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국감 때 장관모습 집권층 눈밖으로 밀려

국감 때 장관모습 집권층 눈밖으로 밀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6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원정보부 부인않고 야당돕나?”

윗선의 장관 색갈 검증에 관운 막장

여당의원 눈길 곱지않아 불안한 예고

- 차관이 장관보다 바빠지는 분위기에서 알아차려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당시 박석무의원 증언

<전호에서 계속>

 

‘교원정보부’에서 동향감시를 했던 교사들은 참담한 우리 교육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된 민주교육을 갈구하고 있었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고, 교육이 바로서지 못하면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는 교사들이다.

 

문교부와 교원정보부 노릇을 하고 있는 관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가를 뼈저리게 반성했어야 한다.

특히 전담반 책임자 박 모 장학관은 교직경력이 많은 분이어서 그 직책을 맡았다고 했으니 더욱 그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88년 10월 국정감사를 계기로 그동안 공화당정권 때부터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해묵은 갖가지 문제들이 잇따라 폭로되었다.

 

삼청교육대 문제·일해재단 문제·새세대육영회 비리·우리마당 테러사건 등등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어느 하나 책임감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모습들을 본 적이 없다.

 

88서울올림픽을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외국인들 보호는 철저히 해서 사고하나 없이 끝낸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어었으나, 장기수 탈주사건이 일어나 막상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치안질서는 엉망이 되고 있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끝인지,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느낌이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했고 교직은 성직이라고 했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교육은 어느 때에나 정상화될 것인지, 교육을 보는 문교관리들의 시각은 언제나 정상화 될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

 

하루빨리 교원정보부를 해체하고 신뢰받는 공정한 문교행정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었다.

 

그 해(1988. 10. 5) 문교부 국정감사가 불러온 후유증은 밖에서는 연일 문교부 질타가 잇따르고 안에서는 청와대의 눈길이 곱지않은 것에 겹쳐 내부에서 조차 간부들의 김영식 장관에 대한 시선이 차갑고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었다.

 

국감 당일 정보기관의 청와대 보고에서 “교원정보부를 들춘 야 3당의 삼총사(이철·박석무·강삼재의원)는 물론, 정대철 국회문공위원장까지 장관(김영식)을 두둔한 모습이었고 그만큼 차관(장병규)의 입지가 흔들렸다”고 적시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또 이를 입증한 것으로 “이철·박석무의원 등이 교원정보부를 장관도 모르게 운영했다고 매도하면서 질타했고 ‘장관도 모르는 청와대 보고’라는 표현이 공공연했다는 것은 국감에 제보한 배후를 짐작케 한다”고 몰아부쳤다.

 

이에 집권여당의 배수진과 보수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국감이후 개각이 따를 경우 김영식 문교장관의 경질이 점쳐지는 등 어수선했다.

 

특히 국감장에서 쾌도난마처럼 교원정보부를 파헤친 이철의원 등은 국민정신교육의 핵심에 칼을 겨눈 것으로 5공의 신군부를 이어받은 6공 노태우 정권에게 김영식 문교장관의 불신감을 부채질하는데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 국정감사를 함께 했던 여당의원들도 야당이 신이 났던 것 이상으로 배신감이 드는 등 그냥 물러서기 어려워 대안을 찾는데 부심했다.

 

이에 김영식 문교장관의 국감에 임하는 태도는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비쳐졌고 직선 대통령인 노태우 정권의 출발이 허약하고 호락호락하게 비쳐질 수 없음에 의기상통했다.

 

이로 인해 문교부장관실은 찾는 사람이 줄었고 국감 때 질타의 대상이었던 교원정보부 관계관과 국민정신교육담당 장학관의 입지는 윗선에서 더욱 신망이 두터워지는 것을 장관도 모르지 않았다.

 

이 무렵 문교부출입기자들도 정치권의 여·야를 닮은 듯 보·혁갈등의 기운이 심각하게 드러났고 아세곡필과 정론이 맞부딛치는 것을 조·석간 신문의 보도 기사는 물론 방송뉴스에서 확인해 보기 어렵지 않았다.

 

하루는 김영식 장관을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고 기회에 심경을 묻자 “문교부 국감을 교원정보부가 받았다면 나는 더 무서운 사람들로부터 국무위원(장관) 자질을 검증받고 있다”면서 “관운인 걸 어찌하겠느냐”고 한숨이었다.

 

이렇게 1988년 10월이 가고 11월에 들어서자 계절도 가을로 접어들어 설악산 단풍 뉴스가 TV를 통해 전해지면서 개각설이 나돌고 국회 일정에 따라 새해(1989) 정부예산안의 심의가 소관 상위의 의결을 소수의견으로 달아 예결위에 넘기자 부별심의가 본격화 되었다.

 

국감은 새해 예산안 부수법안과 전년의 결산심의자료를 얻기 위해 실시되는 것으로 인식된 마당에 정부도 국감뒤에 예산안 심의 대비가 현안이었던 만큼 소관 상위에 이은 예결위 심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문교부도 차관을 중심으로 국회예결위 심사에 대처하는 일 이상 긴급한 것이 없었고 이를 위해 어떤 것도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관실은 바빠지고 장관실은 한가해지는 상반된 분위기였고 국회에서 예산안 처리가 끝나기 무섭게 정국은 연말 개각에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국무위원은 연말 개각이 홍역처럼 무서운 시류병이었고 6공 정부의 첫 문교각료가 맞게 되는 1988년 12월은 이미 추풍낙엽처럼 엄동이 머지않은 것을 예고했다.

 

 

당찬 서울사대 출신 입각설

 

당시 김영식 문교장관이 서울사대 교수 출신이면서 한국교육개발원장에서 입각한 사실이 떠올려지더니 드디어는 “당찬 서울사대교수출신 입각을 기대하게 된다”는 루머가 보수성향 관변학자들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때만 해도 ‘당찬 사람’은 월남한 실향민을 뜻했고 강인한 의지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상징성이었다.

 

이로 미루어 김영식 장관은 제주도 출신으로 전형적인 학자타입이었고 출세가도에서 경쟁할 상대를 만나면 조우하는 것 조차 피할 만큼 심성이 고와서 경쟁력은 제로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문교장관 후임으로 같은 서울사대 교수 출신이 거명되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성격상 ‘물태우’라는 별칭에도 반응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개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오판한 측도 있었다.

 

그러면서 국감 때 있었던 사안을 이유로 문교장관을 바꾸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같은 서울사대 출신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침에 “옳다”고 해놓고 저녁에 실세에서 “아니다”라고 하면 즉각 “그렇다”고 뒤집어 합리화 하는데 이골이 난 어용성향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교육각료는 이런 타입을 요구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사기에 충분했다.

 

집권층의 실세를 찾는 관변학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친관변학자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문교부에도 미묘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