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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정부‘국민정신교육 강화’에 송곳 질문

정부‘국민정신교육 강화’에 송곳 질문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83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장관이 생각하는 ‘국민정신’묻고 추궁

교육보다 정권안보 우선 사찰에 쐐기

애매 모호한 개념 ‘획일 강제주입’ 질타

 

- 고교생도 교육민주화 투쟁 호응 담벼락에 낙서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전호에서 계속>

 

이철 의원이 밝힌 폭로내용

아래쪽에는 보고한 교육청의 표시와 송화자 및 수화자를 밝히도록 빈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민주교육추진 서울교사협의회 창립대회개최 결과 보고’라는 커다란 제목이 달린 1987년 9월 22일 23시00분의 ‘보고사항’ 문서에는 대충 이런 식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① 「사안의 개요」 난에는 일시 장소 참석기도인원(약5백여 명)을 기록한 다음, ② 현장지도라는 항목에는 ▲87년 9월22일 17:00시 서울교위 장학진 교장 2백50명, 경기교위 장학진 교감 93명, 계 3백43명이 현장에 도착, 지도 ▲ 동일 16:30분 서초경찰서 전경 3중대, 사복경찰 2개 중대, 진압경찰 1개 중대 현장에 도착, 집회 장소의 정문 후문을 봉쇄하고 주변 통제, ▲ 교위는 시경학원반장에게 동부교회 집회 봉쇄시 개최지를 변경할 가능성에 대비, 예상개최지(강남YMCA지회, 마리스타수도원)에 경계요청 등의 내용이 있었다. 계속되는 보고 내용을 한번 더 살펴보자.

 

③ 지도 및 진행경위 내용에서 ※ 18:10분 교장, 교감이 동부교회 진입기도 교사 50여 명을 개별 설득 귀가시킴, 회장 주변에는 교회진입기도자 1백여 명이 산재하고 있음 ※18:40분 서울교육감이 현장지도요원 격려차 도착 ※18:50분 교회 정문 앞에서 5백여 명이 연좌농성, 서초경찰서장이 금일행사는 교회사정으로 취소되었으므로 귀가 할 것을 종용, 불응시에는 강제해산시킬 것을 통보 ※19:00분 농성참가자들이 불응하자 경찰에서는 사복 1개 중대를 투입, 강제해산시킴 ※19:15분 제2의 집회장소 집결에 대비, 장학진과 교장, 교감을 역삼국민학교에 대기 시킴 등.

 

▲시·분별로 정보접수 송, 수화자 이름도 명기

 

그 후 일부 교사들이 서울 구로구에 있는 갈릴리교회로 장소를 옮겨 창립대회를 마치자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관기관의 제보를 받고 서울교위 학무국장 외 현장지도요원 다수가 갈릴리교회에 갔으며, 구로경찰서에서는 전경을 승차시킨 버스 2대를 배치하였음.

 

문교부 대책반은 주동자, 적극가담자 및 임원에 대한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지도대책 수립을 당부함.

이게 교육 2세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문교부와 교육청에서 하고 있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른바 업무(?)의 일부였다.

 

초·중·고 대학까지 사찰

 

12대 국회 초반부터 나(이철)는 상임위(문공위)에서 문교부를 상대로 정책질의를 할 때마다 이른바 ‘국민정신교육 강화’라는 문교부의 정책방향에 대해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대체 ‘국민정신교육’이라는 게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자유·민주·정의 그리고 평화 등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들을 저절로 간직하고 이런 것을 소중하게 키워나가면 되는 것이 바로 국민의 도리요, 인간의 도리인데 국가가 굳이 애매모호한 ’국민정신‘이라는 있지도 않은 개념을 만들어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요? 나치하의 독립국민들이 강요받았던 소위 파쇼적 국가이념, 국민정신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아니 다 접어두고 대체 장관은 ‘국민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하고 아무리 추궁하고 캐물어도 문교부관계자들은 적당히 둘러댄 채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비단 나(이철)뿐만 아니라 당시 같은 문공위원이었던 趙蕣衡의원도 빠지지 않고 질문공세를 퍼부었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趙의원이 되받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그리고 나면 또 다시 내가 이어가는 식의 회의진행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국민정신교육을 강화시켜나가겠다는 문교부의 복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에 앞서 2~3년간 그렇게 ‘정신교육, 정신교육’하며 열을 올리던 실상이 ‘교원정보부’였다니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문교부가 스스로 명명한 ‘교원정보부’의 명칭이 ‘국민정신교육담당관 소속의 전담실’임을 미루어 볼 때 그간에 이루어진 ‘국민정신교육’이란 민주적 교육을 하고자 자신을 희생해가며 애쓰는 참된 교사들의 꽁무니를 비밀리에 쫓아다니며 감시하고, 그것의 빌미를 마련하는 ‘정보사찰교육’ 바로 그것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대학과 중·고교를 구분함이 없이 학생과 교사·교수를 불문하고 문교부 본부에서부터 일선의 학교현장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교육은 없고 마치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정보사찰 기능만이 무서운 눈초리를 번득이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감시에 장학관 명찰

 

문교부 대학정책실은 시간시간마다 전국의 대학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는 야전사령부로 변했고, 마음에 맞는 교직원들을 마구잡이로 선발하여 연구사니 장학관이니 하는 명찰을 달아 대학 학생처 구석구석에 배치하여 학생과 교수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 수집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른바 어디를 지칭하는 지 뻔한 ‘유관기관’과의 대책회의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첩보’가 오고가고 경찰의 출동을 무시로 ‘요청’하는가 하면 교육청마다, 대학까지 가리지 않고 ‘보안위원회’가 설치되어 이를 구실로 국가안전기획부는 말 그대로 합법적인(?) 감시로 교육계를 유린하고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심지어 담벼락에 쓰인 몇 구절의 낙서가 불온(?)하다고 하여 지역경찰서 형사가 한 학교의 고3학생 전체를 밤늦게까지 붙들어 놓고 ‘필적조사’를 한답시고 “이 글자를 한짜로 써보아라”는 식의 문초 아닌 문초까지 학교에 지시하고 학교관계자들은 꼼짝없이 순응하는 것은 물론, 상호 정보교환까지 하고 있음을 확인 했을 때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또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이런 충격적인 파탄상이 유신시대의 폭압구조 아래서부터 총체적으로 자행되기 시작하여 5공 시대에는 철벽의 구조로 자리 잡았으며 소위 민주발전을 운위한 6·29선언 이후 6공화국이라 불리는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모양새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새 시대’와 ‘보통사람’을 내세우는 큼직한 활자를 볼 때마다 그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탄스러운 작태가 상기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정권담당자들은 또 무엇이라고 미화하고 어떤 구실을 갖다 붙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민주교사들이 구속되고, 파면 당하고, 느닷없이 서울한복판에서 서해바다 백령도로 발령받아 신판 유배를 떠나야 했던 긴박한 사안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속출하면서부터 문교부에 이런…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