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전국교사회 ‘民主敎育法’ 제정 서둘러

4면

 

전국교사회 ‘民主敎育法’ 제정 서둘러

- 교과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62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과학기술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사학부조리 척결운동 공감대 힘입어

여당은 유보적 야당만 적극 호응

정치권 약속 받아냈으나 결과 달라져

- 徐장관 서울師大 제자들 법제정 추진에 할 말 잃어 -

28대 서명원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민주교육법 제정 추진

 

교육무용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충북교사협의회 창립식에서 축하공연으로 첫 선을 보인 뒤 전국의 교사협의회 행사장에서 초청이 쇄도하였으며 서울에서는 일반 공연으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성가를 자랑했다.

 

이때 충북교사협의회 활동은 도내 사범계열 학생회와 자연스럽게 연계되면서 충북대학교와 교원대학교의 교생실습등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회원 교사들과 학부과정 학생들의 토론회까지 갖게 됐다.

 

이처럼 나날이 다르게 발전한 충북교사협의회는 타 시·도 협의회와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비교학력고사와 보충수업, 인문영재고교 설립 등 현안에 반대성명으로 맞서 저항하고 도교육청에 항의 방문해 창립취지와 목적을 주지시켰다.

 

▲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전국적인 조직망과 호응이 큰 현장교사의 가입이 늘면서 시·도·시·군 교사회까지 결성이 끝나기를 기다려 가칭 ’민주교육법‘ 제정을 본격 추진했다.

 

이에 호소력이 강했던 ‘사학 부조리 척결운동’은 어떤 활동보다 국민공감대 형성에 성공했고 일부 악덕사학의 재단측에서 교사 채용에 금품이 오간 것을 교사회에 가입한 사립교사들이 스스로 밝혀 진상을 공개하면서 채용 때 건넨 돈을 되돌려 주는 사태로 진전했다.

 

또 ‘민주교육법’ 제정을 위해 정치권에 직접 찾아가 여·야당을 막론하고 찬성과 의결 약속까지 받아 냈으나 시기적으로 그 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때여서 여당은 검토형식의 반응이었고 야당은 적극 호응으로 엇갈렸다.

이에 교사협의회는 전국적인 가두 서명을 받아 ‘민주교육법’제정이 성사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 1987년 12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적인 가두 홍보에 나선 교사협의회는 휘몰아친 설한풍과 눈보라를 맞으며 길거리에 나서 서명운동을 벌였고 지나가는 행인들도 언 손을 불면서 서명지에 이름과 싸인을 해주었다.

 

그 때 정치권은 “민주교육법을 제정해서 전국에 번진 교사협의회 요구를 수용하자” 는 야당의 호응과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으니 지켜보자”고 신중했던 여당의 대처로 대조적이었다.

 

이 와중에 서명원 문교부장관은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누가 당선 되든 1988년 2월 새 정부가 들어서게 마련이고 장관자리가 계속 보장 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관망하는 것 이상 견지할 방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장관이 되기 전 자신이 서울사대에서 직접 가르쳐 내보낸 제자들이 교단에서 민주교육법 제정을 요구한 것도 법제정 취지와 목적이 가르쳤던 것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더욱 할 말을 잃었다.

 

1노 3김의 대선정국

▲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 투표에 앞서 1노 3김의 대결양상은 야권의 분열로 신군부의 연장선상이던 노태우 여당후보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모습이었다.

 

특히 대통령 선거운동기간 야3당의 김대중·김영삼 후보는 전국교사협의회가 요구한 ‘민주교육법’제정을 공약으로 다짐했고 김종필 후보만 검토수준의 유보로 대처했다.

 

이에 노태우 후보는 관심도 없었고 배려할 여지도 없이 부정적이어서 교사협의회에 가담한 교사들은 “이러다가 3김이 다 낙선되는 비운을 맞게 되면 우린 어찌하느냐”면서 우려했다.

 

결국 노 후보의 당선으로 교사협의회는 새로운 고비를 맞게 될 걱정에 직면하면서 기대했던 대선이 3김 중 2김(김대중·김영삼)밖에 의지할 데가 없음에 한탄했다.

 

대통령 선거 정국을 예의 주시한 서명원 문교장관도 새해(1988년)가 되면 2개월도 안될 재임기간에 연연할 것 없이 관망자세였고 새 정부의 문교장관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떠날 채비 이상 서두를 일이 없었다.

 

어떤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도 그에 따라 달라질 것도 없이 떠날 처지였으므로 좀 더 일찍 장관자리에 왔더라면 교원정책에 속한 전국교사회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볼 여유라도 있었을 것에 아쉬움이 따랐다.

 

교사회를 주도한 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에게 영향받았을 것에 생각이 미치면 교육자가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리만치 허망한 것도 깨닫게 되었다.

 

▲ 1987년 12월 16일 오후 6시에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지켜본 유권자의 밤샘 관심은 그 때나 지금(2012년 12월 19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 날 전국의 유권자 2587만 명 중 2306만 명이 투표해서 89.2%로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개표가 시작되면서 서울은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선두를 다툰 집계에 주목을 끌었고 당선자였던 노태우 후보는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으나 김종필 후보는 한참 뒤에 따라오는 모습이었다.

 

지방의 개표에서는 광주광역시의 경우 김대중 후보가 90% 이상으로 2012년 12월 19일 대선의 문재인 후보 득표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날(1987. 12. 16) 밤 10시쯤 되자 드러난 개표상황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순으로 1등(노태우)과 2등(김영삼)의 표 차이가 50만표 가량 벌어졌다.

 

이날 밤 개표상황을 지켜봤던 노태우 당선자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리 내외는 하늘에 다시 한번 감사드렸다”면서 “우리, 내일을 위해 일찍 잡시다”하고 부인(김옥숙)에게 말한 뒤 침실에 들어가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이렇게 푹 자고 나서 보니 새벽 5시였는데 부인은 이미 일어나 자리에 없었고 TV를 켜보니 자신의 당선은 이미 확정적이었으며 인기척에 부인이 방으로 들어오자 가볍게 포옹을 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노태우 당선자는 역사와 국가가 무겁게 다가온 듯 엄습했고 조상님과 전두환 대통령 등 선거 때 함께 뛰었던 수많은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후보에 대한 느낌도 함께 왔다고 했다.

 

모두들 선전했다고 생각하니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는 것.

 

순간 여러 곳에서 전화가 걸려오고 이들 중 몇 곳에는 직접 전화를 걸어 감사를 표했는데 마침 곁에 아들 제헌군과 딸 소영양이 와 있었기에 손을 맞잡고 반겼다고 회고했다.

 

밤을 세운 개표에서 아무런 사고가 없어서 다행이었고 노 후보의 득표는 828만2738표를 얻어 유효투표의 36.6% 차지했다.

 

차점인 김영삼 후보는 28%, 3위인 김대중 27%, 4위 김종필 8.1% 순으로 개표가 끝났다.

 

당선 인사차 들러야 할 청와대 방문은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직접 노 당선자의 집으로 찾아온 바람에 대체했고 그간의 배려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영에 성묘하기 위해 고향(대구)에 내려갔다.

 

대구에서도 시민들이 당선 축하행사를 마련했는데 시합창단에서 노 당선자가 중학생 때 즐겨 부르던 곡들을 불러주어 중학생으로 되돌아간 기분으로 힘차게 함께 따라 불렀다고 한다.

 

노 당선자는 성묘하는 데 꼬박 하루를 보냈다. 조부모님 묘소에서부터 아버지, 장인어른 순으로 성묘하면서 산소들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보여 송구했고 아버지 묘소가 더욱 그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