한 법률(제5275호)이 제정되어 학력인정과 학위취득 기회가 확대되고 같은 날 한국교육방송원법(법률 제5273호)이 제정 공포되면서 교육방송기관이 발족했다.

 

그해 (97년) 3월18일 외무부는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외 1명이 한국에 망명하기 위해 제3국(필리핀)에 도착했다고 발표했다.

 

3월27일 한국직업능력개발원법(법률 제5315호)이 제정되어 인적자원개발 및 자격제도 등 후속조치를 서둘렀다.

안병영 장관은 96년 2월26일 초등영어교육발전자문위원회 규정을 교육부 훈령(제546호)으로 제정, 시행했다.

또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을 제13차 개정(대통령령 제15273호 97.2.21)해서 교과용도서의 범위를 확대하고 음반·영상저작물 등도 보완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범위에 포함했다.

 

그해 (97년) 3월부터 초등학교 3학년 영어교육을 정규 교과로 도입하여 가르쳤고 5월26일엔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 신군부의 12·12 및 5·18 광주항쟁에 대한 교과서의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게 되었다.

 

 

스승존경 저절로 우러나게

 

안병영 장관은 취임 첫 해인 1996년 3월이 되자 실·국장회의에서 “올해 스승의 날 행사는 좀 다르게 기념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으나 묵묵부답이었고 해마다 ‘스승의 날’ 행사를 치른 것 이상 묘책이 없었다.

 

이에 몇 날을 두고 장관 혼자 고심했던지 우연스럽게 필자와 만난 기회에 ‘스승의 날’ 얘기를 꺼냈다.

이 때 얘기는 필자만 듣지 않았고 다른 동료 기자도 있었던 터라 화두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대부분 ‘스승의 날’유래와 청소년적십자사 회원인 중·고생이 주도한 행사의 성격 등 5공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정부 제정 법정기념일이 된 정도의 경위에 그친 듯 했다.

 

이에 필자가 “장관님은 올해 스승의 날을 어떻게 맞이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안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생존하신 초·중·고 때 은사님을 찾아뵙고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릴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안 장관은 이 때 말한대로 서울 흑석동 중앙대학교 근처에 살고 계셨던 중학교 때 은사를 찾아뵙고 언론의 ‘스승의 날’ 특집보도 및 방송에 한몫 거들었다.

 

이어서 ‘스승의 날’에 할 일을 대답한 다음 필자에게 “기자님은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올해 스승의 날은 순직교원의 사혼(師魂)을 기릴 만한 실화를 소재로 교육방송이 엮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자 “그런 실화가 있으면 아는대로 말해달라”고 했다.

 

“있습니다. 찾아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소재”라고 전제한 뒤 “가까운 서울에서만 찾아도 초등학교의 청소시간에 교실 유리창을 닦고 있는 학생을 보고 담임 여교사가 깜짝 놀라면서 ‘내려 오너라 내가 닦으마’하고 창틀에 올라갔다가 추락해서 순직한 선생님이 계셨고 울릉도의 중학교사, 전북 고창의 초등학교 교사가 순직한 사례를 TV카메라에 담는 다면 ‘스승의 날’ 행사는 훨씬 달라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때 안 장관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킬 만큼 진지한 표정이면서 “기왕 풀어논 순직사도 얘기니까 더 좀 풀어노라”고 간청했다.

 

얘기는 다시 울릉도 교사의 순직에서부터 고창군 순직교사와 전주 공설운동장에 세워진 ‘순직교원추모탑’까지 계속되었다.

 

 

EBS·TV 순직교사 방영

 

그해(96년) 5월15일 ‘스승의 날’이 두 달도 안남은 때여서 울릉도 보다 전북 고창의 순직교사를 다루는 것이 방송제작에도 무리가 덜 할 것 같아 이에 비중을 두고 설명했다.

 

고창초등학교 김상신 총각 교사는 화창한 봄날 담임한 학생들을 인솔하고 학교 뒷산에 올라 정읍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기차를 바라보는 것으로 소풍계획을 세웠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고창읍내 학교는 기차를 보지 못했고 뒷산에 올라가 정읍을 거쳐 지나가는 모습이 언제 보아도 신나는 구경이었다.

 

소풍날은 간밤에 내린 비도 그쳐 산천이 한결 싱그럽게 보였고 학생들을 인솔해서 산에 오르는 행렬은 노래가 절로 나와 합창했다.

 

오솔길을 따라 일렬로 오를즈음 밤새 내린 빗물에 젖은 바위 하나가 무너져 굴러떨어지면서 학생들을 덮칠 위기였다.

깜짝 놀란 김상신 교사는 맨몸으로 뛰어나가 굴러내린 바위를 껴안고 쓰러진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신을 수습해서 학교 영안실에 안치하고 유족에게 연락했더니 정읍에 살고 있는 누나가 찾아왔다.

부모님도 여의고 두 남매 뿐이었는데 혈육을 잃은 누나는 눈물을 흘리며 바위를 껴안을 때 상처로 피에 젖은 옷을 안고 대성통곡했다.

 

이에 학생들과 학부모, 교직원 모두가 눈물바다로 애도했다.

 

장의절차가 의논된 뒤 누나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