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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화요일 취임 목요일 떠난 3일 장관 비화

화요일 취임 목요일 떠난 3일 장관 비화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8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대학총장 때 판공비 과다 사외이사 물의

학부모 교원단체 “임명철회” 요구 빗발

가족까지 들먹 교육계 수장 도덕성 매질

 

-청와대 “재고 거부”에 “물러날 뜻 없다”더니 굽혀-

 

노무현 참여정부 세번째

47대 이기준 교육부장관

 

<2005. 1. 5~ 2005. 1. 7 재임>

 

화공학 권위 서울대 총장 출신

 

2005년 1월5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47대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으로 서울대 총장 출신 이기준(당시 67세) 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을 임명, 취임했다.


이 장관의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1938년 7월28일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사대부고 졸업 후 서울대 공대 화공학(1961)과와 대학원 석사학위(1964)를 받은 뒤 미국에 유학, 미시간대 대학원 화학공학과를수료(1971)했으며 워싱턴대(시애틀교)에서 화학공학박사학위(1971)를 받았다. 그 이후 국내의 금속연료종합연구소 연구위원(1963~65)에서 서울대 공대 화공학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거쳐 공과대학장 등 서울대 총장(1998~2002)을 역임했다.


또 입각하기 전에 이미 문교부 교육정책심의회 전문위원과 국무총리실 정책심의회 연구위원을 비롯해 경제기획원 정책자문위원과 대통령 자문 교육개혁위원(1994) 등 화공학 분야의 권위자로 손색이 없었다.

 


최단명에 참담하기 그지없어


그러나 부총리 겸직의 교육부장관직은 취임 3일 만에 경질된 것으로 불명예가 되었다.

정확하게 2005년 1월5일 화요일에 들어왔다 3일 만인 1월7일 목요일에 떠났다.

그래서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을 남겼다.


당시 언론보도는 ‘年初 2번 바꾼 敎育長官’ 제하에 “잦은 경질 위상 훼손, 상식 밖 후유증 심각” 등 “국민기대 역행”으로 매섭게 비판했다.


이기준 장관의 임명은 전임 안병영 장관이 이임식을 마치고 떠난 4일 오후 발표되었고 뒷날(5일) 오전 임명장을 받고 취임했다.


이에 앞서 임명이 발표되기 무섭게 한국교총과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등 시민단체의 “철회 요구”가 빗발쳤다.


서울대 총장 재임 때 있었던 “판공비 과다 사용과 1998년 LG화학의 사외이사, 가족까지 들먹이며 교육계 수장으로써 지녀야 할 도덕성에 흠집이 크다”고 지탄했다.


특히 취임식(5일 오전)이 끝난 뒤에는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에서 “즉각 퇴진하라”고 강요하는 등 질타의 매질에 강도가 따랐다.


이 때 노무현 대통령은 “임명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기준 장관도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힌다”고 강경했다.


청와대 교문수석비서관을 비롯해서 인사담당 수석 등이 보인 반응에서도 “재고의 여지가 없다”고 식칼로 무 자르듯 거침이 없었다.


반면, 국민여론은 매스컴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 우려를 쏟아냈다.


그를(이기준) 기용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전임(안병영)장관을 1년 만에 바꾸면서 “희생양” 운운으로 가슴에 못을 박았고 후임은 “대학의 산업화 기수로 추켜 세울 만큼 과찬하는 등 대조적인 것이 무색하게 되었다”고 혹평했다.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3월7일 취임 때 정권출범 동반자로 윤덕홍 첫 장관을 임명하면서 자신의 임기와 “같이 하겠다” 고 밝혔지만 그 해 12월23일 경질했고 2003년 3월8일 임명한 첫 서범석 교육부 차관도 2004년 7월19일 바꾼 것을 예시하며 “장관 자리를 놓고 밝힌 대통령의 말은 믿기 어렵다”고 했다.

 

 


역순리 바람과 구름으로 비유


이밖에도 교육부 장관과 차관을 자주 바꾼 것에 바람과 구름으로 비유한 풍자가 공공연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뺨에 닿지 않으면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것을 알아보기 어렵고 구름은 흘러가는 것이 보이므로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고 했다.


또한 “바람따라 흐르는 구름을 보고도 어디서 불어오느냐? 고 묻는 다면 그야말로 우문”이라고 민심을 빌어 힐난했다.


그리고 “국민정서에 반하는 교육장관의 임명인지 아닌지는 민심에 물어 알아차리”라고 일갈했다.


이는 “임명철회 요구에서 출근저지와 퇴진운동이 예고되는 먹구름을 보고도 딴전을 피운 늑장대처가 후회를 자초했다”고 채찍을 든 셈이다.

 


말릴 때 들어야 구제하기 쉬워


노무현 대통령이 이기준 장관을 임명하기 전에 검증과정에서 재고를 요청한 주위의 권유가 있었으나 청와대 수석 등 심복과 측근이 적극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것이 3일 단명 장관을 낳게한 결과라는 등 후문이 따랐다.

이를 두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때 임명한 제21대 유기춘 장관의 경우를 예로 들기도 했다.


유 장관은 1974년 9월18일 유신 와중에 전남대 총장에서 임명되어 1976년 12월3일 집무실 의자에 뇌일혈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2년여 치료에도 깨어나지 못한 채 식물인간으로 운명했다.


그는 장관 취임 때부터 임명권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듣고 반길 얘기가 아니면 누구의 조언이나 충고에도 귀를 열지 않았다.


이에 언론이 앞장서서 ‘둔마장관’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고 경질되도록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해 이영택 평수관 등 가까운 친구 몇 사람이 양주병을 들고 집으로 찾아가 우정어린 충고로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자 첫 마디에 “미움받은 만큼 좋아하시고 격려해주실 분이 계시니 걱정말라”고 응수했다.

결국 친구들도 더이상 할 말을 잃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해준 말이 “사람이 말릴 때 듣지 않으면 사람의 힘으로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얼마 뒤 그는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눕혀놓고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공관장 모두에게 “명약을 구해 보내라”고 엄명해서 써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사람(친구들)이 말릴 때 듣지 않은 결과가 사람의 힘(의술)으로 구할 수 없음을 보게된 교훈이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회자가 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대입시의 다양한 선발과 보장


이기준 장관은 비록 3일 만에 떠났으나 취임사에 담아 강조했던 정책과 시정방향은 대학입시의 다양한 선발과 보장을 다짐한 것에서 선견지명이었다.


대학입시는 “대학에서 내신이든 수능이든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한다면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교육발전은 공정한 경쟁과 평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 교육은 너무 경직된 것이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지금처럼 정부와 대학의 갈등이 확대된다면 해법은 나오기 어렵다”고 걱정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