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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취임 후 인사 의중대로 하기 어려워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6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차관 총무과장라인 검증 결과 기다려

해외주재 장학관 교육원장 예외적

순환전보 원칙 따른 서열과 배치 조정

-영향권 밖의 임명직 교육감은 교육자치와 거리감-

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

<1993. 2. 26~ 93. 12. 21 재임>

 

<전호에서 계속>

이렇듯 당시 상황은 김영삼 정부가 전교조를 인정하고 합법화 하기에 앞서 노태우 정부에서 강제 해직한 1천5백여 명의 전교조 가입 교사들을 복직시킨 것부터 서두른 것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다음 김대중 정부가 합법화하는데 디딤돌이 된 것으로 국제교원단체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아울러 기이한 것은 전교조와 적대관계인 한국교총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인 거제도 출신 충남대학교 윤형원 교수가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 대통령이 윤 회장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비쳐진 적은 없었지만 전교조에 대한 김 대통령의 해법에 저지노력이 있었을 것은 짐작해보기 어렵지 않았다.

 

 

차관 바꾸고 문민교육 채비

 

김영삼 정부는 첫 장관 인사에 이어 차관급도 경질했다.

이때 교육부도 조규향 차관이 나간 대신 이천수 기획관리실장이 올라섰다.

이 기회에 오병문 장관은 비서실장과 수행비서를 바꾸었다.

비서실장은 전남출신 김재연 대학학무과장을 앉히고 수행비서는 대전출신 박백범(현 교육부 기획실장)사무관으로 바꾸었다.

 

전임 실장과 수행원은 본인의 희망대로 자리를 옮겨줬다.

또 공보관은 김상권 전남대학교 사무국장을 불러들이고 허종갑 감사관은 원영상 이사관으로 교체했다.

총무과장도 정형진 서기관을 이기우 행정관리담당관으로 바꾸었다.

 

정 과장은 청와대 교육비서관실로 옮겨갔다.

차관으로 승임한 이천수 기획관리실장 후임은 김하준 관리관(1급)을 옮겨 앉혔다.

그 밑에 기획예산담당관은 이기호로 바꾸고 행정관리담당관도 안오환 서기관이 전보됐다.

장학편수실은 박용진 실장을 유임시키고 장종택 편수관리관은 함수곤 교육과정담당관으로 교체했다.

교육과정담당관은 김용만 교육연구관을 승진시켜 앉혔다.

 

한상진 인문과학편수관, 한명희 사회과학편수관, 김동식 자연과학편수관은 유임했다.

장학실의 박용진 실장 밑에 있던 심광한 교육연구장학관을 김진성 정신교육장학관으로 교체하고 후임은 김덕환 장학관을 앉혔다.

 

교과지도 김순오 장학관, 생활지도 오종호 장학관은 유임했다.

박준열 교육방송담당관리관은 신진기 관리관으로 바꾸고 이철기 교육방송기획관과 구학봉 교육방송편성심의관은 유임했다.

 

조성종 교육방송운영관은 조수옥 서기관으로 바꾸었으며 모영기 대학정책실장은 김상구 실장으로 바꾸고 이보령 대학행정심의관도 이수종 부이사관으로 바뀌었다.

 

대학행정과장은 김종석 과장으로 교체했다.

유영창 대학재정과장을 조성종 과장으로 바꾸고 장관 비서실장으로 옮긴 김재연 대학학무과장 후임은 서남수(현 교육부장관) 과장이 들어갔다.

 

이 때 서 과장 밑에 김화진 사무관은 유임했고 올해 3월 사학연금공단 이사장이 되었다.

김영준 대학사학심의관은 강영선 과장으로 교체했고 그 밑에 옹정근 학사관리과장을 김왕복 과장으로 바꾸어 재임했으며 올해 광주광역시 교육감선거의 후보로 출마했다.

김종석 학술진흥과장은 서범석(후에 차관) 과장으로 교체했고 그 밑에 우형식 사무관은 MB정부 첫 교육부 제1차관이 되었다.

 

이수종 보통교육국장은 이용원 국장으로 바꾸었고 그 밑에 김용현 교육행정과장은 이병수 과장으로 바뀌었다.

송세화 교육재정과장은 임윤수 과장으로 교체하고 정오근 의무교육과장은 정현웅 과장으로 바꾸었다.

신설된 부서인 반운경 유아교육담당관은 유임했다.

 

서인섭 교직국장은 최이식 국장으로 교체되고 조성종 교직과장은 황병수 과장으로, 송영식 양성과장은 옹정근 과장으로, 장관주 교육연수과장은 동선호 과장으로, 김정호 교원복지과장은 강홍섭 과장으로 각각 바뀌었다.

유해돈 과학교육국장은 조선제(후에 차관) 국장으로, 그 밑에 김태진 실업교육과장은 김정호 과장으로, 고재형(고인) 과학교육과장은 이종서(후에 차관) 과장으로, 정한로 전문대학행정과장은 송영식 과장으로, 이기호 전문대학학무과장은 유강하 과장으로 교체했다.

 

금승호 사회국제교육국장은 김성동 국장으로, 그 밑에 권황옥 사회교육진흥과장은 장관주 과장으로, 허만석 사회교육제도과장은 김두식 과장으로 바뀌면서 정봉근 교육협력과장만 유임했다.

 

이종서 재외국민교육과장은 임승빈(현 교육부산하 교육학술정보원장) 과장으로 교체했다.

 

교육시설국장 조선제는 허종갑 국장으로, 그 밑에 양재훈 기획과장은 이병석 과장으로, 유강하 외자사업과장은 정동훈 과장으로, 윤한철 설비관리과장은 이형구 과장으로, 석진복 시설과장은 유임했다.

재외공관주재 교육관은 일본의 도쿄에 나가 있던 김창기 장학관과 김종만 장학사는 유임하고 오사카 박찬봉 장학관 이재환 장학사도 유임했다.

 

후쿠호카 하만춘 장학관 서기관으로 환직되어 유임하고 삿포로 서재희 장학관도 유임했다.

워싱턴 김명곤 이사관과 로스엔젤리스 허경덕 장학관도 유임했다.

독일의 본에 나가 있던 유석인 장학관, 러시아의 모스크바 이종석 장학관도 유임했다.

프랑스 유네스코엔 박재경 서기관을, 중국 북경에는 나종화 서기관을 보냈다.

이밖에 재외한국교육원의 원장은 일본의 경우 가나가와 김명규, 히로시마 박성순, 삿포로 김창국, 아오모리 안명수, 센다이 임창순, 치바 구광회, 니이카타 강종출, 나고야 최길식, 교토 홍현주, 후쿠시마 조태룡 원장이 재임했다.

 

미국의 한국교육원 원장은 워싱턴 박진석, 로스엔젤리스 김성중, 센프란시스코 김중기, 시카코 임태익, 뉴욕 김지수, 휴스턴 이남정, 시애틀 김기석 원장이 재임했고 파라과이 정병수, 아르헨티나 윤충모, 브라질 최치평, 카나다 정태헌, 영국 강인수, 프랑스 박수정, 독일 박종화, 호주 이부웅, 카자흐스탄의 알라아타 신계철, 우즈베키스탄의 다슈겐트엔 안재식 원장이 나가 있었다.

 

이처럼 김영삼 정부의 문민교육 채비는 국내·외에 포진한 교육부 인력으로 새롭게 보강하고 이를 구체화한 인사는 오병문 장관의 의중보다 이천수 차관과 이기우 총무과장 라인에서 검증하고 확인되어 이뤄졌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문민시대 첫 교육부장관 출산에 진통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5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임명장 수여 2시간 전 아침 난산 통보

5·18과 전교조 등 광주권에 연계 물망

국제교원노조연맹 결의 새 정부 긴장

-최대 교원단체 IFFTU와 WCOTP 해산 후 E·I 창립-

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

<1993. 2. 26~ 93. 12. 21 재임>

 

힘 없으면 장관 돼도 힘들어

 

6공 노태우 정권을 이어 받듯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첫 조각은 교육부장관 인선을 맨 나중에 매듭지으면서 장관이 임명장을 받는 것도 순탄치 못했다.

 

이 날이 1993년 2월26일이다.

 

하루 전날부터 언론에 조각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입각 대상 명단까지 나돌았으나 교육부장관은 점치기 어렵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다만, 호남권, 특히 광주지역 인물이 물망의 대상처럼 떠올랐다.

 

광주는 5·18과 전교조의 본산, 김대중 와성으로 꼽히면서 양 김(김영삼·김대중)의 정치산술과 역학관계가 맞물린 것에 관심을 모았다.

 

이 와중에 교육부장관은 누가 되는 것인지 탐문하기에 바빠진 출입 기자들은 조규향 차관실에 몰렸다.

조 차관은 이날도 청와대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것 말고는 외부 일정이 없었다.

또 청와대에 들어갔다 온 것도 다음날 장관 취임식 준비와 관련된 것 이상 얻어 들을 수 없었다.

 

오후 6시 퇴청시간이 임박했을 때 차관실 앞의 복도에서 마주친 조 차관에게 “낌새가 있느냐?”고 묻자 “들은 것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라고 시침을 뗐다.

 

이에 “벌써 타 부처 장관은 서울에 와서 취임할 준비로 바쁘다는데 교육부만 깜깜”이라고 응수하자 “그런 말은 어디서 듣나요?”라고 계속 딴청이었다.

 

결국 조 차관을 통해 장관이 되는 사람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겠다고 판단되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들어선 박관용 실장과 연줄이 닿을 만한 교육부 인맥으로 관심을 돌려 이기우 행정관리담당관을 찾았다.

 

이 담당관은 부산고교 출신인 박 실장의 후배이며 김영삼 대통령과 고향이 같은 거제도 태생이었다.

이기우 담당관실에 들어서자 “웬일이냐?”며 “내한테도 볼 일이 있느냐?”고 거푸 물어왔다.

 

“있고 말고.… 장관이 취임하면서 인사가 있게 마련이고 그 때는 이 담당관도 오늘 이 자리가 마지막일 것 같아 들렀다”고 대답하자 “턱도 없는 소리 마쇼! 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네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새 정부의 첫 교육장관도 교수가 올 것으로 후문이 파다한데 아직 거제 출신은 거명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산·경남 쪽은 아닌 것 같고…” 여기까지 말을 잇자 “어째 그쪽만 생각합니까? 호남선도 있는데…”라고 얼버무렸다.

 

이는 영남권이 아니라 호남권을 뜻한 것으로 전남·북이 아니라 광주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감이 잡혔다.

기자에게 정보란 표정과 언급된 내용에서 흐리는 쪽에 집약한 것을 추리해 보면 풀어내기 쉽다.

 

잠시 후에 전남대학교의 김상권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병문 총장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 사무국장은 “좀 알려주라. 지금 사방에서 총장님 소재를 묻고 서울에 가셨느냐? 묻는 전화만 빗발치는데 이 시간 현재도 총장님은 안에(총장실)계시니 우리도 답답할 뿐”이라고 했다.

 

기자들끼리 만나면 “왜 오 총장이냐?”고 의문이었지만 인권변호사들의 동향에서 가능할 것으로 감이 잡힌 것이 근거였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뒷날 아침 7시쯤 광주시내의 오병문 전남대 총장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오 총장이 “누구세요?”라고 묻더니 “오! 자네구먼! 그런데 신새벽같이 웬일인가?”하고 되묻는다.

“오늘 오전에 장관으로 취임하실 분이 아직도 광주에 계시느냐?”고 묻자 “이 사람아! 뭔 연락이 있어야 가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아직 아무 기별이 없어”하면서 수화기를 놓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8시쯤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오! 자네구먼. 나 지금 급히 나가는 길인데. 이제사 알려주면서 10시에 임명장을 받으라고 하니 광주서 서울까지 어떻게 오라는 건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뒤이어 김상권 전남대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조 차관님께서 고속도로 순찰대에 연락해줘서 총장님 차로 모시고 가기로 했다”면서 “총알택시보다 더 빠르게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고속도로 순찰대가 캄보이해서 10시 전에 서울에 도착하거나 대통령의 장관 임명장 수여식을 늦추거나 양자택일하는 것 이상 묘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해서 1993년 2월26일 제33대 오병문 교육부장관이 탄생하고 임명장은 예정보다 늦춰 수여했다.

이때 서울에 도착한 오 장관은 긴장해서 진땀을 쏟았고 속옷이 다 젖은 상태였다고 한다.

취임 후 차 한 잔 나눌 기회에 그 때 일을 묻자 “장관이 되는 것 보다 이러다 길에서 죽는 것 아닌가 싶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면서 “힘없는 사람은 장관이 되어도 힘들더라”고 하소연이었다.

 

 

국제교원단체 동향에 영향

 

다른 부처의 장관들은 결정이 빨라서 여유있게 서울에 입성하고 청와대에 들어가 임명장을 받기 쉬웠고 취임준비도 수월했으나 오병문 교육부장관의 경우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때문에 달랐다.

 

더구나 서울에 연고도 없었고 거처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아서 고속버스터미널 뒷 편에 있는 소형(28평)아파트에 전세로 겨우 숙소를 마련했다.

 

후문에 따르면 오 장관의 임명은 당시 5·18도 영향이 컸지만 전교조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도 선거기간 후보의 공약에서 전교조 합법화에 긍정적으로 임했던 터라 전교조 신임 위원장인 정해숙 여성위원장의 고장인 광주에 무게를 둔 것 같았다.

 

당시 전교조는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5대 위원장과 수석 부위원장, 시·도지부장을 직선으로 선출했고 이 때 정해숙 교사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정 위원장은 오병문 전남대 총장과 교분이 두터웠고 시국 문제에도 교감이 되고 있었다.

또 전교조의 5대 위원장을 뽑을 당시 윤영규 4대 위원장은 지명수배가 된 상태로 목포시 인근의 요양원에 숨어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국제교원사회는 1993년 1월26일 세계 최대 교원단체인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IFFTU)과 세계교원단체연합(WCOTP)이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각각 총회를 열어 해산을 결의하고 다음날 국제교원단체총연맹(E·I)으로 재창립 출범했었다.

 

이 때 E·I는 규약에 ‘교육노동자의 노동조합과 전문직 권리보장, 교육 발전을 통한 세계인권선언 적용, 교원·교육노동자의 전문적 지위강화와 교육정책형성의 참여, 인권과 노동조합 권리를 탄압하고 있는 나라에서 교원과 교육노동자의 자주적 민주적 단체 발전을 진전시키는 것’ 등을 목적에 담아 명시했고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전교조는 E·I에 가입할 절차가 마련되지 않아 어려웠으며 1993년 9월30일에야 E·I집행위원회에서 가입이 결정되어 회원이 될 만큼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93년 2월에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도 이를 미리 내다보고 기존의 교총뿐만 아니라 전교조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교육부의 역할과 기능에서 배제하기 어려웠다.

 

특히 1993년 1월25일 국제교원노조연맹이 해산되기 직전 마지막 총회에서 독일과 네덜란드교원노조가 공동으로 제출한 ‘한국의 전교조 인정과 1천5백여 명 해직교사 복직에 관한 긴급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채택한 것에도 김영삼 정부는 교육부장관 인선에서 배제할 수 없는 중요 현안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상황은 김영삼 정부가 전교조를 인정하고 합법화 하기에 앞서 노태우 정부에서 강제 해직한 1천5백여 명의 전교조 가입 교사들을 복직시킨 것부터 서두른 것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다음 김대중 정부가 합법화하는데 디딤돌이 된 것으로 국제교원단체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아울러 기이한 것은 전교조와 적대관계인 한국교총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인 거제도 출신 충남대학교 윤형원 교수가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 대통령이 윤 회장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비쳐진 적은 없었지만 전교조에 대한 김 대통령의 해법에 저지노력이 있었을 것은 짐작해보기 어렵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전교조의 “대화요청”에 “해체 먼저” 강요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2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육성회 어머니회 통해 탈퇴종용 권유

학부모대회 15회 19만3800명 동원

징계 파면 불구 잔류에 ‘불사조’ 별칭

-정권말기 체제정비 차관 등 경질않고 안정화 도모-

32대 조완규 교육부장관

<1992. 1. 23~ 93. 2. 25 재임>

6공의 교원노조 해체 강수

 

<전호에서 계속>

6공의 노태우 정부는 교원노조의 강렬한 주장과 일부 교원노조 가입교사들의 학생에 대한 편향된 의식화 교육 등을 이유로 육성회·어머니회 등의 학부모와 동창회원들이 교원노조 결성을 저지하고 탈퇴를 설득하는데 동참하도록 동원했다.

 

이에 탈퇴 교원이 급증함에 따라 교원노조 측은 정부에 대해 징계절차 진행을 중지하고 ‘교원노조 실체인정을 전제로 한 대화’를 요구했으나 정부는 “선 해체 후 대화”라는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

 

그리고 교원노조의 불법성과 부당성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통해 교사와 학부모들의 이해와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면서 미탈퇴 교원에 대한 징계조치와 행정적 대응활동을 통해 교원노조를 와해하고자 했다.

 

집중적인 설득과 간곡한 종용에도 불구하고 끝내 교원노조의 탈퇴를 거부한 교사들에 대해서는 전원 징계에 회부해 해직 조치했다.

 

이들 해직교사들은 각종 대응 집회를 개최하고 출근투쟁을 전개해 학생과 현직교사들의 동정을 유인했으며, 재야단체와 연계해 극한적인 정권타도 투쟁을 시도했다.

 

1987년 말 1만2000명에 달했던 교원노조 가입교원 수는 정부당국 및 학교 행정가들의 탈퇴 설득과 병행한 중징계 방침 강행으로 1989년 말까지 152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퇴했다.

 

미탈퇴 교사들은 1990년 초기까지 전원 징계 해직함으로써 교원노조는 조직이 와해되었다.

 

6공 정부는 교원노조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에 대하여는 그 활동을 지원했으며, 시·도별 교육정상화 촉구 학부모대회가 시·도교육청에서 15회 개최되어 19만3800명의 학부모를 동원 참석시켰다.

 

그 이후 김영삼 정부는 해직교사들을 복직시켜 주었고, 김대중 정부는 전교조를 합법화 했다.

 

노무현 정부는 전교조의 활동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이를 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내가 세운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더라면 불필요한 국론의 소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6공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한 조완규 장관은 부내 인사는 변동없이 대통령의 남은 임기동안 교육부를 이끌면서 보필할 결심이었다.

 

1992년 2월에 접어들자 음력은 구정을 맞은 때라 새해를 여는 덕담이 무르익었다.

 

우연히 장관실 문앞의 복도에서 조 장관과 마주친 김에 “앞으로 부내 인사는 없는 것이지요?”라고 묻자 “인사 좀 했으면 좋겠어요?”라며 되묻는다.

 

이에 “기자들은 관심사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거푸 묻자 “거참 죄없는 공무원들 자꾸 불안하게 하면 일손 안잡힙니다. 이게 내(장관) 대답이에요. 됐지요?”하면서 반문했다.

 

이 때부터 조 장관 체제의 교육부가 새롭게 가동했다.

 

조규향 차관도 경질없이 유임했고 장관비서관은 차현직 서기관이 들어왔으며 공보관은 유해강 부이사관이 맡았다.

차관실 비서관은 정영선 사무관이 유임했고 감사관은 허종갑, 바로 아래 서기관은 최상택 서남수(현 교육부장관) 서기관을 앉혔다.

 

총무과장은 정형진 서기관, 기획관리실장은 이천수 실장이 유임했다.

 

이 때 기획예산담당관은 김성덕, 행정관리 담당관은 이기우(현 재능대총장 전문대학협의회장), 법무담당관은 이병석이었다.

 

장학편수실장은 충북교육감 출신 유성종 실장이 앉았고 편수관리관은 장종택 장학관을 앉혔다.

 

박경재 서기관이 편수행정관을 담당했고 교육과정담당관은 함수곤 장학관과 함께 정영권, 소정자 교육연구관과 김영익, 박정자, 조규석 연구사가 한팀을 이뤘다.

 

인문과학편수관은 한상진(작고) 휘하에 김석진, 한정근, 정준섭, 오병각, 이순영 연구관과 허천행, 심광운, 신란수, 이강정 연구사를 두었다.

 

사회과학편수관은 한명희, 김용만 윤종영, 김걸 연구관이 보좌했고 이창조, 채희두, 최병모 연구사를 배치했다.

자연과학편수관은 김동식, 그 밑에 정성봉, 이기훈, 고석달, 이동길, 구자락, 장명진, 김진락, 황장규, 이규석, 김학영, 연구관과 김진석, 이재혁, 김의장, 임공희, 강행고, 문수한, 주수동 연구사를 배치했다.

 

교육연구장학관은 심광한을, 윤웅섭 조용찬 장학관이 좌우에서 도왔으며 그 밑에 오창환 연구관, 이성구, 강휘국 연구사를 배치했다.

 

또 교육월보 편집실에 김노현 연구관과 남기수·김영윤(현 서울강동교육장) 연구사를 배치했다.

 

정신교육장학관은 김진성, 신상조 인정각 정태헌 우정남 연구관과 이원우 강사민 연구사를 두었다.

 

교과지도장학관은 김순오 밑에 이경환·최강문 연구관을, 정봉섭, 송연현 연구사가 함께 했다.

 

생활지도장학관은 오종호 장학관 밑에 김덕환 장학관과 최인용 연구관, 박경희, 김정호, 이태숙 연구사를 두었다.

교육방송관리관은 박준열, 기확관은 이철기가 맡았다.

 

또 박용복 연구관, 홍순직 이성욱 장일환 문중근(현 서울시교육청 진로교육국장)연구사를 배치했다.

 

교육방송편성심의관은 구학봉 장학관이 맡았고 그 밑에 이원구·송재원 연구관을 두었으며 연구사 4명(장명화·최윤도·조상제·양순열)을 배치했다.

 

이에 서기관급 방송운영관(조성종)을 두었으며 곽현수·김봉회 사무관이 보좌했다.

 

대학정책실장은 모영기 장학관이 유임했고 대학행정심의관(이보령) 밑에 행정과장(이성일) 대학재정과장(유영창) 학무과장(김재연)과 김화진 사무관(현 사학연금공단이사장)을 배치했다.

 

대학학사 심의관은 김영준 부이사관을 앉혔고 그 밑에 학사관리과장(옹정근) 학술진흥과장(김종석) 학사지도담당관(송순) 밑 장학관 4명(김우상·권숙동·송대형·안광호)과 교육연구관 8명(김진성·배상식·성기원·박찬도·이종락·이종육·채수언·장송환)등 교육연구사 3명(이병호·이형기·장상훈)을 두어 막강한 팀이었다.

 

보통교육국장은 이수종, 교육행정과장은 김용현, 교육재정과장은 송세화, 의무교육과장 정오근, 유아교육담당관은 반운경 장학관이 맡았다. 이 때 이계영(현 광주광역시교육청 부교육감)사무관과 최청송·신정숙 연구사가 보좌했다.

 

교직국장은 서인섭, 교직과장은 김진동, 행정사무관에 우형식(후에 차관·구미공대 총장) 교원양성과장은 송영식, 연수과장 장관주, 교원복지과장은 김정호를 앉혔다.

 

과학교육국장은 유해돈, 밑에 실업교육과장 김태진, 과학교육과장 고재형, 전문대학행정과장에 이기호, 사회국제교육국장에 금승호(현 춘천한림성심전문대 총장) 사회교육진흥과장에 권황옥, 사회교육제도과장 허만석, 교육협력과장 정봉근, 재외국민교육과장 이종서(후에 차관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교육시설국장에 조선제(후에 차관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기획과장 양재훈 외자사업과장 유강하(후에 김숙희장관 비서관) 설비관리과장 윤한철, 시설과장은 석진복 서기관을 두었다.

 

당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의 교육담당 비서관은 김하준(후에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여수대총장)이었고 서기관 3명(정석구·이병수·김정기)과 민정담당비서관실에 김평수 서기관(후에 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을 파견했다.

 

집권당(민자당)에도 김정길 전문위원을 파견했고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 김홍원 부이사관 및 김경환·구관서 서기관과 최기철·정병술 사무관을 파견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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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교총만 교원단체 인정 전교조 탄압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1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민중교육과 참교육은 좌경이라는

노동3권 요구는 “학습권 침해” 매도

대통령의 不法化 고집에 長官도 굽혀

-6공 이후 정부의 ‘전교조 합법화’도 못마땅 반격-

32대 조완규 교육부장관

<1992. 1. 23~ 93. 2. 25 재임>

교원 해외연수 괄목할 업적

 

<전호에서 계속>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교사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처우 및 후생복지를 향상시키는 시책들을 마련했는데 그중에서도 교원들의 해외연수는 제6공화국에서 괄목할 만한 실적을 남겼다”고 회고했다.

 

노 대통령 재임 중 매년 평균 3000여 명의 교원들이 해외연수를 받았다.

 

1978년 교원 해외연수가 실시된 이래 1987년 말까지 10년간 총 350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대학생 및 교수들의 해외연수 역시 크게 늘어났는데 공산권 연수도 허용했다.

 

임기 말인 1992년부터는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을 군(郡)지역까지 확대했다. 중학교 의무교육은 이미 1972년에 개정된 헌법(제27조2항)에 의해 법적 근거를 마련해 두었지만 예산 등의 이유로 미뤄져 온 국책이었다.

 

도시지역에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으나 농어촌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조차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이 상당수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바 있었으므로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추진 사항을 직접 챙겼다.

 

그 결과 도서·벽지에 국한되었던 수혜 대상이 군(郡)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임기 말에는 전체 중학생의 12.3%인 28만8000여 명이 무상의무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초등학교의 졸업자 가운데 99.8%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사실상 본인이 원하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들은 없어진 셈이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취임 첫해인 1988년이 ‘장애자의 해’라는 점에 유의해 재임기간 내내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부인(김옥숙)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벌였다.

 

청와대에 돌아와서는 대통령에게 현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하며 장애인들에 대한 지원과 배려를 당부하곤 했다.

 

이에 관계자들로부터 장애인 교육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면 거의 대부분 시행하도록 조치했다.

 

예산상의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특수교육을 받는 모든 학생들에 대해 무상교육과 무상급식을 실시하도록 했다.

 

특수학교는 1987년 한 건도 늘어나지 않다가 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4년간 7개교 670개 학급이 신·증설되었다.

 

노 대통령은 1991년 5월5일 어린이날 메시지를 통해 “나는 몸이 불편한 어린이,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이… 불우한 처지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더 큰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고 말한다. 나 자신도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큰 슬픔을 겪었다. 어릴 때의 어려움을 이긴 사람은 자라서 어떤 큰 일도 잘해 낼 수 있다”고 격려했었다.

 

▲全敎組와 민중교육론 不法化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5월28일 초·중·고 교사들이 이른바 ‘전교조(全敎組, 전국교직원노동조합)를 결성했다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6·29선언 이후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를 구성해 교사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요구하며 대한교련(교총의 전신)의 해체, 교육법 철폐 등을 주장해 온 사람들이 기습적으로 불법(不法)노조를 만든 것이라며 “나는 가르치는 것이 노동이라는 주장에 대해 예나 지금이나 의문을 갖고 있다”고 부정적이었다.

 

또 “평소 서양문명이 한계에 이르렀으므로 동양문명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아야 한다고 믿어 온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동양사상으로 보면 “사부일체(師父一體)란 말이 있듯이 스승이란 어버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들의 노조 결성은 위법일 뿐 아니라 당시의 교사들 중에서는 전교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예거했다.

 

결국 교육계 인사들이 나서서 설득하고 학부모와 동문들이 탈퇴를 종용하는 등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게 소동을 겪은 후에 1만2000명이었던 가입자가 1524명으로 줄어들었으나 잔류를 고집한 교사들은 징계 해직했다고 밝혔다.

 

교원은 그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단체를 조직할 수 있으며, 이러한 권리는 교육법 제80조에 규정되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 교원들은 교원의 권익(權益) 향상과 교직의 전문성 확립을 목적으로 광복 직후인 1947년부터 각 지역단위의 교육위와 전국단위의 대한교육연합회를 결성해 교원들의 근무조건 향상과 권익(權益)보호, 그리고 교육정책 개선에 많은 성과를 거둔 바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초부터 이념투쟁을 지향하는 일부 교사들이 민중교육론이나 교육민주화를 주장해 오던 중 6·29선언을 계기로 소위 ‘자주적 교원단체’ 결성을 추진하게 되었고, 1987년 9월27일에는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를 발족했다.”면서 “전교협은 출범 이전까지 ‘교사 대중조직 건설과 그를 위한 토대 마련’에 중점을 두면서 교사의 노동 3권 등 제도적 권리확보를 위한 법 개·폐투쟁을 통한 지지기반 확보에 주력해 왔다”고 매도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조직 강화에 성공했다고 판단해 1989년 5월28일 불법단체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결성했던 것이라고 했다.

 

교원들이 노동 3권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관념상 수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교원들의 노조활동은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며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에서 학부모들의 비판이 높았으며 이른바 ‘참교육’이라는 민중교육론에 입각한 좌경적이고 계급투쟁적인 교육개혁운동은 노동권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교원노조 결성의 목적이 될 수 없었고, 우리정치·사회적 여건에 비추어 허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대통령의 판단이자 많은 국민들의 여론이었다고 회고했다.

 

“교원노조 결성으로 일선 교육계가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게 되자 6공 정부는 다각적인 대응책을 수립해 추진했다고 밝혔다.

 

특히, 교원노조에 가입한 교사들에게 탈퇴(脫退)하도록 설득하고, 교원노조를 불인정한다는 방침은 흔들림 없이 관철했다.

 

1989년 6월부터 시·도교육청의 관계관 회의를 연속적으로 개최해 교원노조 가입교사들의 탈퇴를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탈퇴 불응자에 대해서는 조속한 징계조치로 노조 결성의 확산을 방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교육부장관들도 대통령의 전교조 불법화 고집에 꼼짝을 못하고 따랐고 6공 이후 정부의 합법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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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교육정책 기조가 장관 발목잡아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10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전환기 따른 교육민주화 열기에 찬물

새롭게 헤아려 볼 잣대에서 거울

전교조 불법화 조치 소신 흔들고 영향

-멀지도 않은 21년 전 대통령 회고록에서 드러나-

32대 조완규 교육부장관

<1992. 1. 23~ 93. 2. 25 재임>

 

일제 때 초등학생이 대통령

 

<전호에서 계속> 6공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말 임명한 조완규 교육부장관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의 교육정책기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그 노 대통령은 일제 말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의 봄에 6년을 배우고 졸업했었다.

6학년 동기생 105명 가운데 중학교 진학은 4명 뿐이었다고 한다.

 

모두 가난했고 4명 가운데 한 사람인 노 대통령은 막내 숙부가 학비를 대주어 가능했다.

 

또 초등학교 6학년 동안 저녁이면 할아버지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선조들에 대한 인물사를 배웠고 “우리 문화와 역사가 일본 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때문에 일본 교육을 받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우리는 다르구나. 달라야지 ‘언젠가는 우리 것을 찾아야지’하는 생각을 키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쿠데타 이후 폐지된 국회 민의원(하원)·참의원(상원) 선거 등 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까지 말살했던 신군부(전두환 대통령)의 끝머리에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을 되살려 당선되어 취임했고 6공 정부를 이끈 것에 비추어 초등학생 때 ‘언젠가는 우리 것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그 ‘우리 것(민주화)’을 되새겨 볼 수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생이 직선대통령의 부활로 국정을 펼쳤던 ‘교육정책의 기조’는 6공 마지막 교육부장관(조완규)도 “충실하겠다”고 다짐한 것에 비추어 새삼 그 때를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의 6공 교육정책은 헌정회복 등 민주화를 되찾은 것에 노 대통령 스스로 ‘전환기의 교육정책’으로 표현(회고록 下권 1080~87페이지)할 만큼 민주화에 무게를 두었다.

 

당시 조완규 교육부장관의 시책도 이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다만 ①개인의 존엄성 강조 ②중학교 무상의무 교육 ③전교조와 민중교육론 불법화 가운데 ③의 불법화는 그 이후 교육부장관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때문에 누구보다 노태우 대통령의 회고에서 진의를 거듭 확인할 필요가 있어 회고록 원문을 그대로 옮겨 6공 정부 교육정책의 진수를 헤아려 보는 거울과 잣대로 삼는다.

 

 

6공 정부의 교육정책 핵심

 

▲개인의 존엄성 강조

 

교육에 대한 나(노태우)의 철학이나 의지는 역대 대통령들, 그리고 대한민국 어떤 부모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래사회와 통일시대를 대비하고, 첨단과학기술 분야를 강화하고, 교육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는 등 교육 본래의 정책은 과거 정권에서와 마찬가지였다.

 

6공화국의 교육정책은 6·29선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의 국가관 교육과 함께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틀이 잡혔다.

 

나는 먼저 교원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조치들을 잇따라 취했다.

 

대학에 자율권을 부여해 국·공립대 총·학장 후보자의 선출권과 교수임용권 등을 대학에 위임하고 사립대 총장 및 승인에는 정부가 개입하지 말도록 했다.

 

등록금 입시제도 등에 대한 대학의 자율권을 대폭 확대했다.

 

이는 “대학 자율화 및 교육자치제를 조속히 실현한다”는 6·29선언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취임한 지 며칠 안 된 1988년 3월 4일 교육부(장관 김영식)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목포대학 등 4개 대학 후임 학장 임명안이 올라왔다.

 

나는 “국·공립대 총·학장은 해당 대학에서 추천한 인사를 제청하라”며 반려했다.

 

과거처럼 정부가 대학 책임자 인사까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육부 관계자들은 ‘전에 없는 일’이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전교조(全敎組)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한편으로 학원 행정엔 전례없는 자율을 보장했다.

 

이에 따라 1988년부터 대학총장 직선제(直選制)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총장을 학교 자율로 선임하라고 한 것은 꼭 직선제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대학들이 너무 앞서갔다.

 

선거가 민주주의라는 도식(圖式)에 사로잡힌 것이다.

 

대학이 독립적인 인사권을 확보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빠르게 변화하다보니 학내 파벌이 조성되고 교수·학생 간에 갈등을 빚는 등 직선제의 부작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5·16 이후 중단이 되었던 지방교육자치제를 30년 만에 부활시켰는데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학생들의 소요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학 본연의 면학(勉學)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1990년에 개설한 교육방송은 국민들에게 평생교육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면서 교양·사회교육 매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나는 특히 교육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꾀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대통령 직속으로 ‘교육정책자문회의’를 두었다.

 

1989년 2월에 발족한 이 자문회의는 여섯 차례에 걸쳐 독학(獨學)에 의한 학위(學位) 인정, 남북통일에 대비한 교육 등의 정책 개선 방안을 건의해 왔는데, 나는 그 대부분을 채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가운데 독학(獨學)에 의한 학위 취득은 내가 전부터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을 자문회의에서 연구해 올린 것이다.

 

나는 1988년 12월 당정(黨政)회의에서 “대학에 다니지 않고도 독학에 의해 대학졸업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조기에 시행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이는 능력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대학에 다녀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일부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나는 통신과 교육방송을 활용하면 교육기관에서 수업받는 것 못지않게 학업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믿어 과감하게 추진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개방대와 방송통신대학, 사회교육 시설 등을 확충해 ‘평생교육’의 개념을 정착시키는 데 나름대로 힘을 쏟았다.

 

교육정책자문회의를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9년 6월 나는 자문회의석상에서 ‘교육환경 개선 특별회계’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매년 3700억 원씩 총 1조11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전국 각 학교의 환경과 시설이 대폭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듣고 있다.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

 

학교에서 컴퓨터 교육은 -물론 전부터 일부 실업계 학교에서는 하고 있었지만-6공화국에서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보화시대가 급진전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학교 차원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범정부적으로 학교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1989년 7월 학교 컴퓨터 교육 지원·추진 계획을 발표했는데 막대한 예산을 조달하기가 쉽지 않아 초등학교에 대해서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는 교사들의 수도 날로 늘어났다.

 

“이제는 선생 노릇 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는 예비교사들의 푸념이 내 임기 중에 나오는 일이 생겼다.

 

국립사범계 대학을 나오면 자동적으로 교사자격증을 받아 정년때까지 교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우선 임용 조항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교사 공개임용고사제를 앞당겨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명감이 투철하고 실력이 우수한 교사들을 양성·임용하는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각급 학교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통하던 학교장 임기제를 실시한 것도-당사자들에게는 불만의 대상이 되었지만-학교행정을 민주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조치였다고 믿는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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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임기제 내건 교총회장이 장관차지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5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사 3불론으로 전교조에 맞불 주효

임기제 실시에 주눅든 교장들 냉가슴

교원 중국연수 빗나가 재정허비 고민

- 국회 법안심의 때 여당의원 “不知不知長官” 혹평-

31대 윤형섭 교육장관

<1990. 12. 27~ 92. 1. 22 재임>

 

취임하던 날 교육부로 개칭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2월26일 정원식 문교부장관을 경질하면서 정부조직법을 개정하고 문교부를 교육부로 개칭했다.(법률 제4268호)

 

교육부 명칭은 1991년 1월1일부터 시행했다.

 

다시 말해 문교부 시대는 제30대 정원식 문교장관 재임 기간으로 마감했고 교육부 시대는 제31대 윤형섭 장관으로 하여금 열게 했다.

 

개각을 하루 앞둔 12월26일 오전 일찍 장관실에 들르니까 분위기가 침울했고 당시 김홍원 비서관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출입기자들도 벌써 개각의 낌새를 알아차렸고 후임 장관을 알아내기 위해 정보망을 가동했다.

 

필자(출입기자)도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 조규향 차관을 만나 떠보았더니 “오시면 가시는 거고 가신 분 대신 새로운 분이 오시겠지요”라고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이전까지 개각은 내정자를 매스컴에 흘려 인물검증의 최종단계로 삼았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은 그래봤자 흠집만 드러나게 마련이므로 발표 때까지 보안을 유지했다.

 

이날 필자가 조규향 차관을 통해 확인했던 것은 조 차관이 청와대 정책특보인 박철언 공안검사 출신이 조직해서 가동한 ‘월계수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박 특보는 바로 전의 전두환 대통령 때 검찰에서 발탁되어 청와대에 입성했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과 대통령 선거에서 활약이 컸고 이 때 사조직인 ‘월계수’회원이 전국의 고위직 공무원 등 요직에서 6만여 명이 가입해서 영향력도 컸다.

 

월계수회의 조직은 당시 한국교총의 사무총장과 간부들도 일부 가입했고 이들이 인사에서 승진과 영전할 경우 월계수회 이름으로 축하 난분을 보내와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부와 긍지로 삼아 배후를 과시했다.

 

이처럼 월계수 회원들만 알 수 있는 교육부 신임 장관을 조규향 차관의 몇 마디에서 알만했고 집히는 데가 있어 그 길로 교총에 달려갔다.

 

마침 교총회장실에 윤형섭 회장은 자리에 있었고 비서는 “지금 중요한 일 때문에 누구도 들여놓지 말라고 했다”면서 “바로 뵙는 것은 어렵겠다”고 난색이었다.

 

이에 필자는 “기자가 회장을 만나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라고 내뱉듯 말하고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윤 회장은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서랍을 열어 급히 집어넣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밖에서는 오늘 오후 발표할 개각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한다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하고 무례했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해합니다. 기자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요”라고 응수했다. “지금 서랍에 감추는 것이 취임사 초안입니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피식 웃으면서 “눈치 하나는……” 말끝을 흐리더니 “알고 왔으면 좀 도와주시오” 했다.

 

이에 필자는 “취임사는 간단 명료하게 할 말만 하시고 덕담으로 채우시면 될 것입니다. 이임사라면 길어도 흉될 것이 없는데 지금까지 보면 경우가 바뀐 것에 아쉬움이 따랐다”고 조언하자 “간단한 게 좋겠군”하면서 흐뭇한 표정이었다.

어쨋든 1990년 12월27일 윤형섭 장관의 취임사는 간단했고 교육부 직원들도 좋아했다.

 

교장임기제 실현 작심 굳혀

 

윤 장관은 취임 후 1991년을 맞이할 신년구상으로 마음이 바빠졌고 당시 교육계는 전교조 교사의 대량 해직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교사3불론’이 어필해서 장관자리에 오르긴 했어도 학교장 중심 학교경영 정책에 편승한 일부 초·중·고 교장의 오만과 권한 행사가 지나쳐 교육현장은 전교조 활동을 오히려 반기는 사태로 교사들이 환영했고 교총회원이 탈퇴하는 것으로 이어진 악순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교총회장 때 작심했던 ‘교장임기제’를 실현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실제로 윤 장관이 교총회장 선거에 출마해서 경합자를 압도하고 당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교장임기제’공약이었고 선출권을 가진 교총 대의원 중 70% 이상은 교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에 교장들은 개별적으로 대항해서 반기를 들지 못했으나 마음은 지지하기 어려워 윤 장관의 반대세력에 의존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드디어 교육부 입법으로 ‘교장임기제’도입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고 심의과정에서 교장출신 의원과 교장회의 로비를 받은 의원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경기도 교육감출신 황철수 의원은 여당이면서 윤 장관의 교장임기제 제안에 반대했고 국회 심의 때 질의를 통해 “임기직은 선출이 전제인데 교장을 선출 보직제로 하자는 요구를 초래할 것”이라며 “자격직인 교장을 임기제로 바꿀 경우 선출을 막을 방안이 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윤 장관은 “너무 교장이 되기에 열중해서 폐단이 크므로 일찍 하지 말고 경력에 따라 한차례만 재직하고 떠날 수 있도록 정년과 맞추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황철수 의원은 계속 보충질의를 통해 “반드시 선출 보직제 요구가 있을 것”이라면서 “장관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부지부지(不知不知)”라고 몰아세웠다.

 

결국 교장임기제 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어 오늘에 이르고 4년 임기에 한차례 중임으로 8년 재직할 수 있게 하면서 연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하나 고민은 노태우 대통령의 특단으로 중국과 국교는 수교되지 않았어도 외화벌이를 위해 관광객을 대량으로 유치한 것에 우리도 초·중등교원들이 중국을 돌아볼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에 따라 연중 교원 시찰단이 중국에 들어가서 그 곳 학교의 교육편제와 수업참관 등 실상을 보고 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시찰에 나선 교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황청심환 등 한약과 술과 녹차를 사들고 오기 바빴고 이런 관광연수에 교육재정이 허비되고 있음에 윤 장관의 고심이 컸다.

 

반면, 뜻이 깊은 교원들은 중국에서 교원은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교육목표가 ‘흥취(興趣)교육’으로 우리의 진로·적성 탐색 교육과 유사한 것을 보고 왔다.

 

또 중국의 초·중·고교는 하루 정규수업이 4시간이었고 2시간은 흥취교육을 위한 동아리활동과 1시간은 하루 수업을 복습하면서 나머지 1시간은 뒷날 수업에 대비한 예습으로 마쳤다.

 

교원들은 임명 후 발령을 받으면 그 학교에서 정년(60세)까지 재직하고 하루 8시간 가운데 7시간은 학생을 지도하고 나머지 한 시간은 당원교육으로 일과가 끝난 것을 알았다.

 

이에 윤 장관은 중앙교육연수원에 교원의 중국연수 시찰을 바로잡을 ‘선험자 특강’을 신설케 하고 먼저 가서 보고 온 교원들로 하여금 유의할 사항을 일러주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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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 다음 정부 이을 3당 통합 정계개편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3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여소야대 국회의석 여대야소로 역전

교총회장 입각티켓설 후문 나돌아

사대출신 문교차관은 법통으로 교체

-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 민자·평민당 양분-

30대 정원식 문교장관

교총회관 연두보고에 의미

 

<전호에서 계속>

교육과정 개정안은 당시 문교부의 함수곤 편수국장이 보고했으며 정원식 장관도 서울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교부장관의 자문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어 연두보고가 어렵지 않았다.

 

이날 교총회관에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연두보고를 받은 노태우 대통령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교총의 상당수 평직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교총의 어용설이 달갑지 않은 상황에 청와대 연두보고회장으로 이용된 것은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교총 사무국 직원이라고 해서 모두 전교조에 적대감을 갖는 것도 아니었다.

 

간부직은 어쩔 수 없이 회장과 사무총장의 의중에 반하지 않고 따라 주는 것으로 직장인의 윤리를 지키고 나약했다.

그러나 하위직원 대부분은 교총회관에서 청와대 업무보고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긍지로 삼거나 자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총의 사무국 직원 채용이 공채로 바뀌면서 정실인사가 배제된 만큼 유능한 직원이 늘었고 간부들도 이를 의식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교총나들이에 힘입어 전교조에 미칠 반사적 영향을 기대했으나 생각만큼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다.

 

교사3불론의 대상에는 교총의 회원교사들도 남의 일 같지 않아서인지 공감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윤형섭 교총회장을 옹립했던 교총의 핵심세력은 “다음 개각 때 문교부장관으로 입각할 티켓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기세등등했다.

 

이와 같은 루머가 파다해진 상황에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심복들도 만만치 않게 맞대응했다.

당시 문교부의 어떤 국장은 “대통령이 전교조 때문에 교총회관에서 문교부 연두 업무보고를 받은 것을 갖고 오버센스한다”며 “교총사람들 수준으로 비쳐질까 걱정”이라고 핀잔이었다.

 

어쨌거나 교총의 윤 회장은 싫지않은 기색이었고 그날로부터 문교부가 발표한 교육정책 등 현안 대책을 챙겨 대안 수준으로 제시했다.

 

이에 문교부 간부들은 “벌써부터 장관 여행연습이냐?”고 반문섞인 어투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

 

 

뜻밖의 문교차관 경질 후문

 

윤 회장의 의중에 관계없이 정원식 장관에게는 불편한 관계로 이어지면서 정부 인사에서 문교부 차관의 경질이 뜻밖에 이뤄졌다.

 

차관 경질은 그 해(1990년) 3월 19일 발표되면서 장기옥 차관 후임에 서울법대 출신 조규향 차관이 3월 20일 취임했다.

 

전임 장기옥 차관은 정원식 장관이 총애한 같은 서울사대 출신인 점과 달랐다.

장기옥 전 차관은 1988년 12월 13일 제35대 문교차관으로 임명되어 1년 3개월 재임했다.

 

정원식 장관이 88년 12월 5일 입각한 날로부터 8일 만에 임명된 것으로 후임 조규향 차관과 함께 이·취임식을 가졌다.

 

이 때 이임사에서 “조규향 후임 차관은 행시합격 후배로 한 번도 나를 추월한 적이 없었다”면서 “다른 사람보다 조 차관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떠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볍다”고 말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기 어렵게 모호했다.

당시 문교부차관 경질을 놓고 부내 간부들은 “정통사범대학 출신 차관에서 법통으로 바뀐 것에 의미가 있다”면서 “전교조에 대한 대응책이 강경으로 급선회한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기자들에게 묻지도 않은 것을 반문하는 등 미묘했다.

 

정작 본인(조 차관)은 표정이 어둡고 고뇌에 찬 모습인데 반해 휘하의 간부들 가운데 강경파가 이처럼 차관인사에 민감한 것은 이변이었다.

 

그러니 출입기자들은 전교조에 대한 법적 대응책이 나올 것에 촉각을 세우며 차관실의 침묵을 지켜보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3~4월은 노동계의 춘투가 시작되는 때였고 5월과 6월에 이어 7~8월은 대학가의 시위가 절정에 이르면서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앞장선 가투 시위도 열기를 뿜었다.

 

 

3당 합당의 여소야대 타개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에 5공 청산을 마무리짓고 1990년에 접어들면서 국회의 여소야대 타개책과 차기 대권인계를 위한 3당 합당작업에 나섰다.

 

정치권의 동향에 넓은 귀를 갖지 못한 교육계는 노대통령이 교총회관에서 문교부 연두 업무보고를 받은 것에만 관심이 쏠린 것으로 그 정치적 향배는 가늠해보기 어려웠다.

 

이 와중에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가 합의하고 민정당과 합당으로 정계를 개편했다.

이로써 두 야당은 여당으로 길을 바꾼 셈이었고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만 이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3당 합당을 이룬 노 대통령은 1990년 1월 3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요지는 “사흘 전인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5공 청산 문제가 종결되었으니 더 이상 과거 문제를 재론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에 다음 날인 1월 4일 김영삼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지방자치제에 앞서 정개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 보수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써 노 대통령의 의중과 궤를 같이했다.

 

노 대통령은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했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민정당의 당직을 개편해서 대표위원에 박태준의원, 사무총장에 박준병의원, 국회 원내 총무에 정동성의원을 임명했다.

 

이어서 김종필·김영상 두 총재를 1월 6일 골프장에서 만나 회동하고 정계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데 기본인식을 같이 했다.

 

반면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반대 의사를 갖고 있어 난관이었다.

 

1990년 1월11일 노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서 오찬을 나누면서 단독회담을 갖고 ‘광주 보상 문제’와 ‘민생문제’등 광범위 의견을 나눈 끝에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하고 웃으면서 가볍게 의중을 떠보았더니 “노 대통령의 심중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여당과 합친다는 말이 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어려워질 것입니다.

 

비록 여소야대의 4당(민정·공화·민주·평민) 체제지만 협조할 것은 해드릴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노태우 회고록 上권 485페이지 수록)

 

노 대통령은 그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대중 총재는 그날 회담 준비를 치밀하게 해왔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내가 말한 것을 일일이 메모하며 빠짐없이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김대중 총재는 매우 현명하고 듣던 대로 머리가 치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국정 전반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고 거기서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리해서 회담이 끝난 후에 국민들에게 발표할 것으로…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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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협과 민중교육 “不法化 措置” 엄명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5회) -

○… 본고는 이달 16일이 되면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되는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노태우 대통령 첫 문교장관에게 불호령

주도교사 서울사대 출신 장관 제자들

차관 임명 때 교육비서관 통해 극비통고

- 무크지 ‘민중교육’ 불티나게 팔리자 검거선풍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함께 걷는 民主主義 다짐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국민과 함께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저는 국민을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끌려 다니는 대통령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꿈과 아픔을 같이 하는 국민의 동행자, 이것이 제가 진실로 추구하는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함께 걷는 민주주의’의 출발선 상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오늘 영광스러운 이 단상의 주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씩씩하게 그리고 단란하게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나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 ‘희망의 나라로…’가 그리는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 가득한 나라’를 향하여 함께 나아갑시다.

 

국민 여러분!

저와 함께 전진해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1988년 2월 25일 대통령 노태우>

 

전교협과 민중교육론 대처

▲1988년 3월 5일 그해 2월 25일 노태우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임명된 김영식 문교부장관은 5공의 마지막 김상준 문교차관의 후임 때문에 고심하게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차관 임명은 장관의 의중이나 제청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전부처의 차관인사가 이런 것도 아니어서 대통령이 임명한 뒤 취임하면 장관은 보좌를 받는 것 이상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장관 취임 후 9일 만인 3월 5일자로 문교부 기획관리실장 출신 장병규 차관이 임명되었다.

이날 장 차관은 취임식 전 장관실에서 김 장관과 첫 찻잔을 들면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기 무섭게 교육비서관을 통해 세 가지 당부를 전달받았다고 보고했다.

 

이에 김 장관은 “대통령께서 취임사에 담으신 것 말고 다른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 차관은 “3개항인데…”하면서 말끝을 잇지 못하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1항은 개인의 존엄성 교육이고, 2항은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 추진입니다. 그리고 3항은 전교협과 민중교육론 대처 및 불법화 조치입니다.”

 

대답을 듣고 난 김영식 장관은 가슴이 답답하고 눈이 흐려지는 중압감에 숨이 막혔다고 한다.

 

전교협은 ‘전국교사협의회’ 약칭으로 1987년 광주에서 YMCA교사회를 조직해 서울의 YWCA교사회와 합친 뒤 민교협으로 거듭나면서 새롭게 결성되어 가입교사가 10만 명을 헤아렸고 특히 서울에서는 당시 이수호 신일고교 교사가 이끈 것으로 1989년 5월 31일 출범한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었다.

 

김영식 문교장관은 바로 이들과 싸워야 할 주적이 되는 셈이었고 이에 가입해서 활동을 주도한 교사 대부분이 서울사대 출신으로 직접 가르쳐 전국에 내보낸 제자들과 대치하게 되는 처지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는 어느 대목에도 없었던 것이 차관을 임명하면서 교육수석비서관을 통해 내린 불호령이므로 진퇴양난이었다.

 

차관을 통해 엄명한 형식의 3개항 통고 중 마지막 3항에서 당황한 것은 장관일 뿐, 문교부 내부에서는 이미 준비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장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통고된 사황은 차관을 중심으로 실천에 옮기게 되었으며 대통령이 엄명한 ‘대처 및 불법화 조치‘의 이행 여하에 따라 장관의 역량이 평가되면 개각할 기회에 경질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민중교육’은 1985년 5월, 실천문학사에서 잡지처럼 엮어 발행한 무크지였다.

 

단행본 형식으로 그 내용은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하에서는 추호도 용납될 수 없었고 그래서인지 단행본 이름도 ‘민중교육’이었다.

 

모든 출판사에 대한 당국의 감시가 삼엄한 때라 서울에서 편집하지 못하고 전남 광주시내 모처에서 엮어낸 것으로 신선했다.

 

특히 ‘민중교육’ 제목 밑에 1이라는 숫자를 붙여 속간을 예고한 것에 경찰과 정보기관의 신경이 곤두섰다.

내용 중 필자들은 ‘5월 詩’ 동인이었던 김진경·윤재철·고광헌 등 현직 중·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충청지역의 교사문인 모임이었던 ‘삶의 문학’ 동인들도 합세하고 강병철 교사가 ‘비늘 눈’이라는 소설을 실었고 안면중학교 교사였던 조재도가 ‘무엇으로 가르칠 것인가’ 등 4편의 저항시에 당국이 긴장했다.

 

이밖에도 송대헌 교사가 ‘야학일지’를 썼고 황재학, 전인순 교사 등은 학생들이 쓴 글을 모아 교육현장의 비리와 불합리를 고발했다.

 

놀라운 것은 영동중학교 민병순 교장이 쓴 ‘교단일지’를 보고 문교부 관료들과 시·도교육청의 일부 교육감, 장학관, 장학사들이 발끈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처럼 부정기 간행물인 지하서적 ‘민중교육’은 시중 서점에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렸고 입소문을 타고 교사들이 사가는 바람에 중·고생들도 덩달아 책방에 몰렸다.

 

5월에 나온 ‘민중교육’은 6월이 되면서 절판되었고 학부모들까지 이 책을 구해 보기 위해 서점에 몰리면서 신군부 정권에 위협을 주는 수준으로 휘몰아쳤다.

 

▲1988년 6월 25일 당시 김재규 서울여의도고등학교 교장은 “민중교육은 불온한 지하서적”이라면서 서울시교육청에 찾아가 학무국장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학무국장은 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전교협 감시담당 장학사를 불러 “집필한 교사 중 서울지역 학교에 재직한 교사의 인적사항을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김 교장이 주고 간 ‘민중교육’은 서울시교육청에 출입한 중앙정보부 조정관에게 “내용을 검토해 달라”고 의뢰했다.

 

이 일이 있은 바로 다음날부터 민중교육지에 기고했거나 특집 좌담회에 참석한 교사들에게 검거선풍이 불어 닥쳤다.

이어서 KBS 등 국·공영방송이 해설을 곁들인 특집방송으로 ‘민중교육’을 매도했고 공권력에서 동원이 가능한 국내의 모든 매체가 빠짐없이 거들었다.

 

그러면서 “무크지 민중교육에 실린 내용은 대학의 운동권학생들이 내세운 3민투(민주쟁취·민족통일·민중해방투위)와 다르지 않게 내용이 유사하다”면서 성토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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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일방적으로 이끈 대통령 불원”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4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이면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되는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국민의 동행자로 꿈과 아픔 같이해야

자유 평등 행복이 가득한 나라 되게

이것이 진실로 추구할 대통령의 모습

- 뛰어난 한사람 보다 평범한 여러사람의 협력 필요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노대통령 미래지향 취임사

 

‘아울러 사회정의의 실현을 가로막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어떠한 형태의 특권이나 부정부패도 단호히 배격하겠습니다.

폭력과 투기와 물가오름세를 반드시 막고자 합니다.

 

부의 부당한 축적이나 편재가 사라지고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과 결실을 거두면서 희망을 갖고 장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입니다.

 

민주개혁과 국민화합으로 이제 우리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화합은 정부의 정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피는 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온 국민의 화합을 정부차원의 해결과제로만 미루지 맙시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너그럽게 풀어 나가야 할 문제로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이런 뜻에서, 앞서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을 끌어 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에게 자제와 아량을 보여야 합니다.

 

50억 인류 서울올림픽 축제

국민 여러분!

우리 겨레의 큰 경사인 서울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50억 인류의 평화대축제가 바로 이 땅에서 열리게 됩니다. 세계 속의 한국을 새롭게 드러내는 민족 재탄생의 자리에, 너와 내가 따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합심 협력하여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에게 길이 기억될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승화시킵시다.

서울올림픽은 민족사적 의미에서, 이를 계기로 우리가 민족통일의 항로로 진입한다는 데 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물줄기를 타고, 12년 만에 처음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의 세계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이 화해의 거대한 합창은 한반도에 마침내 통일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렁찬 합창 소리에 화답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국제평화와 협력의 외교적 노력을 더욱 더 쏟고자 합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과의 유대를 더 한층 강화하는 한편 제 3 세계와의 우의를 더욱 굳게 하겠습니다.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국가에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게 하여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것입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북방에의 이 외교적 통로는 또한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분단의 조속한 해소를 열망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민족통일의 길은 낙관할 수 있는 길도 아니요, 비관 할 길은 더욱 아닙니다.

 

오로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길일 뿐입니다.

 

때마침 우리 내부에서도 민족의 자존을 높이려는 분위기가 크게 자랐습니다.

이 기운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통일과 세계적 진출을 북돋을 힘찬 원동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자존의 바탕 위에서 민주역량을 다지고 안보태세를 강화하면서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기회는 그저 기다리는 자에게보다 착실히 준비하는 자에게 먼저 온다는 교훈을 항상 기억합시다.

 

저로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길이 보인다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개의하지 않고 방문해 어느 누구와도 진지하게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 당국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공산국가들조차 거부하고 있는 교조적 이념을 민주의식이 체질화된 이 땅의 자유 시민들이 수용하리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폭력이 아니라 대화가 분단을 해소시키고 민족의 재결합을 가져오는 정직한 지름길임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대화의 문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열려 있음을 확인합니다. 민족자존의 새 시대에 부응하여, 대화하며 공존하고 공존하며 협력함으로써 휴전선에도 화해의 봄을 가져옵시다.

 

그리하여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함께 통일의 열매를 거둡시다.

 

관련 국가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당사자들이 민주적 방식을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의 전령사가 그 어느 곳으로 부터든 서울을 방문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특별 대우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사람의 한걸음에 힘실어

국민 여러분!

 

우리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겨 주는 것으로 시작했던 20세기는 그 극복의 토대를 마련해 준 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수평선 너머에 활짝 핀 통일조국의 미래상이 우리를 손짓하고 있습니다.

 

이미 치솟고 있는 우리 국민의 저력과 민족적 자존을 국가적 도약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활활 태울 때 우리 조국은 분명히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끄는 세계의 젊은 거인으로 뛰어오를 것입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손에 넣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열과 국민이 희생을 했고 땀을 흘렸던 것입니까.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어느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주보다 평범한 상식을 지닌 여러 사람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상식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라의 발전이 곧 국민 개개인의 자유·풍요·행복으로 이어지는 ‘복지의 시대’입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이 거룩한 단상에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자리는 국민 여러분이 만든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제가 서 있는 것은 국민 여러분의 명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와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는 국민 여러분들로부터 별개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저는 오로지…’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사회문제 현안 중 교육과제 최우선 강조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1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로 활동 48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
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해 실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학교주변 정화 청소년 교육환경 개선
대통령취임준비위의 국정 방향에 무게
교육통해 여성 지위향상 등 과제 소화

- 4대 국정지표에 담았던 ‘교육창달’ 쉽지않아 -

29대 김영식 문교장관
<1988. 2. 25~ 88. 12. 4 재임>

사회문제 중 교육과제 개선

<전호에서 계속>
이를 위해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영세상인을 보호한다고 명시했다.
세번째, 주요 사회문제의 개선은  국민의식개혁운동을 전개하고 당면한 교육과제를 개선한다고 했다.
노태우 정부의 교육과제 개선은 취임 2년차 문교부장관의 연두 업무보고회를 한국교총 강당에서 갖고 청와대 요리사를 동원, 교총식당에서 오찬을 함께한 것으로 달랐다.

김영식 장관이 떠난 이듬해 정원식 장관의 첫 업무보고를 받았을 때 일이었다.
6공 노태우 정부의 사회문제 중 교육과제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은 청소년 정책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앞서 노 대통령의 취임 전 ‘민화위’에서 채택, 건의했던 것으로 문교부의 주요 현안이었다.
청소년 교육환경을 적극 개선하고 여성 차별을 철폐하는 등 여성의 지위향상은 교육을 통해 펼쳐 심어가도록 했었다.
이는 곧 교원의 성비균형을 깨고 교사양성정책에서부터 남·여 비율없이 성적순으로 선발하는 것에 무게를 담았다.

그 이전까지 전국의 국립사대와 교대입학에서 3대 2의 비율로 남학생 우위였고 교사 임용이나 현직 초·중등교원의 교감·교장승진 및 교육전문직 선발에까지 남성위주로 여교원을 차별했다.

또 체육교과의 경우 여교사 보다 남교사 우선으로 성비적용을 구실로 삼았고 숙직업무 때문에 남 교사가 줄어드는 것을 우려했다.

한편, 청소년의 교육환경개선은 학교 주변의 유해업소 정비 등 기존의 조치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대신 행정의 구호나 정책에서 역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개선될 만큼 쉽지 않았다.

특히 교직의 성비 때문에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는 데 저해가 된 것으로 교대와 사범대학의 신입생 선발을 성적순으로 강화해서 전국이 공통으로 여학생 수가 급증했다.

제주도는 교대 입학에서 남학생이 한사람도 합격하지 못한 때가 있었고 교감·교장 승진에서 여교원이 한사람도 없게 되면서 교대는 남학생이 없고 학교는 여교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교대 입학은 성적순에 의한 결과였고 여 교장은 교감 자격강습부터 차출에서 차별된 것이 원인으로 3다도 중 여다의 고장답지 않았다.
 

노대통령 취임 준비위 얼굴들
제13대 노태우 6공 대통령의 취임 준비위원회는 1988년 1월 18일 삼청동 금융연수원 건물에 사무실을 낸 것으로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의 인수위와 다르지 않았다.

위원장은 대선 때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이춘구 민정당 의원이 맡았고 준비위원으로 최병렬, 현홍주, 이진, 김종인, 김중위 민정당 의원을 임명했다.

이에 강용식, 김학준 의원이 추가되었다.
노 당선인은 준비위원회에 “늦어도 2월 중순까지 정부 조각 및 국정운영 기본 계획을 수립해서 내 놓으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새 대통령상 정립을 위한 보고서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대통령과 내각·정당·국회·국민과의 관계설정과 6공화국에서 대통령의 직무수행 및 국정운영 방향도 마련토록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황해도 출신 홍성철씨가 낙점되었다.

지역편중 우려없고 인맥형성을 하지 않을 것이란 평에 따랐다.
조각을 위한 인선은 정부 부처와 각 기관의 협력을 얻어 광범위인사자료를 수집했다.
노 대통령은 후에 “이를 바탕으로 총리와 각료 후보를 인물별로 분류해서 각종 참고자료와 대조하면서 정리해 나갔다”고 밝혔다.

총리는 3~4명으로 압축된 후보 중 자신의 고향인 대구·경북출신은 배제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이현재 서울대 전 총장을 내정하고 홍성철 비서실장을 집으로 보내 승낙을 받아왔다.
그리고 내각 인선도 매듭짓고 문교장관은 김영식 한국교육개발원장을 확정했던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힌 대통령취임준비위의 역할은 6공의 국정방향을 잡는 데 기본이 되도록 미리 지침을 내린 것에 근거했다고 한다.

그 때 지침은 6개항에 달한 것으로 첫째가 일체의 권위주의 요소 제거였다.

이를 위해 ①청와대 기구개편 고려 ②대통령 의전과 언행개선 ③모든 행사의 형식과 경직요소 제거 ④언론관계 개선(부드러운 접촉) ⑤청와대 개방이다.
두번째는 민주·통일, 균형발전, 교육창달 등을 중점으로 하는 국정지표의 확정이었다.
이는 4대 지표로 집약했다. 1988년 5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지시된 것은 이의 압축이었다.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