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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육과정 손질 교과서 조정 후유증 자초

교육과정 손질 교과서 조정 후유증 자초

 

- 교과부 47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59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과학기술부 출입기자 47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5공정권 미화 위한 학계의 좌담회’

신군부 5공의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에서 승리할 것으로 확신하고 6공에 의한 미화가 더욱 확산되도록 학계의 우호적인 교수들을 불러 좌담회를 가졌다. 사진 앞면 우측부터 당시 동국대 M교수, 한양대 K교수, 서울대 G교수와 김모 국회 문공위 민정당 비례대표 의원.<5공 교육분야 업적평가 좌담회 모습.>

5공 초중반의 교육정책 말기에 퇴적

정권연장 노린 16년 만의 대통령 직선

학자적 양심과 시대적 소명으로 고뇌

 

- 전두환 대통령 직속 교개혁위원장 전력 부담 -

28대 서명원 문교장관

<1987. 7. 14~ 88. 2. 24 재임>

<전호에서 계속>

 

 

5공 찬미 장·차관 압박

▲1987년 6월 29일 5공 정부의 집권여당인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이 주도한 ‘6·29선언’으로 정치권은 그 해 12월 대선준비에 바빴고 노 대표 또한 선언의 당사자이면서 대선 후보로 나설 것을 밝힌 상황에서 입각한 서명원·김상준 문교부 장·차관의 입지는 5공찬양 지지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찬미가 핵심인 이들의 의도는 제5공화국의 업적 선양이 목표였고 교육계도 예외없이 대선 후 신군부세력의 핵심이었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확신에서 누구도 막을 수 없게 기세등등했다.

 

특히 노태우 후보의 처조카인 박철원 안기부장 특보를 주축으로 ‘월계수회’가 조직되면서 교육계의 친여인사들이 속속 가입했고 그 세력은 전국 어느 곳도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듯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앞당겨지는 듯 하면서도 신군부의 직선제 대통령에 의해 군부독재가 연장될 시도에 선량한 교육자들은 “봄은 봄이지만 아직 이른 봄으로 얼어 죽기 십상(不似春)”이라며 입을 다문 채 사태를 주시했다.

 

이 때 5공 찬미세력의 첫 작업은 ‘제5공화국의 요록’에 전두환 정권의 업적을 집대성한 것으로 본격화 됐다.

 

또한 이에 압축해서 담은 교육분야에 대한 학자들의 논평은 교육계를 대표한 것으로 누구도 이의가 없었고 의문을 제기할 상황도 아니어서 거칠 것이 없었다.

 

때문에 서명원·김상준 장·차관은 이들이 하는 일에 불편이 없도록 도와야 하는 동조 이상의 책무감으로 1987년 후반은 바쁘게 지나갔다.

 

이 과정에서 서 장관의 고민은 5공정부의 초·중반에서 마련한 초·중·고교의 교육과정 및 교과서 조정이 빚어낸 후유증이었다.

 

시작은 5공 집권 초기와 중반이지만 말기에 이르러 심화되고 퇴적해서 교육현장을 제압한 상태여서 12월 대선 결과에 따라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 저항없이 이어지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다른 사태를 예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신군부는 16년 만에 부활시킨 대통령 직선제에서 승리할 것에 목적을 둔 6·29선언이어서 문교부 장·차관은 전형적인 교육자로 학자적 양심과 시대적 소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서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이 역점을 둔 교육개혁심의회 위원장으로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교과서 편찬에 반영하는 조정작업에서 무관할 수 없었고 당시 교육계는 이를 지켜보다 장관이 되자 그 날부터 주시했다.

 

그래서 5공 정부가 정비하고 조정한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자주·창조·도덕적인 한국인을 육성할 수 있도록 한다’고 못을 박았고 이를 기본 방향으로 3개 항목을 설정해서 옥죄었다.

 

그 첫째는 국가관을 공고히 하는 학교교육의 지속적 추구여서 민주화를 바라는 교육계의 여망과 거리가 먼 항목이다.

두 번째는 21세기 지식정보사회를 선도할 창의적 두뇌 양성이다.

세 번째 항목은 자유민주사회를 성숙시킬 자율적 관리능력 배양으로 신자유주의 못자리였다.

이를 위해 교과서 정책의 전환과 교육과정 운영 방향을 틀도록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 때 획일화된 교과용 도서의 편찬을 개방정책에 맞춰 전환토록 했고 경쟁에 의한 자료의 질 개선과 다양화를 도모해서 교사가 교육과정 운영의 전문가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장치했다.

이 장치에 묶어 각급 학교의 학력평가체제를 확립할 수 있도록 서두른 것이 지금은 학업성취도 평가로 진화했다.

 

▲1987년 7월 14일 임명되어 취임한 서명원 문교장관은 한달도 되기 전 언론의 채찍에 당황했다.

대표적인 것은 K신문의 87년 8월 13일자 사설이다. 이 신문의 사설은 제목부터 ‘국민윤리교육의 현실과 교수의 자세’로 질타성이었다.

 

사설 첫 머리에 ‘국민윤리라 함은 단순히 국민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규범만이 아니라 국가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대못을 쳤다.

 

사설은 또 ‘국민윤리교육도 이러한 국민정신, 즉 다시 말해서 국가의 안전과 발전은 물론, 민족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할 가치관과 신념, 현실인식과 실천의지 등 일깨워 주는 교육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고 했다.

 

이어서 ‘남북간의 체제대립이 불가피한 현실에서 우리가 공산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확고 부동한 이념무장을 하기 위해서도 국민윤리교육이 갖는 중요성은 지대한 것’이라면서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을 이룩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국민윤리교육’이라고 강조했다.

 

사설은 도입부분에 이어 전개에서 ‘지난달 일부 극소수의 좌경학생들로 소요를 면치 못했던 몇 몇대학의 경우를 상기할 때 지금까지 국민윤리교과서에 포함된 공산주의 비판은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소견’이라는 등 신랄했다.

 

아울러 ‘대학에서 이데올로기 비판교육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대학의 윤리교육과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도덕교육은 새로운 차원에서 내용과 방법이 혁신되어야 하고 반공교육과 이념교육을 도덕과 국민윤리교과의 일부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옳겠느냐?”고 반문한 것으로 압박했다.

 

사설은 결론에서 ‘국민윤리교육은 오늘과 내일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될 가치관 교육이고 승공통일에 대비한 사상적 무장을 위한 국민정신교육으로 이어져서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한 것으로 매듭지었다.

 

서 장관은 이날 공보관이 스크랩해서 올린 이 사설을 읽고 “오금이 저리도록 공포를 느꼈다”고 후일담이어서 짐작해 보기 어렵지 않다.

 

▲1987년 후반에 접어든 때에 한 언론사가 마련한 전두환 5공 정권의 교육분야 업적평가 좌담회에서 김모 당시 국회 문공위원회 의원은 ‘제5공화국은 출범 초기에 교육혁신을 국정지표로 내세우고 과감한 투자를 통해 교육의 외과적 치유에 힘을 쏟았고 그래서 업적이 나타났다’면서 과외부조리 척결, 사회교육법 제정으로 평생교육이 구체화 되고 개방대학과 방송통신대학, 산업체 부설학교 등이 개설되었으며 유아교육 진흥과 중학교까지 초등 의무화가 연장된 것을 예찬했다.

 

김 의원은 “대학교수의 연구비가 86년 1백억 원에서 87년은 130억 원으로 늘었고 대학생 18%가 장학금을 받는 등 12%는 학자금 융자를 받았으며 과학기술교육도 과학고교를 신설하여 영재교육을 실시하고 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는 수준까지 왔다”면서 “러시아문호 도스트예프스키는 작품 ‘악령’을 통해 볼셰비키혁명사조에서 파생된 인간상실과 모든 것을 투쟁화·계급화·집단화시킨 당시 소련사회의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