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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전교협과 민중교육 “不法化 措置” 엄명

전교협과 민중교육 “不法化 措置” 엄명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5회) -

○… 본고는 이달 16일이 되면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되는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노태우 대통령 첫 문교장관에게 불호령

주도교사 서울사대 출신 장관 제자들

차관 임명 때 교육비서관 통해 극비통고

- 무크지 ‘민중교육’ 불티나게 팔리자 검거선풍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함께 걷는 民主主義 다짐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국민과 함께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저는 국민을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끌려 다니는 대통령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꿈과 아픔을 같이 하는 국민의 동행자, 이것이 제가 진실로 추구하는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함께 걷는 민주주의’의 출발선 상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오늘 영광스러운 이 단상의 주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씩씩하게 그리고 단란하게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나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 ‘희망의 나라로…’가 그리는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 가득한 나라’를 향하여 함께 나아갑시다.

 

국민 여러분!

저와 함께 전진해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1988년 2월 25일 대통령 노태우>

 

전교협과 민중교육론 대처

▲1988년 3월 5일 그해 2월 25일 노태우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임명된 김영식 문교부장관은 5공의 마지막 김상준 문교차관의 후임 때문에 고심하게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차관 임명은 장관의 의중이나 제청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전부처의 차관인사가 이런 것도 아니어서 대통령이 임명한 뒤 취임하면 장관은 보좌를 받는 것 이상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장관 취임 후 9일 만인 3월 5일자로 문교부 기획관리실장 출신 장병규 차관이 임명되었다.

이날 장 차관은 취임식 전 장관실에서 김 장관과 첫 찻잔을 들면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기 무섭게 교육비서관을 통해 세 가지 당부를 전달받았다고 보고했다.

 

이에 김 장관은 “대통령께서 취임사에 담으신 것 말고 다른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 차관은 “3개항인데…”하면서 말끝을 잇지 못하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1항은 개인의 존엄성 교육이고, 2항은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 추진입니다. 그리고 3항은 전교협과 민중교육론 대처 및 불법화 조치입니다.”

 

대답을 듣고 난 김영식 장관은 가슴이 답답하고 눈이 흐려지는 중압감에 숨이 막혔다고 한다.

 

전교협은 ‘전국교사협의회’ 약칭으로 1987년 광주에서 YMCA교사회를 조직해 서울의 YWCA교사회와 합친 뒤 민교협으로 거듭나면서 새롭게 결성되어 가입교사가 10만 명을 헤아렸고 특히 서울에서는 당시 이수호 신일고교 교사가 이끈 것으로 1989년 5월 31일 출범한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었다.

 

김영식 문교장관은 바로 이들과 싸워야 할 주적이 되는 셈이었고 이에 가입해서 활동을 주도한 교사 대부분이 서울사대 출신으로 직접 가르쳐 전국에 내보낸 제자들과 대치하게 되는 처지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는 어느 대목에도 없었던 것이 차관을 임명하면서 교육수석비서관을 통해 내린 불호령이므로 진퇴양난이었다.

 

차관을 통해 엄명한 형식의 3개항 통고 중 마지막 3항에서 당황한 것은 장관일 뿐, 문교부 내부에서는 이미 준비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장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통고된 사황은 차관을 중심으로 실천에 옮기게 되었으며 대통령이 엄명한 ‘대처 및 불법화 조치‘의 이행 여하에 따라 장관의 역량이 평가되면 개각할 기회에 경질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민중교육’은 1985년 5월, 실천문학사에서 잡지처럼 엮어 발행한 무크지였다.

 

단행본 형식으로 그 내용은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하에서는 추호도 용납될 수 없었고 그래서인지 단행본 이름도 ‘민중교육’이었다.

 

모든 출판사에 대한 당국의 감시가 삼엄한 때라 서울에서 편집하지 못하고 전남 광주시내 모처에서 엮어낸 것으로 신선했다.

 

특히 ‘민중교육’ 제목 밑에 1이라는 숫자를 붙여 속간을 예고한 것에 경찰과 정보기관의 신경이 곤두섰다.

내용 중 필자들은 ‘5월 詩’ 동인이었던 김진경·윤재철·고광헌 등 현직 중·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충청지역의 교사문인 모임이었던 ‘삶의 문학’ 동인들도 합세하고 강병철 교사가 ‘비늘 눈’이라는 소설을 실었고 안면중학교 교사였던 조재도가 ‘무엇으로 가르칠 것인가’ 등 4편의 저항시에 당국이 긴장했다.

 

이밖에도 송대헌 교사가 ‘야학일지’를 썼고 황재학, 전인순 교사 등은 학생들이 쓴 글을 모아 교육현장의 비리와 불합리를 고발했다.

 

놀라운 것은 영동중학교 민병순 교장이 쓴 ‘교단일지’를 보고 문교부 관료들과 시·도교육청의 일부 교육감, 장학관, 장학사들이 발끈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처럼 부정기 간행물인 지하서적 ‘민중교육’은 시중 서점에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렸고 입소문을 타고 교사들이 사가는 바람에 중·고생들도 덩달아 책방에 몰렸다.

 

5월에 나온 ‘민중교육’은 6월이 되면서 절판되었고 학부모들까지 이 책을 구해 보기 위해 서점에 몰리면서 신군부 정권에 위협을 주는 수준으로 휘몰아쳤다.

 

▲1988년 6월 25일 당시 김재규 서울여의도고등학교 교장은 “민중교육은 불온한 지하서적”이라면서 서울시교육청에 찾아가 학무국장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학무국장은 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전교협 감시담당 장학사를 불러 “집필한 교사 중 서울지역 학교에 재직한 교사의 인적사항을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김 교장이 주고 간 ‘민중교육’은 서울시교육청에 출입한 중앙정보부 조정관에게 “내용을 검토해 달라”고 의뢰했다.

 

이 일이 있은 바로 다음날부터 민중교육지에 기고했거나 특집 좌담회에 참석한 교사들에게 검거선풍이 불어 닥쳤다.

이어서 KBS 등 국·공영방송이 해설을 곁들인 특집방송으로 ‘민중교육’을 매도했고 공권력에서 동원이 가능한 국내의 모든 매체가 빠짐없이 거들었다.

 

그러면서 “무크지 민중교육에 실린 내용은 대학의 운동권학생들이 내세운 3민투(민주쟁취·민족통일·민중해방투위)와 다르지 않게 내용이 유사하다”면서 성토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