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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대통령 교육정책 기조가 장관 발목잡아

대통령 교육정책 기조가 장관 발목잡아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0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전환기 따른 교육민주화 열기에 찬물

새롭게 헤아려 볼 잣대에서 거울

전교조 불법화 조치 소신 흔들고 영향

-멀지도 않은 21년 전 대통령 회고록에서 드러나-

32대 조완규 교육부장관

<1992. 1. 23~ 93. 2. 25 재임>

 

일제 때 초등학생이 대통령

 

<전호에서 계속> 6공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말 임명한 조완규 교육부장관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의 교육정책기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그 노 대통령은 일제 말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의 봄에 6년을 배우고 졸업했었다.

6학년 동기생 105명 가운데 중학교 진학은 4명 뿐이었다고 한다.

 

모두 가난했고 4명 가운데 한 사람인 노 대통령은 막내 숙부가 학비를 대주어 가능했다.

 

또 초등학교 6학년 동안 저녁이면 할아버지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선조들에 대한 인물사를 배웠고 “우리 문화와 역사가 일본 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때문에 일본 교육을 받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우리는 다르구나. 달라야지 ‘언젠가는 우리 것을 찾아야지’하는 생각을 키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쿠데타 이후 폐지된 국회 민의원(하원)·참의원(상원) 선거 등 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까지 말살했던 신군부(전두환 대통령)의 끝머리에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을 되살려 당선되어 취임했고 6공 정부를 이끈 것에 비추어 초등학생 때 ‘언젠가는 우리 것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그 ‘우리 것(민주화)’을 되새겨 볼 수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생이 직선대통령의 부활로 국정을 펼쳤던 ‘교육정책의 기조’는 6공 마지막 교육부장관(조완규)도 “충실하겠다”고 다짐한 것에 비추어 새삼 그 때를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의 6공 교육정책은 헌정회복 등 민주화를 되찾은 것에 노 대통령 스스로 ‘전환기의 교육정책’으로 표현(회고록 下권 1080~87페이지)할 만큼 민주화에 무게를 두었다.

 

당시 조완규 교육부장관의 시책도 이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다만 ①개인의 존엄성 강조 ②중학교 무상의무 교육 ③전교조와 민중교육론 불법화 가운데 ③의 불법화는 그 이후 교육부장관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때문에 누구보다 노태우 대통령의 회고에서 진의를 거듭 확인할 필요가 있어 회고록 원문을 그대로 옮겨 6공 정부 교육정책의 진수를 헤아려 보는 거울과 잣대로 삼는다.

 

 

6공 정부의 교육정책 핵심

 

▲개인의 존엄성 강조

 

교육에 대한 나(노태우)의 철학이나 의지는 역대 대통령들, 그리고 대한민국 어떤 부모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래사회와 통일시대를 대비하고, 첨단과학기술 분야를 강화하고, 교육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는 등 교육 본래의 정책은 과거 정권에서와 마찬가지였다.

 

6공화국의 교육정책은 6·29선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의 국가관 교육과 함께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틀이 잡혔다.

 

나는 먼저 교원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조치들을 잇따라 취했다.

 

대학에 자율권을 부여해 국·공립대 총·학장 후보자의 선출권과 교수임용권 등을 대학에 위임하고 사립대 총장 및 승인에는 정부가 개입하지 말도록 했다.

 

등록금 입시제도 등에 대한 대학의 자율권을 대폭 확대했다.

 

이는 “대학 자율화 및 교육자치제를 조속히 실현한다”는 6·29선언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취임한 지 며칠 안 된 1988년 3월 4일 교육부(장관 김영식)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목포대학 등 4개 대학 후임 학장 임명안이 올라왔다.

 

나는 “국·공립대 총·학장은 해당 대학에서 추천한 인사를 제청하라”며 반려했다.

 

과거처럼 정부가 대학 책임자 인사까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육부 관계자들은 ‘전에 없는 일’이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전교조(全敎組)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한편으로 학원 행정엔 전례없는 자율을 보장했다.

 

이에 따라 1988년부터 대학총장 직선제(直選制)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총장을 학교 자율로 선임하라고 한 것은 꼭 직선제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대학들이 너무 앞서갔다.

 

선거가 민주주의라는 도식(圖式)에 사로잡힌 것이다.

 

대학이 독립적인 인사권을 확보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빠르게 변화하다보니 학내 파벌이 조성되고 교수·학생 간에 갈등을 빚는 등 직선제의 부작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5·16 이후 중단이 되었던 지방교육자치제를 30년 만에 부활시켰는데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학생들의 소요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학 본연의 면학(勉學)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1990년에 개설한 교육방송은 국민들에게 평생교육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면서 교양·사회교육 매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나는 특히 교육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꾀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대통령 직속으로 ‘교육정책자문회의’를 두었다.

 

1989년 2월에 발족한 이 자문회의는 여섯 차례에 걸쳐 독학(獨學)에 의한 학위(學位) 인정, 남북통일에 대비한 교육 등의 정책 개선 방안을 건의해 왔는데, 나는 그 대부분을 채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가운데 독학(獨學)에 의한 학위 취득은 내가 전부터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을 자문회의에서 연구해 올린 것이다.

 

나는 1988년 12월 당정(黨政)회의에서 “대학에 다니지 않고도 독학에 의해 대학졸업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조기에 시행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이는 능력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대학에 다녀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일부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나는 통신과 교육방송을 활용하면 교육기관에서 수업받는 것 못지않게 학업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믿어 과감하게 추진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개방대와 방송통신대학, 사회교육 시설 등을 확충해 ‘평생교육’의 개념을 정착시키는 데 나름대로 힘을 쏟았다.

 

교육정책자문회의를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9년 6월 나는 자문회의석상에서 ‘교육환경 개선 특별회계’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매년 3700억 원씩 총 1조11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전국 각 학교의 환경과 시설이 대폭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듣고 있다.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

 

학교에서 컴퓨터 교육은 -물론 전부터 일부 실업계 학교에서는 하고 있었지만-6공화국에서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보화시대가 급진전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학교 차원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범정부적으로 학교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1989년 7월 학교 컴퓨터 교육 지원·추진 계획을 발표했는데 막대한 예산을 조달하기가 쉽지 않아 초등학교에 대해서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는 교사들의 수도 날로 늘어났다.

 

“이제는 선생 노릇 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는 예비교사들의 푸념이 내 임기 중에 나오는 일이 생겼다.

 

국립사범계 대학을 나오면 자동적으로 교사자격증을 받아 정년때까지 교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우선 임용 조항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교사 공개임용고사제를 앞당겨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명감이 투철하고 실력이 우수한 교사들을 양성·임용하는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각급 학교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통하던 학교장 임기제를 실시한 것도-당사자들에게는 불만의 대상이 되었지만-학교행정을 민주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조치였다고 믿는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