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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평화가 깃든 요람의 행복과 글로벌 교육

평화가 깃든 요람의 행복과 글로벌 교육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72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특별 전재한다. 또한 생존한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경쟁력 없는 대학 지원 말리기 어렵고

교육자치 정착에 혼신의 힘 쏟다 지쳐

남북한 화해무드 급진전 수용에 한계

-유학가던 날 아버지가 담아 준 흙 한줌의 나라사랑-

김대중 정부 6번째 임명

43대 한완상 교육부장관

<2001. 1. 29~ 2002. 1. 29 재임>

교육보다 교육부가 더 난제

 

<전호에서 계속 이음>

2001년 7월 초의 어느날 한완상 장관은 대전에 내려가 충남도교육청과 대전시교육청을 순시했다.

그 해 1월29일 취임하고 5개월을 보낸 뒤 교육청에 찾아갔고 수행에김평수 보통교육국장이 따라나섰다.

한 장관은 교육부에서 보낸 시간보다 밖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고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출입기자 중 누구와도 따로 만나는 일이 없었고 자신의 행동반경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더욱 경계했다.

그러면서 취임 때 교육부 간부들에게 당부한 사항의 이행여부를 체크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대학에 관한 사항에서 남모를 고충이 컸고 부내에서 누구와도 심중을 털어놓고 의논하기 어려운 것에 “교육보다 교육부가 더 어렵다”면서 난제인 것을 현안으로 꼽았다.

 

이와 같은 속내는 7월 초의 대전·충남지역 순시 때 우연스럽게 합류한 것으로 확인될 수 있었다.

그 때 대전시교육감실에서 점심 후 가볍게 차 한잔 나누는 자리에 필자도 동석할 수 있었고 흉허물 없이 몇마디 묻고 듣게된 기회에 느껴진 것에서 알 수 있었다.

 

“장관님 취임 후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이 지났는데 교육부 실상에 아직 어둡다는 후문을 듣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묻자 “장관이 교육을 하기 보다 교육부를 끌고 가는 일이 더 어렵다”고 대답한 것으로 심경을 털어놨다.

 

이에 “부총리 승격과 동시에 장관으로 임명한 대통령(김대중)의 당부가 아직도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 암닭의 졸탁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냐고 되묻자 “알 속의 병아리가 깰 때가 된 것을 어미닭이 알아차리고 껍질을 쪼아서 쉽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좀 여의치 않다”고 했다.

 

특히 “경쟁력 없는 대학까지 국민의 혈세로 지원하는 것을 말리셨던 대통령의 말씀이 귓전에 다시 들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면서 “대학과 교육부의 관계가 종적인지 횡적인지 가늠해 보기 어렵다”고 난색을 보인것이다.

 

더이상 듣지 않고도 짐작해보기 어렵지 않는 것이 교육부 간부와 장관의 차이점인 것은 그 때나 지금에도 다르지 않지만 기자의 감각으로는 ‘대학과 교육부의 일부 간부들과 유착관계’로 알아듣기 십상이었다.

 

 

고향집 마당의 흙 한줌 일화

 

한완상 장관의 재임기간 교육부 목표는 “글로벌 시대의 지구촌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학생에게 역량을 키워주는 것”으로 집약하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정보화(컴퓨터)교육과 외국어 교육 강화 및 대학의 경쟁력 강화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한 장관은 정보화 교육과 외국어 교육은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도농에 구애없이 활성화 되는 것에 반해 대학을 이끄는 것은 힘이 드는 실정에 고뇌가 따른다고 호소했다.

 

이미 국정의 흐름은 남북한의 화해무드가 급진전했고 ‘평화’가 국시이듯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장관은 자신이 미국에 유학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 아버지가 고향집 마당의 꽃밭(화단)에서 손삽으로 흙 한줌을 떠오더니 손수건에 싸주면서 “완상아! 이 흙 한줌이 미국에 가면 바로 조국이 되는 것이란다. 부디 잊지말고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명심하라”고 당부했던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인용해서 강조했다.

 

또 “평화가 곧 행복의 샘터”라고 강조했으며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그 흙 한줌과 함께 보낸 것으로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 때 한 장관이 강조했던 ‘평화와 글로벌 교육’이 지금의 ‘행복교육과 융합교육과정’에서 어떻게 다른 것인지 난해하다.

 

 

시도교위 선출 교육감 폐해

 

지금 교육감은 시·도의 지자체선거와 동시 선출로 직선되어 계속되고 있지만 한완상 장관이 재임했을 때의 시·도교육감은 당해 시·도교위에서 교육위원들이 간접 선출한 것으로 달랐다.

 

때문에 어떤 곳의 교육감은 당해 시·도교위의 위원이면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역임한 경력에 힘입어 교육감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영향력이 배가 되었다.

 

또 서울은 예외지만 대부분 교육청은 관사를 두고 있으므로 교육감 선거에서 당선되면 살던 집은 세를 놓고 옮겨간 것으로 재산증식의 일환이 되는 등 교육감 사저에 전세로 들어간 사람 가운데 특정지역은 환락가에 인접한 것을 이용, 청소년 출입제한 구역인 윤락업종으로 성업해서 말썽이 되기도 했다.

 

이 때 전세금이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고액이었고 이에 미련을 버리기 어려운 교육감은 비난을 감수하면서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한완상 장관의 눈에 가시가 되었다.

 

이러한 부담의 정도는 장관으로서 당해 지역의 교육청을 순시할 기회가 되었을 때 지나쳐버린 것으로 피해가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런 교육감을 만나 현황을 보고받는 것은 더욱 난감한 것에 기피하는 것으로 방편을 삼았지만 지역의 교원과 학생 학부모에게 누를 끼치게 되는 것에 마음이 더욱 편치않았다.

 

그래서 장관실에 들어서면 대학이 난제이고 시·도교육청을 돌아보자니 교위에서 선출한 교육감 중 마땅치 않은 처사에 난감하기 일쑤였다.

 

교육부 간부는 직업관료로서 만만찮은 상대였고 시·도교육감은 선출직에 4년 임기가 보장된 차관급 정무직이어서 임명직 정무직 장관의 마음대로 들었다 놓기가 어려웠다.

 

이를 교육부 출입기자로 지켜본 당시의 정황과 실정에 비추어 평화가 국정의 핵심이었던 김대중 정부의 교육부장관 중 한완상 교육부총리는 가시밭길을 걷다가 떠난 것으로 인식되게 마련이다.

 

 

소리없이 흘렀던 깊은 물길

 

당시 한완상 장관의 재임기간 1년은 소리없이 흐른 강물의 깊은 물길처럼 민주화에 역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총력을 경주한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의문이 따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교육부 직원들은 역대 장관 중 누구도 주지 않은 안정감을 누린 것에 친화력이 형성되고 정책과 행정의 두 축이 마찰될 수 없게 평온했음이다.

 

이를 두고 기자실에서 반응한 대화 중에도 “두개의 직선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과 다르게 하나의 곡선으로 늘 만나고 이어지는 것에 비유된다”고 했다.

 

이렇듯 한완상 장관의 이미지는 너무도 조용했고 정적을 느낄 만큼 교육정책에서 소용돌이가 용납되지 않은 시기로 평가되었다.

 

농악에서 꽹꽈리가 징보다 클 수 없는 대신 소리가 요란한 것으로 여흥이 되듯, 보다 멀리 메아리친 징소리의 여운처럼 업적주의를 멀리한 것으로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추억처럼 기억되고 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