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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사가 敎師를 가르친 우리時代 스승들

교사가 敎師를 가르친 우리時代 스승들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8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뜻깊은 교사들 전국적인 조직 필요 절감

‘스승의 날’ 부활 맞서 ‘교사의 날’ 정해

Y교사회 우산 밑에 모여들어 선언 준비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신군부 독재 출현 예언

 

- 교육민주화 저지 탄압 노태우정부 이전부터 계속 -

 

양서조합에는 광주권의 지식인들과 대학생 문화인 교사들이 가입하면서 세력이 확장되었다.

10여 개의 독서클럽이 출범하면서 매주 빠지지 않고 독서회를 열었고 도서 목록은 주로 사회과학 서적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성과 우상’ ‘8억 인과의 대화’ 같은 리영희 교수의 저서가 당연 중요 텍스트가 되었다.

 

이밖에도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강만길 교수의 ‘분란의 시대의 역사인식’ 문병란 시인의 ‘별들의 속삭임’같은 도서가 주요 목록을 이뤘다.

 

도서뿐만 아니라 감시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제작된 프린트물도 함께 섞였다.

당시는 복사기가 나오기 전이어서 프린트가 이를 대신했다.

독서를 통한 의식화 작업이 간단없이 전개된 것이다.

 

이처럼 독서운동이 밀물처럼 번지는 때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이 라듸오 뉴스를 타고 비통한 어조로 보도되었다.

 

이날 뉴스는 양서조합사무실에서 문병란 시인과 그의 부인 등 재야의학자인 양두석 박사와 농민운동가 서경원이 함께 앉아 들었다.

 

서경원은 후에 전남 함평에서 농사꾼으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가 당선되어 고무신을 신은 채 등원한 것으로 유명했다.

 

18년간의 군사 독재자가 하필이면 심복인 중앙정보부장(김재규)에 의해 궁정동 안가에서 시해된 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 실감이 안 나는 빅 뉴스였다.

 

모두들 의외라며 군사독재 종언으로 받아들이는 데도 유독 서경원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면서 “박정권 보다 더 무섭고 지독한 제2의 독재자가 나올 가능성에 경계해야 한다.”고 예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신군부의 전두환 대통령과 직선회복 첫 노태우 대통령 등 줄줄이 이어질 것을 서경원은 용케도 미리 알아 맞춘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전국 19개 Y교사회 결성

광주에서 교육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신군부 정권에 의해 파면당한 윤영규 교사는 한신대 대학원에 등록했다. 전공은 기독교 윤리학이었다.

 

한신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틈틈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사모임을 만들었다.

어떤 때는 한 지역에서 40명이 넘는 교사들을 모아놓고 교육민주화가 시급한 것을 호소했다.

그래놓고 며칠 후에 다시 가보면 누구도 만나기 어렵게 연락이 끊어지고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 지역의 교육청에 참석했던 교사들 명단이 들어갔고 이로 인해 다시는 그런 모임에 가지 않도록 차단해서 단속했다.

 

이런 사태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뜻 깊은 교사들은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한 것을 절감했다.

천신만고 끝에 전국에 19개의 YMCA교육자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약칭 ‘ Y교사회’였다.

 

YMCA회원이 아니었던 교사들도 Y교사회 우산 밑으로 모여들어 저절로 시·도별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특히 서울협의회는 신일고등학교 이수호 교사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전국에서 가장 큰 조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꾸려진 협의회를 모아 같은 신일고등학교의 오장원 교사를 초대 회장으로 뽑은 뒤 전국 YMCA중등교육자협의회(Y교협)가 탄생했다.

 

한신대 대학원에서 ‘비폭력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윤영규는 전남 나주중학교 교사로 돌아왔다.

그동안 일정한 수입도 없는 남편 대신 딸들을 키우면서 집안살림을 꾸려온 아내 이귀임의 고통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렵게 찢어지게 가난했고 부족한 것 뿐이었다.

그랬어도 남편에게 힘든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주위 사람들은 “그 남편에 그 아내”라면서 “저래서 선생님 부인을 사모(師母)님이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집에서도 그런 엄마를 보면서 크는 아이들 또한 다른 집에서 얻어온 헌 옷을 입혔어도 싫지 않았고 한번도 새 옷을 사달라고 보채지 않았다.

 

윤영규·이귀임 부부는 딸만 일곱으로 7공주 가운데 셋은 시집을 갔으나 넷은 아직도 미혼인 딸부자이다.

Y교협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세력이 확장되어 커지고 배후의 주동자로 낙인 찍힌 윤영규 교사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 무렵 기독교사회과학원에서 당시의 초·중·고교 교과서를 분석하고 문제점들을 짚어내는 연구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자 당국은 이를 반체제 활동으로 지목하고 연구를 주도한 강만길·리영희 교수를 연행 구속했다.

그리고 연구원으로 참여했던 Y교협 소속 교사들도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요주의 단체 참가자’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만큼 참여교사들의 행동반경에 제약이 따랐다.

 

드디어는 신군부 정권이 청소년 적십자단(RCY)원들이 뜻을 모아 1964년에 제정한 ‘스승의 날’을 정부제정 기념일로 부활시켰다.

 

‘스승의 날’은 박정희 정권이 1973년 유신시대를 열면서 ‘학생의 날’과 함께 없앴던 것이다.

 

이를 1982년 전두환 정부가 정부제정 기념일로 바꾸는 것에 맞서 Y교협의 젊은 교사들이 나서서 따로 ‘교사의 날’을 만들고 ‘스승의 날’행사에 대신했다.

 

다만 날짜만 5월 15일이 아닌, 5월 10일로 앞당겨 ‘교육민주화선언’을 하기로 결정한 날과 함께 했다.

 

이날 서울 종로 2가의 YMCA강당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교사들이 ‘교육민주화선언’에 동참했다.

이들 중에는 교사들을 감시하기 위해 투입된 교장·교감·장학사·형사들이 섞여 오히려 참석자 수가 많은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개회사에 이어 이수호 서울Y교협 회장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 날이 1986년 5월 10일이었고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반 남은 시기였다.

당시 문교부는 손제석 장관과 김찬제 차관이 이끌었다.

 

다시 말해서 교육민주화선언 저지 등 교사회활동을 감시·탄압했던 것은 노태우정부 이전부터 계속된 것이다.

 

이수호 서울 Y교협회장이 낭독했던 逃냅갯适澧?굶題?은 교사가 교사를 가르친 것으로 우리 시대의 스승들이 보여준 귀감이었다.

 

그날(1986. 5. 10)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가 발표한 선언문(전문)은 다음과 같다.

 

학생과 함께 진실 추구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을 뜯었다. 영원한 민족사 앞에 그 책임의 일단을 회피할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강요된 침묵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우리 교사들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의 올곧은 시선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방관자로 남아 있는 우리를 더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맹랑한 꼭두각시의 허무한 몸짓을 그만 그쳐야 한다.

우리 앞의 저 대상화된 학생들이야말로 이 민족의 미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성세대의 탐욕과 허위, 좌절과 패배주의가 저들을 병들게 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이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특정세력의 허욕과 독선에 바탕한 비민주적 사회와 이에 종속되어 학생들에게 비판적 안목과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는 비민주적 교육에서 비롯됨을 직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