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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시작과 결과가 달랐던 2008년 대입시제

시작과 결과가 달랐던 2008년 대입시제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89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연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수능 등급제 단 한번의 실험으로 흔들

대입전형 중심 축 수능회귀 요인 작용

수학문제 너무 쉽게 냈다가 낭패 초래

-MB정부 시행까지 3년여 교육부 대학 갈등 지속-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2008 대입시 성공 장치 고장

 

<전호에서 계속>

입학사정관제 또한 발표 이후 2년이 훨씬 지난 2007년 6월에 이르러 시행계획이 확정되는 등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교육발전협의회와 입학사정관제의 정착을 ‘2008 대입시’ 성공의 열쇠로 생각했던 안병영 장관으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두 제도가 제대로 기능했더라면, 지난 날의 몇 년 동안 특히 2005년 이후 전개된 ‘2008 대입시 파동’의 대부분은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내신의 실질비중과 논술, 그리고 ‘3불정책’ 등 주요 쟁점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빚어지고 대학에서 반발하거나 불복할 때 마다 교육부 장관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설득하거나, 아니면 “강력 제재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식으로 문제를 보고 접근했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위계적, 규제적 접근을 계속 시도하였으나, 정부의 구차한 모습만 드러냈을 뿐, 이의 약발은 별무 효과였다.

 

 

한차례 실험의 수능등급제

 

2007년 11월에 수능등급제가 처음 적용된 2008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되었고, 뒤이어 그 결과가 나왔다.

 

가장 우려했던 동점자 속출 등으로 빚어진 등급 공백 따위의 큰 부작용은 없었다.

 

등급별 분포 역시 표준비율에서 별로 어긋나지 않았다.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 등 네 영역 1등급은 644명(0.15%)이었고, 언어, 수학, 외국어 세 영역 1등급은 3747명(0.75%)이었다.

 

이 정도면 상위권 대학들이 그처럼 문제로 삼았던 변별력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언론에 크게 부각된 것이 수리 ‘가형’의 경우였다. 수능시험 후 안병영 장관은 시험을 관장했던 정강정교육과정평가원장을 만났다.

 

정 위원장은 “학생들이 워낙 수학을 어려워하고 번번이 문제가 어렵게 출제되었다고 해서 제가 출제위원들에게 수학문제를 쉽게 내 달라고 간절히 청을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가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쉽게 출제되어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으로 내려앉는가 하면, 2등급은 표준비율보다 3% 많았고, 3등급은 2.5%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변별력이 크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주류언론은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린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며, 수능등급제는 실패했다고 질타했다.

 

등급 경계선에 있는 학생들의 불만이 컸던 게 사실이고, 처음 도입했으니 진학지도의 어려움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수능등급제는 ‘학생부 비중 강화, 수능 비중 약화’를 전제로 도입한 방안이며 이른바 상위권 대학들은 학생부 비중을 높여 달라는 정부 지침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학생부 등급 간 점수간격을 좁혀 그 비중을 한껏 낮추는 대신 수능비중을 강화하여 수능이 당락 결정에 가장 중요한 전형요소로 작용케 했다.

그러자 안병영 장관은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지나치게 수능에 집착해서 그 비중을 높여 놓음으로써 ‘2008 대입 개선안’의 취지 자체를 무너뜨린 상위권 대학들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들 대학들은 대학자율성의 명분을 앞세워, 실제로는 ‘성적’ 우수자 뽑기 경쟁에만 급급한다고 몰아쳤다.

 

그러면서 교육부 및 정부 또한 책임의 큰 부분을 함께 짊어 져야 된다고 했다.

 

앞서 3년의 기간 동안 주요 교육주체와의 꾸준한 대화와 협의를 통하여 2008년 대입 개선안 미해결의 문제 중 특히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개선, 학생부 신뢰도 제고, 학생부 반영비중 조율 및 합의, 논술의 비중 및 출제 수위 조정 등 제반문제들을 하나씩 풀어 왔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미해결로 잔존하여 혼란이 가중되고, <내신-수능-논술> 3자가 합주하는 ‘죽음의 트라이 앵글’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며 ‘2008 대입제도 개선안’은 학생, 학부모, 대학 등 어느 이해관계자들로 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합의에 의한 문제해결은 ‘교육발전협의회’를 통한 사회협약 방법이었다는 것이며 이 협의체가 제대로 가동되었다면, 그 틀 안에서는 세칭 명문대학들도 이기적 욕구만을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었고 여기서 체결된 사회협약의 실천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교육부는 이 협의체를 사실상 무력화시켰고, 뒤늦게 2008년 대학입시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상투적 설득과 제재 엄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며 상황이 긴박해지자 서둘러 대통령까지 나섰으나 별로 소득이 없었다고 아쉬워 했다.

 

이는 주요 교육주체간의 불신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철저히 불신하는 등 대학과 고교, 교육부와 대학, 학부모와 교육부 모두가 상호 불신했던 거대한 장벽은 서로간의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새 제도의 연착륙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입학제도가 갖는 엄청난 영향력, 그 막강한 결정력 때문에 결국은 아무리 타당성이 높은 정책안도 그 시행과정에서 왜곡의 과정을 밟게 되는 불가피성으로 예거되고 있다.

 

2007년 12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정치 10년의 역사가 종언을 고하고 보수 이념을 표방하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해서 들어서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는 2008년 2월22일 당시 김도연 장관이 “수능등급제 보완을 위해 내년(2009)부터는 등급과 백분위, 표준점수를 함께 공개하겠다”고 방침을 확정, 발표했다.

 

이에 따라 수능시험의 변별력을 낮추고 대신 학생부의 비중을 높여 다양한 학생평가, 공교육정상화, 사교육비절감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도입했던 ‘수능등급제 실현’은 단 한 번의 실험으로 깨졌다는 것이다.

 

등급이라는 형태는 남았으나 대입전형의 중심축이 다시 수능 중심으로, 그리고 시험점수 중심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안병영 장관은 단, 한 번으로 끝날 실험을 위해 그 어렵고 고달픈 과정이 필요했나 싶었고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치솟는다고 회고했다.

 

 

시기별 주요 쟁점 갈등의 축

 

‘2008 대입 제도’의 형성으로부터 확정, 그리고 그 첫 시행과 변경까지의 정책과정을 복기(復碁)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특위출범부터 청와대 국정과제회의까지의 시기동안 교육혁신위와 교육부 간의 갈등이 중심축이었고 풀어야 할 주요 쟁정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시안이 발표된 이후, 대입개선안이 확정 발표되기까지의 시기에서 갈등의 축은 교육부와 청와대 그리고 대학 3자간의 관계로 바뀌고 주요 쟁점은 수능등급 및 1등급의 %로 압축되었다.

 

이 때 갈등은 주로 교육부와 청와대, 그리고 교육부와 대학 간에 빚어졌고 청와대와 대학 간의 갈등은 보다 간접적이고 잠재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별표 그림에서 점선으로 표시된 것과 같이 2004년 10월, 개선안이 공식 발표된 이후 2008년 MB정부의 정권인수위까지의 3년 여 기간 동안 정부와 대학 간의 갈등이 전경(前景)에 크게 부각되고 그 배후에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각각 ‘진영화(陣營化)하여 정부와 대학을 부추기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오래 전의 일이 아닌, 불과 9견 전이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