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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초등부터 ‘週5日制授業’ 첫 시범지정


초등부터 ‘週5日制授業’ 첫 시범지정

-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과부 43년 출입기자의 추적(제110회) -

○… 본고는 금년 5월 15일로 교과부 출입기자 43년을 넘기고 44년째가 될 본지 김병옥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에 기고했던 … ○○…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한 것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서울 5곳 부산 3개교 실험운영

- 아직 “놀토와 쉴토 이르다” 거부감 -

게으른 정부 전공무원 확대실시

1980. 5.22∼83.10.14 재임〉

▲1982년 2월 16일… 문교부는 교육사상 처음으로 전국 8개 초등학교에서 ‘주5일제 수업’을 시범 운영키로 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은 목동초등학교 등 5개교를 지정했고 부산시교육청은 봉래초등학교 등 3개교를 지정했다.

시행은 그해 3월부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시범운영한 결과에 따라 주5일제 수업이 점진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정부는 이 조치의 결과에 힘을 얻어 전공무원 ‘주5일제 근무’를 추진했다.

그 이후 주5일제 근무는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전면 시행되었고 주5일제 수업은 아직도 부분시행으로 둘째주와 넷째주 토요일만 허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과부와 시·도, 시·군·구 지역 교육청은 주5일근무로 휴무하니까 놀토와 쉴토라는 말까지 생겼다.

“학교가 쉬지 않는데 교육청·교과부가 쉬는 것은 엇박자”라는 비난이 따르고 “노무현 정부는 게으른 정권”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아직 우리는 선진국도 아니고 나라의 빚이 많아 놀토와 쉴토는 이르다고 거부감이다.

교원인사에서도 변화가 따랐다.

우선 서울시교육청은 인사급지에서 ‘가’급과 ‘나’급을 폐지했다.

당시의 인사급지는 아파트 부자촌과 가난한 동네를 구분하는 것으로 학구의 빈부에 따라 정해진 것처럼 인식되어 세평이 좋지 않았다.

반면 대구시교육청은 그해 3월 1일자 학년초 인사에서 초·중등 교원 가운데 사립에서 7명을 공립학교에 임명한 것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전북에서 설인수 교육감이 사립중등의 홍태표 교감을 공립학교에 임명하여 교장이 된 다음 도교육청 중등과장으로 기용한 것이 단초가 되었다.

설 교육감은 문교부 일반직(국장급)출신이며 교육감으로 임명된 뒤 첫 교원인사에서 유능한 사립교원을 공립학교에 전입시킨 것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와 같이 공립에 전입된 홍 교감은 학무국장을 거쳐 전북도교육감이 되었으며 그가 행한 교원인사의 쇄신에서 초·중등 교감·교장 자격연수 대상자 및 승진서열 명부를 작성해 공개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공개한 서열명부는 모든 학교의 교무실에 비치해서 누구든지 열람이 가능하도록 하면서 인사청탁을 배제할 구실로 이용했다.

또 교육전문직의 승진도 현장서열에 따르도록 해서 인사때마다 잡음이 된 소지를 해소한 것은 용단이었다.

이처럼 승진서열명부의 공개는 전국화되어 한동안 보편화되는 듯 싶더니 언제인지 모르게 소멸되어 지금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지속되고 있으며 특히 전문직은 서열명부에 넣지 않고 비공개로 승진된 것이 관행화 되고 있다.

이렇듯 1982년 2월 16일은 교육사상 교원인사의 획기적 방안이 창출된 계기가 된 것이다.

▲2월 18일 문교부는 신설된 경기공업개방대학 정원을 확정, 총 2680명 선발토록 하여 그해 4월부터 개강했다.

개방대학은 평생교육측면에서 최초 설립된 것으로 이에 힘입어 근로자의 대학교육 기회가 열린 것이다.

같은 날 정부는 전공무원의 임용에서 군경력을 호봉에 반영한데 이어 연금까지 적용했다.

이날은 또 문교부가 학교 독서생활화 방안을 학력평가에 반영하도록 전국 시·도교육청에 시달했다.

이것을 계기로 모든 학교의 독서실이 정비되고 학교규모에 따라 도서관을 설치하게 되는 등 사서교사를 배치하거나 윤리과목 담당교사 또는 나이가 많은 여교사를 지도주임으로 임명해서 학생들의 독서교육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2월 20일 문교부는 대학졸업생이 취업할 때 교수추천제를 적용토록 하면서 각 대학에 추천서 양식과 모델을 예시해 시달했다.

당시 교수 추천서는 국영기업의 경우 채용에서 절대조건이 되게 했으며 재벌기업도 이를 준수토록 하여 대학생의 시위를 막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2월 22일 문교부는 각 경제단체와 기업에 전문대학졸업자를 최우선 채용하도록 권고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것이 주효해서 전문대 출신의 사회진출에 교두보가 되는 등 최초로 전문대학 위상이 확립되는 시대를 열게 되었다.

▲2월 23일 정부는 1982년 교원 정원을 7100명 증원키로 하고 국무회의에서 의결 확정했다.

교육사상 교원이 한 해 7천명 넘게 늘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교육선언 사건’에 앞장섰던 전남대학교 송기숙 교수의 파면 취소청구소송 상고심에서 기각판결했다.

이처럼 교원이 7천명 늘었어도 단 한사람 민주화투쟁 교수를 살려내지 못한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은 비교될 수 없게 컸다.

▲2월 24일 문교부는 초·중·고교의 소풍과 수학여행은 학교장 재량으로 실시하도록 지침서를 작성하여 전국에 시달했다.

특히 초등학교의 소풍은 봄철에서 여름으로 접어들 시기의 4월과 5월초에 실시했으나 학교장이 결정하기 어려워 소속 교육청의 사전 허가를 필요로 했다.

이때 지역교육청은 소풍실시계획을 10일전 7일까지 사전 서면으로 제출토록 했으며 이에 따라 학교장들은 소풍날짜를 정할 때 음력 초 3일의 초승달 뜨는 모습을 보고 결정했다.

초승달이 서쪽 하늘에 참빗처럼 뜨면서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누은 모습이면 그달 보름전까지는 가물고 맑은 날이 대부분이므로 첫 주의 토요일을 선호했고 조각배를 띄우듯이 발딱 누운 모습이면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안 좋을 징후로 알고 소풍은 뒤로 미루기 일쑤였다.

이를 두고 ‘초승달을 보면 사흘 천기(기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지금에도 변함없이 농어촌사람들의 기상관측에 이용되고 있으며 거의 정확하다.

이날 내무부는 민방위 교육훈련을 46세로 단축하고 그 이상은 면제했다.

각급학교의 교원은 학생 수업을 위해 민방위 훈련 때 교내상황으로 대체했으므로 해당되지 않았다.

▲2월 25일 문교부는 ‘학교 자율화’ 시책으로 행정보고서를 대폭 줄이도록 예규로 정해 시달했다.

이것은 소풍·수학여행 자율화에 이은 조치로 왕복문서가 첫 대상이었다.

왕복은 시달한 문서의 보고를 포함한 것으로 이 가운데 시달만 하고 결과는 보고를 받지 않도록 규제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교육청 등 전국의 시·도교육청은 공문서 감축 및 간소화 계획을 수립하고 각종보고서 104종 가운데 98건을 폐지해서 6종으로 줄이는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그랬으나 학교자율은 그 뒤 위축되어 공문서가 늘어나고 26년이 지난 2008년 4월 15일 이명박 정부에 의해 ‘4·15 학교자율’정책이 반복되는 등 되풀이하고 있다.

▲3월 2일 문교부는 개편된 교육과정에 따라 초·중·고교의 교과서 49책을 새로 편찬했다.

이에 따라 모든 학교의 교사 가운데 70% 이상 국가관 확립 등 이념교육을 받도록 의무화 했다.

이념교육 미이수자는 승진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했으므로 교사들은 차출에 앞을 다퉈 자원했다.

▲3월 3일 6년동안 서울대병원에서 식물인간이 되어 투병중이던 전 유기춘 문교장관이 사망했다.

유 전 장관은 1974년 9월 18일 민관식 전 장관의 후임으로 제21대 문교장관이 되어 재직 중 1976년 12월 3일 집무실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급히 서울대병원에 옮겨 응급조치 했으나 의식을 잃고 누운채로 투병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해외 전공관에 엄명하여 “명약을 구해 보내라”고 재촉해 좋다는 약은 모두 써 봤으나 효험이 없었다.

유 장관은 전남대 총장에서 장관으로 임명된 후 유신정권의 가장 뛰어난 충성심에 주목받았다.

심지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섬기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짐한 것이 보도되면서 ‘둔마(鈍馬)’라는 별명이 따랐지만 본인은 오히려 “노예처럼 자신을 낮추고 충성하겠다는 뜻의 ‘견마지로’에 자부한다”면서 과잉에 도취했다.

당시 문교부에는 유 장관과 동향으로 흉허물없이 지낸 친구가 있었다.

바로 편수관실 체육담당 이영택 편수관이었다.

그는 귀가 따갑게 들리는 말들을 참기 어려워 양주병을 들고 유 장관 집으로 찾아갔다.

“친구야! 요즘 안좋은 소리가 많더라”고 하자 “미움을 받은 만큼 신임이 비례한다네. 걱정하지 마쇼”라고 대답했다.

이에 이 편수관은 “사람이 말릴 때 듣지 않으면 사람의 힘으로 구할 수 없다”고 마지막 충고를 남긴 것이 후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우정어린 충고처럼 백약을 써도 듣지 않는 식물인간으로 서울대병원에서 6년간 누워있다가 사람의 힘으로 구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른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