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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생소한 대안학교 법제화 운영 지원 앞장

생소한 대안학교 법제화 운영 지원 앞장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5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해마다 쏟아져 나온 중고탈락 8만 명

계절형 방과후프로그램으로 희망키워

공교육과 달랐던 형태지만 육성의지

 

-2004년 12월 23일 교육부 홈페이지에 서한 남겨-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갈 곳 없는 중고생 대안교육

 

다음은 2004년 12월 23일 안병영 장관이 교육인적자원부 홈페이지에 ‘부총리 서한’으로 실었던 ‘대안학교 이야기’의 원문이다.


‘이야기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영산성지학교를 방문한 것이 그해 6월이었던가요.

전남 영광읍에서 학교를 찾아가는 길 양쪽으로 펼쳐지던 담배밭, 고추밭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소년원에서 금방 출소하여 여전히 보호감호를 받고 있던 아이들,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 가출하여 길가를 배회하던 아이들, 귀고리에다 노랑머리를 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었지요.


제도권 교육에서는 도저히 포용하기 어려운 이 아이들,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부터 저는 이들에 대한 또 한 번의 교육적 배려가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잠시 쉬었다 다시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간이역’ 같은 것.

그런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고뇌는 교육부가 1997년 초 발표한 ‘교육복지 종합대책’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해마다 중고등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7, 8만 명에 이르는 중도탈락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의 설립운영 방안, 바로 그것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대안교육’이니 ‘대안학교’니 하는 말들은 우리 모두에게 생소했던 때였습니다.

일부 시골 지역,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서 공교육과 전혀 다른 형태의 교육을 하는 움직임들이 있다는 정도였습니다.


기억에 새롭습니다만, 학교 모양을 갖춘 대안학교로는 홍성의 ‘풀무학교’ 영광의 ‘영산성지학교’ 그리고 지금의 간디학교 전신인 산청의 ‘숲속마을 작은학교’ 정도였고, 대부분이 계절형 또는 방과 후 프로그램이나 공동육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변산의 ‘공동체마을’이나 안산의 ‘들꽃피는 마을’은 우리 공교육과 전혀 접점을 찾지 못할 정도의 극단적인 탈학교 형태를 띠고 있었지요.


하여튼 전국을 다 뒤져도 20여 곳이 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우리 교육학계에서조차도 미국에서는 70년대 붐을 이루었다가 작금은 한물간 연구주제가 되어버린 대안교육에 관한 연구가 전무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불모지 60억 보조 불씨 지펴


그 와중에, 2004년 7월로 접어들어 ‘대안학교의 법제화와 60억의 재정지원’이라는 후속조치를 발표했으니, 대안교육 관계자들마저 반신반의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정신없이 앞서나간 교육부의 정책을 유사 이래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영산성지학교의 곽진영 교감 선생님, 숲속마을 작은학교의 양희규 교장 선생님, 들꽃피는 마을의 김현수 목사님, 두레마을의 김진홍 목사님, 그리고 푸른꿈학교 설립을 준비하시던 김창수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당시 우리나라 대안교육운동을 이끌던 재야 운동가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교육부의 대안학교 설립 허용과 재정지원 방침에 일제히 환호하며 동참 의사를 표명했을 때, 저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자그마한 기쁨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공교육 안으로부터 저항도 만만찮았습니다.


대안(alternative)이란 그 무엇을 대체한다는 것인데 공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말에 탐탁하게 생각할 리 없었겠지요.


공립학교로 지원될 교육예산이 대안학교로 흘러들어 가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교육부 안에서부터 들려왔습니다.


대부분의 정서는 “대안학교가 무슨 학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학교 설립인가권을 가지고 있는 교육청 공무원들의 냉소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제가 1997년 8월 5일(김영삼 정부) 장관직을 그만두고 다시 대학 강단으로 돌아가고 나서의 일이었지요.

그해 10월, 대안학교 설립을 허용하는 법이 마침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에 따라 이듬해 개교를 신청한 14개의 대안학교에 대하여, 인가 마감시한인 97년 12월이 다 가도록 “인가해 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교육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교육부와 달리 교육청 반발


여기서 제가 들은 얘기 몇 마디 해야겠습니다.

교육청 공무원들이 법 집행을 주저하는 상황에서, 저의 뜻에 공감한 교육부의 젊은 관료들은 제가 떠난 후에도 대안학교 챙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무원들이 대거 지방출장 가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IMF 직후였다지요.

해외연수 차 김포공항에 집결했던 교사들마저 집으로 되돌아 가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교육부 관료들은 감사원 감사를 받으면서까지 당시의 16개 시·도교육청 담당 공무원들을 데리고 영산성지학교와 간디학교로 내려갔습니다.


눈이 펄펄 내리던 12월 말, 두 곳의 대안학교에서 현장연수가 이루어졌답니다.

곽진영 선생님이 나서고 양희규 선생님이 나서, “공교육에서 소외받은 우리네 아이들을 지원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그들의 작전이 맞아 떨어졌던 것일까요.

교육청 공무원들은 감동을 받았고, 12월 29일 전남교육청이 영산성지학교를, 12월 30일 경남교육청이 산청 간디학교를 인가했다는 낭보가 교육부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6개의 대안학교가 1998년 3월에 개교하게 되었지요.


청원의 양업고등학교와 경주의 화랑고등학교는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부지를 물색하던 끝에 가까스로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대안학교들이 양적으로는 인가받은 학교만 24개에 이르고, 질적으로도 다양하게 성장했습니다. 저는 대학 강단으로 되돌아와서도 제가 불씨를 지핀 대안학교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