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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6공 마지막 장관 취임 “스승존경” 당부

6공 마지막 장관 취임 “스승존경” 당부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9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시험지 하나도 “간수못한 교육부”자탄

대통령의 “교육정책 기조에 충실” 다짐

소감 묻자 “축하받을 기분 아니다” 단호

-노태우 대통령이 회고록에 담아 기린 초등학교 은사-

32대 조완규 교육부장관

<1992. 1. 23~ 93. 2. 25 재임>

6공 교육 마감 끝자리 지켜

 

1992년 1월23일 이른 아침, 각 TV 의 첫 뉴스는 제32대 교육부장관으로 조완규 서울대 교수가 임명된 것을 알렸다.

조 장관은 오전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뒤 교육부에 도착, 장관실로 가고 있었다.

 

이 때 출입기자들이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며 소감을 묻기 바빴다.

 

조 장관은 “난 이 정부의 막내 교육장관”이라며 “전임 장관님들이 일궈온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진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대통령의 교육정책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학생·교원·학부모가 믿고 따라 주는 장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어려운 때에 입각하셨는데 남다른 소감이 있을 것 같아 한마디만 듣고 싶다”고 묻자 “난 지금 축하받을 기분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전날 떠난 윤형섭 장관의 일을 떠올렸다.

 

드디어 취임식장에 들어선 조완규 장관은 첫마디에서 “우리(교육부)는 국민과 학생들 앞에 부끄러운 줄 알고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이 고비를 넘기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며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지 하나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장관을 잃고도 감히 교육을 입에 담을 수 있겠느냐”고 거듭 탄식하며 질타했다.

 

취임식장 분위기는 쥐죽은 듯 얼어붙고 교육부 직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취임식이 끝난 뒤 전임 장관들이 그랬듯이 기자실에 들른 조 장관은 몇마디 환담 중에 “대통령께서는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을 잊지 못해 청와대에 초청하시고 계속 가르치심에 따른 것에 감명받았다”면서 “스승 존경의 본보기”라고 꼽았다.

 

대통령의 스승존경에 감명

 

노태우 대통령이 그토록 못잊어했던 초등학교의 은사 중 한사람은 일본인 교사로 ‘사토 선생님’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上권 1033~6페이지)에서 대구 팔공산에 있었던 공산초등학교 시절과 그 때 가르쳐주신 사토 선생님을 다음과 같이 기리고 회고했다.

 

산골초등학교 오간 30리길

 

내가(노태우) 태어나고 2년 반이 지나 동생 재우가 출생했다.

그리고 3년 뒤에 막내를 났으나 디프테리아로 잃고 말았다.

 

우리 형제는 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가족이나 이웃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아비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어릴 때는 몸이 아주 약한 편이었다.

이질·장티푸스·말라리아 등 온갖 전염병을 다 앓고 죽을 고비도 몇 차례나 넘겼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모든 정성을 다해 나를 살리려 애썼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적마다 목이 멘다.

 

나는 몸은 약해도 학교는 열심히 잘 다녔다.

어릴 때는 막내고모가 험한 길을 업어다 주곤 했는데 시오리(6km)나 되는 팔공산 산길은 멀고도 험했다.

매일 왕복 30리(12km) 길을 걸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귀해 배가 무척 고팠다.

여름에는 산길 가에 열린 머루·다래·돌배 등을 따먹거나 도라지·소나무껍질 등을 벗겨 먹었다.

하지만 겨울에는 먹을 것이 없어 솔잎을 씹을 정도였다.

다시 봄이 되면 온 산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꽃을 따서 먹곤 했는데 입술이 검붉게 물든 것을 보고 어머니가 야단을 치시곤 했다.

 

그 시절 산에서 진달래나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우리끼리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아마도 배고픔을 달래는 소리였을 것이다.

이쪽에서 “꽃 줄까, 송기(소나무 속껍질) 줄까”하고 외치면 저 건너편 산에서도 “꽃 줄까, 송기 줄까”하고 똑같이 외치는 것이었다.

사토 선생님 이래서 못잊어

내가 다닌 학교는 공산(公山)초등학교로, 1945년 봄에 졸업했다.

내가 졸업생 19회니까 꽤 오래된 학교였다.

입학해서부터 우리말은 하지 못하게 했으므로 서투른 일본말을 배워야 했다.

교직원은 교장을 비롯해 절반가량이 일본인이었고 나머지는 한국인 선생이었던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사토 아키라(佐藤彰) 라는 일본인 선생이다.

그 분은 다른 일본인 교사들과 달리 민족차별을 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란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식민정책이었을 뿐, 실제로는 한국과 일본인 사이에 엄연한 차별이 있었다.

사토 선생만은 진심으로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해 주셨다.

사토 선생은 교수법이 특별했다.

학생들이 의미를 알면서 공부를 하게 하고,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면 반드시 상(賞)을 주었다.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상은 선생님으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어찌나 재미있게 하시는지 졸다가도 이야기가 시작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었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동화들을 들려주셨다.

나는 그 이야기들에 이끌려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무를 해다 판 돈으로 책을 사보곤 했다.

5학년 때부터는 책읽기에 본격적으로 맛을 들였는데 제일 처음 읽은 책으로는 일본 협객 모리노 이시마츠(森の石松)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스승의 날 청와대 은사 초청

 

나는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88년 5월 ‘스승의 날’ 다음 날에 일본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시에 사시던 사토 선생 내외를 청와대에 초청해 사제(師弟)간의 회포를 풀었다.

오찬을 하면서 두 시간 가까이 함께 있었다.

사토 선생은 줄곧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사토 선생은 일본에 돌아가 그날의 만남을 《문예춘추》(文藝春秋) 1988년 7월호에 소개했다.

참된 사제애(師弟愛)는 국경(國境)을 초월했다.

 

일제 때 초등학교 교육 회고

 

나의 어린 시절, 즉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리의 역사·문화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어 과목이, 있었지만 그마저 2학년 때부터는 없어졌다.

순진무구한 어린 머리에 일본의 역사·문화만 주입시키니 그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조선은 미개하고 가난하므로 우리가 보호자로 나서 개화시키고 개발시켜 일본과 똑같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뿌리가 같은 민족이니까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며 이른바 ’내선일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역사·문화·언어를 하나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폈다.

 

나이어린 우리는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는데 왜곡된 역사마저 진실인 양 배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교육칙어(勅語)’ 같은 것은 초등학교 2~3학년 이상이면 전부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식 교육을 그렇게 철저하게 받아도 뿌리가 다른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탈무드》를 통해 민족 정통성을 확고하게 유지해 왔듯이 우리도 저녁이면 집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역사와 문화,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