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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뿐인 百年大計 한달새 長官 세 번 바꿔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9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단 사흘 머물다 갔어도 대학교육에 변화

불과 10년 전 교육사에 남긴 역량 실감

고교 재학 중 선 이수자의 학점화 획기적

 

-장관 공석 중 차관이 나서 교육자치 혁신 끌어내-

 

노무현 참여정부 세번째

47대 이기준 교육부장관

 

<2005. 1. 5~ 2005. 1. 7 재임>

 

대입시제 고교 先修학점 유인

 

 

<전호에서 계속>

취임식 때 “대학입시는 각 대학의 선발 자율이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고교내신이든 수능이든 간섭하지 말자“고 했던 이기준 장관의 첫마디는 재임 3일로 끝났어도 효과가 있었다.


특히 “대학과 정부(교육부)가 대치해서 갈등을 빚지 말고 양쪽 모두 한 발짝씩 양보하고 여건변화에 따른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제안했던 것은 대학측에서 크게 환영했다.


이 장관은 또 “대학들이 원하는 학생들을 뽑는데 그 선발의 기준에 따라 어떤 학생이 우수한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면서 “내신과 수능, 대학의 독자적 방식 등 다양한 선발이 보장되어야 함에도 정부가 내신의 반영비율까지 일률적으로 정해 주면서 이래라 저래라 강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대학은 입학시기에 학생 선발에만 신경을 쓰지 말고 받아들인 학생을 훌륭한 인재로 길러 배출하는데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므로 이에 소홀하지 않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이는 대학에 대한 지도 감독의 책임도 포함된 것으로 교육부 스스로 책무이행이 부실했던 것을 넌지시 꼬집은 셈이다.


대학과 교육부가 입시에만 매달리지 말고 재학 중 학사관리 등 책무가 있음에도 쌍방이 충실하지 못한 것을 자책한 것에도 반응이 좋았다.


이에 공감하고 영향받은 대학에서 ‘고교 선수학점’ 채택으로 연계한 것은 압권이다.

이 장관이 취임 후 3일 만에 떠난 것과 달리 총장으로 재임했던 서울대를 비롯하여 세칭 명문 사립대학 대부분이 고교생이 졸업 후 대학에 들어와서 배울 학과의 내용을 재학 중에 미리 익혀 학점으로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며 이른바 ‘선 이수제‘였다.


이에 따라 2006학년도 입학 대상인 고3생 가운데 이들 대학이 제공한 과목의 선 이수자는 학점을 인정받게 된 것으로 시행 대학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상지대, 부산대, 한국과학기술원 등 8곳이었고 2005년부터 시범 운영했다.


이와 같이 선 이수제 도입에 호응한 전국의 고교가 상당수였으며 성적 우수자는 이들 대학에서 ‘표준교육과정’을 수료한 뒤 입학 이후의 학점으로 인정받았다.


표준교육과정 이수 기간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실시했고 수학, 물리, 화학, 생물과목 중심으로 강좌가 개설되었다.


학점은 15시간 당 1학점이었고 참여를 희망한 고교생은 그 해(2005) 7월 말까지 신청했으며 수강료는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고려대학교만 전액 무료였다.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지만 최단명 장관이 남긴 대입시제의 획기적 조치였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어 전한다.


이기준 장관이 단명으로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면 대입시 뿐만 아니라 대학과 교육부의 책무이행 등 관계 개선은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었고 아쉬움이다.


이로 미루어 교육부장관의 업적을 되돌아보면 재임기간의 길고 짧은 것에 차이가 있었다기보다 역량에 따라 다를 수 있었음이 실감된다.

 


그해 1월은 3장관 이·취임식


2005년 1월은 교육부 장관실에 역마살이 낀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처음 4일은 전임 안병영 장관이 떠난 것에 이임식을 치뤘고 5일은 이기준 장관의 취임식으로 장관실 복도에까지 축하화환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2일 후인 7일에 이임하면서 교육부 직원들은 4일에 이어 3일 만에 또 이임식을 갖게 되었다.

이기준 장관의 후임인 김진표 장관은 1월28일 임명, 취임했다.


이처럼 교육부는 그해 1월 한 달 동안에 장관의 이·취임식을 세차례 치른 것으로 장관이 떠나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일선 학교의 교사들은 모여 앉으면 “이게 교육부냐”면서 “30일 한 달이 30년 같다. 입만 열면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뇌이면서 장관을 한 달에 세 사람씩이나 바꾼 것에 할 말을 잃게 된다”고 비아냥거렸다. 때문인지 시·도교육위원회도 조용하지 못했다.


교육부와 제일 가깝게 있는 서울시교위에서 김귀식 의장이 한마디 하고 나섰다.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그는 교육부장관의 위상과 정책수준을 들먹이면서 “교육부가 이지경이면 학생과 교사들은 무엇을 바라고 기대할 수 있겠느냐?”며 치고 나왔다.


또 “교육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도처에서 난무한데 기왕에 외칠 것이면 ‘상향식 개혁’이 어떻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교육의 수준이 그 나라의 수준과 미래를 결정한다”면서 “그렇다면 우리 교육의 수준은 어느 정도 되겠느냐?”고 거듭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은 학생들 협동학습이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이고 세계 50개 유명대학에 우리나라 대학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0교시에서 마이너스 1교시까지 공부를 시키는 나라, 이것은 곧 우리나라 교육의 후진성을 뜻한 것으로 수치스럽다며 분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교육개혁의 중심을 교육현장으로 옮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실에서부터 개혁 바람이 불어 그 바람이 교장을 바꾸고, 교육청을 바꾸면서 교육부까지 바꾸는 상향식 교육개혁운동을 벌이되 교육주체들이 주도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무엇보다 우리 교육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맞수가 한 자리에 앉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성숙한 토론문화로 이끌어 지혜로움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교육계 안팎의 요청이 빗발친 가운데 장관이 세 번 바뀌면서 2005년 1월8일부터 27일까지 20일간 공석이었고 김영식 차관이 직무를 대행했다.

 


교육자치 행정체제 혁신 시동


2005년 1월11일 장관이 공석인 것과 관계없이 김영식 차관의 주도로 교육자치개혁을 위한 행정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교육부는 ‘교육자치분권팀’을 설치해서 가동하고 이날 수원시에 있는 경기도교육정보원 2층 세미나실에서 각 시·도교육청의 분권이양팀장과 담당 장학관이 참석하여 “지방교육행정체제 혁신방안을 연구하자”고 뜻을 모으면서 실무를 협의했다.


이 때 학교지원 중심 행정체제로 혁신할 것에 의견이 일치했고 전국의 지역교육청을 지원청으로 개편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경기도 교육청의 제2청사 설치와 의정부시에 경기 북부지역의 초·중·고교를 관장하는 제2부교육감을 두게된 근거였다.


이에 앞서 국회는 2004년 12월29일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을 의결해서 확정한 것과 연계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지속 가능 발전위해 대안학교 대안 모색”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7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대안교육 연구센터 설립해서 정책 창출

강소부국 오스트리아 빈 대학 유학 신념

교육과정 관련 현안 공동해법찾는 계기

 

 

-장관 후 TV출연 자제 가을 은행나무 정취 만끽-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대안학교 법제화의 장본인

 

<전호에서 계속>

‘정부가 직접 나서 교사양성을 어떻게 하고 콘텐츠를 어떻게 하겠다기보다는 대안학교 스스로가 하는데 측면 지원해 드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저는 대안학교를 법제화한 장본인으로서 결자해지의 각오로 해법을 찾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1997년도 당시 대안학교 운동을 이끌어 오셨던 분들은 어찌 보면 1세대 대안학교 운동가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들 선구자들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대안교육에 관한 새로운 철학과 지식, 이론, 필요하면 정책대안까지도 창출하는 소위 ‘대안교육 연구센터’를 설립하는 방안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우수 교사 확보라든가, 교육과정과 관련한 현안을 파악하고 공동의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대안학교들의 대안’을 모색해 보십시다.


이러한 혁신의 자세만이 우리 대안교육의 안정적 정착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져오리라 확신합니다.

끝으로, 그동안 저에게 대안교육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 주시고 영감을 던져주신 연세대 조한혜정 선생님, 박청수 원불교 교무님, 들꽃피는 마을의 김현수 목사님을 비롯한 대안교육 관계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드립니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대안교육을 향해 정진하고 계시는 원광대 이강래 선생님께는 이 자리를 빌려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004년 12월 23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안병영 드림

 

 

미국 아닌 오스트리아 유학


안병영 전 장관은 올해 5월15일 펴낸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 저서에서 1960년대 한국에서 ‘외국유학’하면 누구나 당연히 미국을 연상했으나 오스트리아를 택한 신념을 서슴없이 밝혔다.


미국은 역사가 짧아 제도 실험의 경험이나 정책사례의 다양성이 떨어져 자연과학도라면 몰라도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굳이 그 곳으로 유학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제국에서 인구 7백만 명의 약소국가로 전락했지만 나치의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까지 의학 및 자연과학과 더불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논리학과 철학, 경제학, 법학 등 학문마다 고유한 학파를 형성했고 특히 프로이드, 후설, 비트겐슈타인, 노이라트, 슘페터, 포버, 켈렌 등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가장 독창적 학자들의 이론이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서 싹트고 영글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실로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고 한다.


또한 학문과 문화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앞서가던 빈 대학의 전통도 크게 사로잡았다는 것이며 그 곳에는 무언가 학문적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신비의 샘이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이 밖에도 당시 이 작은 나라가 자신을 전율케 했던 또 하나는 동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4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던 나라가 10년간의 끈질긴 정치협상 끝에 기적처럼 쟁취한 ‘중립화 통일’이었다고 꼽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던 분단국가의 젊은이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어서 1965년 10월4일 오스트리아 빈 대학으로 가는 유학길에 올랐다.

 


두 번 장관직 때 일화 털어놔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한 번씩 두 번 교육부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있었던 일화도 대충 털어놨다.

장관을 하다 보면 일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외부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적잖은데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하고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정·재계의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는 리셉션 때는 더 그랬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뿐더러 분위기도 익숙하지 않아 잠시 머물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장관을 그만둔 후에는 TV출연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지금 살고 있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계절 따라 변하는 집 앞의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옛 연구실(연세대학교) 앞 은행나무가 오버랩되어 정겹게 다가온다고 했다.<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생소한 대안학교 법제화 운영 지원 앞장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5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해마다 쏟아져 나온 중고탈락 8만 명

계절형 방과후프로그램으로 희망키워

공교육과 달랐던 형태지만 육성의지

 

-2004년 12월 23일 교육부 홈페이지에 서한 남겨-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갈 곳 없는 중고생 대안교육

 

다음은 2004년 12월 23일 안병영 장관이 교육인적자원부 홈페이지에 ‘부총리 서한’으로 실었던 ‘대안학교 이야기’의 원문이다.


‘이야기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영산성지학교를 방문한 것이 그해 6월이었던가요.

전남 영광읍에서 학교를 찾아가는 길 양쪽으로 펼쳐지던 담배밭, 고추밭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소년원에서 금방 출소하여 여전히 보호감호를 받고 있던 아이들,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 가출하여 길가를 배회하던 아이들, 귀고리에다 노랑머리를 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었지요.


제도권 교육에서는 도저히 포용하기 어려운 이 아이들,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부터 저는 이들에 대한 또 한 번의 교육적 배려가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잠시 쉬었다 다시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간이역’ 같은 것.

그런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고뇌는 교육부가 1997년 초 발표한 ‘교육복지 종합대책’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해마다 중고등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7, 8만 명에 이르는 중도탈락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의 설립운영 방안, 바로 그것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대안교육’이니 ‘대안학교’니 하는 말들은 우리 모두에게 생소했던 때였습니다.

일부 시골 지역,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서 공교육과 전혀 다른 형태의 교육을 하는 움직임들이 있다는 정도였습니다.


기억에 새롭습니다만, 학교 모양을 갖춘 대안학교로는 홍성의 ‘풀무학교’ 영광의 ‘영산성지학교’ 그리고 지금의 간디학교 전신인 산청의 ‘숲속마을 작은학교’ 정도였고, 대부분이 계절형 또는 방과 후 프로그램이나 공동육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변산의 ‘공동체마을’이나 안산의 ‘들꽃피는 마을’은 우리 공교육과 전혀 접점을 찾지 못할 정도의 극단적인 탈학교 형태를 띠고 있었지요.


하여튼 전국을 다 뒤져도 20여 곳이 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우리 교육학계에서조차도 미국에서는 70년대 붐을 이루었다가 작금은 한물간 연구주제가 되어버린 대안교육에 관한 연구가 전무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불모지 60억 보조 불씨 지펴


그 와중에, 2004년 7월로 접어들어 ‘대안학교의 법제화와 60억의 재정지원’이라는 후속조치를 발표했으니, 대안교육 관계자들마저 반신반의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정신없이 앞서나간 교육부의 정책을 유사 이래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영산성지학교의 곽진영 교감 선생님, 숲속마을 작은학교의 양희규 교장 선생님, 들꽃피는 마을의 김현수 목사님, 두레마을의 김진홍 목사님, 그리고 푸른꿈학교 설립을 준비하시던 김창수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당시 우리나라 대안교육운동을 이끌던 재야 운동가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교육부의 대안학교 설립 허용과 재정지원 방침에 일제히 환호하며 동참 의사를 표명했을 때, 저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자그마한 기쁨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공교육 안으로부터 저항도 만만찮았습니다.


대안(alternative)이란 그 무엇을 대체한다는 것인데 공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말에 탐탁하게 생각할 리 없었겠지요.


공립학교로 지원될 교육예산이 대안학교로 흘러들어 가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교육부 안에서부터 들려왔습니다.


대부분의 정서는 “대안학교가 무슨 학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학교 설립인가권을 가지고 있는 교육청 공무원들의 냉소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제가 1997년 8월 5일(김영삼 정부) 장관직을 그만두고 다시 대학 강단으로 돌아가고 나서의 일이었지요.

그해 10월, 대안학교 설립을 허용하는 법이 마침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에 따라 이듬해 개교를 신청한 14개의 대안학교에 대하여, 인가 마감시한인 97년 12월이 다 가도록 “인가해 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교육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교육부와 달리 교육청 반발


여기서 제가 들은 얘기 몇 마디 해야겠습니다.

교육청 공무원들이 법 집행을 주저하는 상황에서, 저의 뜻에 공감한 교육부의 젊은 관료들은 제가 떠난 후에도 대안학교 챙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무원들이 대거 지방출장 가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IMF 직후였다지요.

해외연수 차 김포공항에 집결했던 교사들마저 집으로 되돌아 가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교육부 관료들은 감사원 감사를 받으면서까지 당시의 16개 시·도교육청 담당 공무원들을 데리고 영산성지학교와 간디학교로 내려갔습니다.


눈이 펄펄 내리던 12월 말, 두 곳의 대안학교에서 현장연수가 이루어졌답니다.

곽진영 선생님이 나서고 양희규 선생님이 나서, “공교육에서 소외받은 우리네 아이들을 지원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그들의 작전이 맞아 떨어졌던 것일까요.

교육청 공무원들은 감동을 받았고, 12월 29일 전남교육청이 영산성지학교를, 12월 30일 경남교육청이 산청 간디학교를 인가했다는 낭보가 교육부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6개의 대안학교가 1998년 3월에 개교하게 되었지요.


청원의 양업고등학교와 경주의 화랑고등학교는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부지를 물색하던 끝에 가까스로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대안학교들이 양적으로는 인가받은 학교만 24개에 이르고, 질적으로도 다양하게 성장했습니다. 저는 대학 강단으로 되돌아와서도 제가 불씨를 지핀 대안학교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

강원도 산골짜기 찾아 현광재 짓고 은거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4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하늘과 별을 이고 교육 걱정에 밤새워

5·30교육개혁 ‘2008대입시 개선’ 주도

때가 되면 누군가 떠맡아 이어 받을 듯

 

-후임 장관 10명 매달렸어도 당시 난제 현안 못풀어-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그 이후 11년이 흘러도 난제

 

 

<전호에서 계속>

안병영 장관이 교육부에서 떠난 것이 올해 11년 9개월이다.

 

지난 2005년 1월4일 경질되어 대학(연세대)에 돌아갔다. 그날 밤 교육부 김영식 차관과 실·국장들이 만찬을 함께 나누고 송별했다.

 

그 자리에서 “여러분과 헤어지는 것은 서운한 일이지만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대학의) 연구실이 있어 지금 내 가슴은 무척 벅차다”고 말했다.

 

안 장관은 그날 말한대로 대학 강단으로 돌아가 정년을 마치고 퇴임해서 지금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산골짜기에 산장(현광재)을 짓고 머물면서 부부가 함께한 것으로 노후를 맞았다.

 

고성군에 가기 전 잠간동안 속초시내 아파트에 살다가 여기까지 와서 도심에 묻힐바에야 서울의 아파트 숲과 뭐가 다르겠는가 생각하고 옮겨간 곳이 원암리 산장이다.

 

역대 교육장관 가운데 서울을 떠나 산골로 간 것은 제24대 김옥길 여성장관에 이어 두 번째이다.

 

김옥길 장관은 1979년 12월14일 취임하여 80년 5월21일 떠나면서 “문경새재의 산막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임식 때 “오늘 이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새 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만 듣겠다”고 했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쏟은 것으로 의미가 있었다.

 

지금 안병영 전 장관의 경우도 하늘과 바람과 새들의 노래와 다르지 않을 것에 의미가 있다.

 

안병영 장관 이후 들어온 교육부장관은 모두 10명이다.

이들 중 노무현 정부에서 4명(이기준, 김진표, 김병준, 김신일)이며 이명박 정부의 3명(김도연, 안병만, 이주호)과 박근혜 정부의 3명(서남수, 황우여, 이준식)째이다.

 

이처럼 10년이 넘은 세월에서 10명의 장관이 대학입시 정책과 씨름을 했으나 해결보다 난맥상은 현안이 되고 있다.

 

안병영 장관은 이미 김영삼 정부의 ‘5·30교육개혁’때 기틀을 잡아 주었던 노하우가 있었고 두 번째 입각한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총리 때 ‘2008 대입시 개선’을 주도한 것으로 차별화 된다.

 

이명박 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대입시 정책의 핵심 가운데 기업의 사내 대학은 눈길을 끌었다.

 

이는 고교교육의 정상화가 뼈대였던 ‘2008대입시 개선’과 맥락이 같다.

 

더러는 유수한 기업에서 특성화 고교의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졸업 후 채용과 사내대학 입학을 보장한 것으로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현실은 사내대학과 같은 입시 대책마저 증발된 듯 행방이 묘연하다.

그래서 우수한 고교 졸업생의 진로가 막히고 암담해지면서 누가 명문대학에 가느냐가 현안으로 교육 불평등의 해법 찾기에 애를 태우고 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길거리에서 국화빵을 구워 팔아서 학비를 마련했던 고학생이었던 것이 새삼 화제가 되기도 한다.

 

 

미국 학제에서 유럽식 관심

 

우리나라의 현행 ‘6·3·3·4제 학제’는 미국식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이 학제로 해방 이래 70여 년을 이어왔고 지속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고 정착이 된 또 다른 학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처럼 미국식 학제의 시행과 정착은 미국에 유학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교육학자들의 기여와 의존에 힘입었다.

 

반면, 미국의 대학입시가 우리의 고교생들이 겪고 있는 만큼 난제이거나 현안이 아닌 것에서 아쉬움을 갖게 된다.

 

더러는 더 관심을 돌려 유럽의 학제에서 해법을 찾기도 한다.

 

이 와중에서 안병영 장관은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1970년 강소부국인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유학했으며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주목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총리 발탁과 입각에서도 미국 박사가 아닌 것에 후문이 따랐다.

이에 앞서 1995년 12월 어느날 선배 K교수가 전화를 걸어와 사주를 물었다.

 

K교수는 그날 “명리학에 정통한 분과 약속이 있어 운세를 알아보려 한다”면서 “생년월일은 음력으로 말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뒷날 “관운이 왕성, 곧 좋은 일이 있을 사주”라며 “기다려 보라”고 하기에 웃어 넘겼는데 12월 21일 김영삼 정부의 제36대 교육부장관이 되었다. 이를 두고 안 장관은 “운명이라는 어휘 자체가 이미 초월성과 신빙성을 내포하고 거기에는 얼마간 신만이 지배하는 영역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고 회고했다.

 

안 장관은 두번째 교육부장관 퇴임 이후 몇 년 전에는 “오스트리아에 답이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고 이를 담은 저서도 출판했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여당과 정부의 실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외면했다.

 

오스트리아가 강소부국인 것은 부인하지 않으면서 왜 이에 답이 있다고 하는지, 간곡한 소망과 염원에 호응하는 것은 인색했다.

 

반면, 언젠가는 심산유곡에 산장(현광재)을 짓고 하늘과 별을 이고 교육을 걱정하고 있는 원로 학자에게 누군가 다가가서 떠 맡을 것에 기대하게 된다.

 

이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 망치는 학교장은 혼쭐

 

대학입시의 숱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지 못한 고교가 상존하고 있음은 문제이다.

 

정책과 행정은 이를 짚어낼 수 있어야 제격이고 본무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고교들은 입시 정보에 어둡고 내신이 아무리 좋아도 스펙이 약해 불합격의 고배를 안긴다.

때문에 학교마다 교사의 인식변화가 긴요하고 학생부종합전형에 대비가 철저해야 학생들도 믿고 따르고 신뢰하게 마련이다.

 

특히 사립의 경우 설립자의 육영의지가 실종된 채 시설과 지원이 열악하고 교사와 학생의 활동까지 사비로 감당하는 실정이다. 이에 지방교육자치의 본령이 재확인 되어야 하고 교육감이 직선이면 선거 때 공약한 것을 시행해서 실천할 수 있어야 옳다.

 

학교자치가 교육자치의 풀뿌리로 정착되는 지역이면 학생을 망치는 학교가 있을 수 없다.

이를 위해 대비책을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안병영 장관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실·국장회의를 공개해서 준비 없이 참석하는 것을 막았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의견을 듣고 지혜를 모으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보관이 정리해서 보고한 교육관련 보도 가운데 초·중·고교의 운영 비리와 대학입시에 학생을 희생양으로 삼는 불합리는 혼쭐나게 닦달했다.

 

공교육의 성패는 대학입시로 가름되지 않는 것을 경고한 셈이었다.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지금에도 이에 매달리는 혼돈은 여전히 약도 없고 명의가 없어 되돌아 보게 된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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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와 박근혜 정부 대입시정책 원심력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3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노무현 정부의 개선책 폐지수준 변화

수시합격률 오르내려 확대로 땜질 처방

수험생 피할 수 없는 생지옥 방황 일쑤

 

-졸업후 취업난 전문대 유턴 실속학과에 몰린 특징-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대입시 세력간 다툼과 갈등

 

 

당시 장관의 선택과 의지 특이

 

<전호에서 계속>

아울러 국정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과 해당 정책부문 최고책임자인 장관사이에 이념 및 정책관의 괴리가 있는 경우, 전개될 수 있는 하나의 생생한 시나리오를 보게된 셈이었다.

 

또한 정책과정은 중요한 여러 행위주체들 간의 갈등과 타협의 연속이며, 설득과 회유, 대결과 압박, 그리고 우군을 강화하고 적군을 약화시키기 위한 치밀한 전략과 줄기찬 노력의 과정임을 알게 했다.

 

이처럼 정책의 마지막 향방을 결정하는 데는 정책결정자의 리더십과 결의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웠다.

다음에는 정책안을 둘러싸고 행위주체 간의 갈등과 불신이 증폭되어 대결적 상황이 전개되면 사안에 대한 찬·반에 따라 대척적인 두 ‘진영’으로 나뉘며, 이는 이념 다툼으로 번져갈 개연성이 높았다.

 

이렇게 되면 교착상태에 빠지고 해결은 더 어려워졌다.

 

또한 전국민적, 전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사안일수록, 또 주요 행위주체 간에 상호불신과 갈등이 큰 정책일수록 이해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면서 사회협약의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가 절실했다.

 

당시 장관은 중도개혁론자들이 선호하는 코포라티즘적 접근이 바로 그것이며 사회적 파트너십과 사회협약은 민주사회에서 사회적 난제를 풀기위한 유용한 방식임을 강조했다.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마련된 대입시제도 개선안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지에 가까운 변화를 겪은 것에도 관심을 요한다.

 

이렇게 볼 때, 경제주의자에다 엘리트주의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이념적 지향이 변화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었다고 보게 될 원심력이다.

 

 

현행 대입시제 운영의 거울

 

안병영 전 장관은 앞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자신이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겪었고 감당했던 것에 비추어 박근혜 정부의 현행 대입시제 운영도 주의깊게 지켜보는 것 같다.

 

동시에 지금까지 흘러온 과정을 가감없이 전하고 다룬 것으로 역대 교육장관의 발자취를 추적해서 재조명한 백발(필자·80세)기자에게 안긴 무게감은 천근같다.

 

언제까지 우리 학생들에게 대학입시가 지옥문처럼 공포의 대상이며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엄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수험생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재학 중 무거운 학비부담과 이후의 취업난에 졸업을 미루는 유예사태가 처음 1년에서 지금은 2년까지 늘었다.

 

여기서 2년은 본의 아닌 대학원 진학일 수 있고 여타의 유예도 그냥 강의실 뒷 자리에 눌러앉은 모습이다.

때문에 현행 학제의 개편을 해결책으로 갈망하는 것을 보게 되고 대학의 구조조정과 학과의 통·폐합이 불가피해지는 현실은 대입시의 개선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에 통감하고 대책을 호소하게 마련이다.

 

아쉬움 또한 이것 뿐만 아니다.

 

 

수시 정시 모집 갈림길 방황

 

안병영 전 장관이 주도했던 ‘2008대입시 개선’이 온전하게 정착되어 지속되었으면 현행과 같은 수시와 정시 모집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수험생은 충분히 구제할 수 있었고 이런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에 아쉬움이 따른다.

 

금년들어 지난 7월14일 서울시교육청 산하의 교육연구정보원이 발표한 고3생의 수시 합격률은 3년째 감소현상을 빚는다고 해서 교육부가 당황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대학입시에서 귀재로 인식되는 서울지역 고3생의 수시 합격 저조는 충격이었고 국회에서까지 교문위의 여·야의원들이 진상과 경위를 캐묻는 것으로 관심을 보였다.

 

교육연구정보원의 발표에 따르면 수능시험 전의 내신선발이 늘고 논술전형이 축소되는 한편, 학생부 전형이 확대되면서 수시 합격은 더 달라질 전망이라고 했다.

 

지난해 서울지역 180개 고교에서 3학년은 6회까지 지원할 수 있는 수시모집에 12만 여명이 2천58건 접수했으며 이 가운데 1만3천303명의 합격으로 10.9%였다.

 

이는 전년(2004)도의 12.79%와 2015학년도 11.3%에 비해 내리막길이다.

인문계와 자연계 모두 학생부 교과전형과 논술에서 합격률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에 주목하게 된다.

 

 

내년 수시모집 70.5% 최다

 

오는 9월12일부터 21일까지 원서를 접수할 2017학년도 대학의 수시모집은 70.5% 확대되는 것으로 최다이며 선발인원은 24만6천900명으로 학생부 위주 전형이 85.8%이다.

 

이는 전체 모집인원의 70.5%여서 대입시의 수시선발이 처음으로 70%대를 넘어선다.

지난 7월21일 대학교육협의회는 이를 발표하고 “작년에 치른 2016학년도 수시모집 67.4%에 비해 3.1% 증가했다”고 부연했다.

 

증가 요인 가운데 학생부 위주 전형의 비율이 85.8%로 수위를 차지하게 되고 학생부 교과전형 선발은 56.3%로 13만8천985명, 교과성적과 비교과 활동을 함께 반영한 학생부 종합전형은 29.5%로 7만2천767명으로 내다봤다.

 

이밖에 논술 위주 전형의 선발은 5.9%로 1만4천689명이며 비중이 낮을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서울의 고려대(36.7%)와 연세대(28.4%) 등 세칭 명문대학들은 이보다 높게 될 것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지방대학에서는 지역의 고교출신을 뽑는 지역인재특별전형으로 경북대 39명, 부산대 63명, 원광대 76명, 전북대 49명이며 의·치과대학과 한의예과 선발에서 적용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고 있을 안병영 전 장관의 회한과 소감이 궁금해진다.

 

 

4년제서 전문대 2년 유턴

 

‘2008 대입시제’개선 이전에도 4년제 대학의 교육학과 출신이 2년제 전문대학의 유아교육과로 유턴해서 유아교육기관의 공채에 자리를 얻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유치원은 이에 힘입어 초등2년제 교대 출신보다 우수한 교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때문에 4년제 대졸의 2년제 전문대학 역류현상에 다른 말이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4년제의 졸업 후 취업난에 영향받아 전문대 유턴이 공공연하고 고3생 가운데 아예 전문대 진학으로 결정해서 직진한 것이 보편화 되었다.

 

이에 전문대학들은 1학년 교육에서 강한 대학이 되면서 교명도 전문대학교로, 학장은 총장으로 올라서는 것에서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전국의 고등학교 입시지도는 4년제 대학에 갔다가 졸업 후 유턴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전문대학교의 실속있는 학과를 선택, 돌진하도록 급변한 것이다.

 

이는 새로은 산업구조에 맞춤한 이색학과를 뜻한 것이며 교차지원 폭이 넓은 것을 활용한 특징이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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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제도 개선 주도권 싸고 피튀는 싸움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1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노무현 참여정부 안팎의 끝모를 혈투

진보와 보수 균형배치 뒤안길 낙수

혁신위 산하 특위 구성되자 관계 악화

 

-최종 시안 드러나자 새로운 전선 형성 교육부 협공-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대입시 세력간 다툼과 갈등

 

2. 교육인적자원부와 교육부총리

 

<전호에서 계속>

그러나 입시제도 개혁이라는 사안이 워낙 중차대할 뿐더러 혁신위원회의 이념적 편향성이 위험수위를 맴돌고 있으므로 교육부의 수장인 안병영 장관은 2003년 말 취임초기부터 혁신위의 활동 전반에 걸쳐 예의 주시하며 여차직하면 일전을 불사할 결연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후 안 장관은 교육부가 대입시의 실질적 시행주체이므로 그 제도개혁과정에 적절한 관여는 당연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기회있을 때마다 집요하게 의도적으로 개입을 시도했다.

 

2004년 전반기에 한달에 한번 정도 혁신위 전성은 위원장과 조찬회동을 가지며 2008 대입개선안 준비상황 및 기타 혁신위의 교육혁신사업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 때 전성은 위원장은 교육부와 갈등을 회피하려는 입장이었으므로 분위기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그러던 중 2004년 3월, 혁신위 산하에 대입제도개선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자, 안병영 장관이 이에 적극 개입하여 보수적 인사인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를 위원장으로 강력하게 추천, 그 뜻을 관철코자 했다.

 

아울러 특위 구성에도 관여하여 진보와 보수를 균형있게 배치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렇게 해서 2004년 8월 19일 대통령이 주재한 국정자문회의까지 ‘2008 대입제도 개선’의 정책수립 과정은 혁신위와 교육부 간의 치열한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당시 안 장관은 혁신위원회 비상임위원이며 차관(서범석·김영식)이 당연직 운영위원일 뿐더러, 몇몇 교육부 과장들이 전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좁은 길목이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참여 루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교육부는 나름대로 이들 공식적 통로 외에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해 대통령 및 청와대, 당, 그리고 언론과 시민사회 등 영향력있는 당사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교육부의 입장을 알리며 혁신위와의 대결에서 이들을 우군(友軍)으로 포용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한때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국무총리도 교육부 방안에 대해 공감을 피력했다.

 

이러한 줄기찬 노력과 함께 교육부는 혁신위의 개선안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자체안으로서 ‘2008 대입제도 개선’의 주요 쟁점에 대한 집중적 연구에 나섰다.

 

안 장관 주재 하에 연일 전문적 논의와 분석도 계속했었다.

 

교육부의 기본적 입장은 공교육 정상화라는 공동목표아래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을 모으고, 이를 위해 학교생활기록부 비중을 강화하며 수능의 비중을 낮추고, 대학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권장하면서, 이 모든 것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점진적으로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교 교육과정이 개선되고 학생부의 신뢰도가 높아질 때까지 수능도 적정수준의 변별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에 집약했다.

 

그 해 (2004) 8월 19일 대통령 주재 국정과제회의에서 ‘2008 대입 개선안’의 주도권이 교육부로 넘어 오자, 혁신위와의 치열한 갈등과 논란은 대체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9월 이후 대입제도 개선시안이 가시화 되면서 새로운 전선(戰線)들이 형성되었는데, 그 하나는 혁신위의 급진적 입장을 두둔한 청와대였고, 다른 하나는 대학과 보수언론이었다.

 

교육부는 그 중간에서 양측으로부터 협공을 받으며 자체의 개선안을 지키기 위해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대입개선안이 확정, 공표된 2004년 10월 27일 이후에 교육부는 정부의 대리자로서 진보진영의 측면지원을 받으며, 보수진영과 대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3.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교육문제에 비교적 높은 관심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다.

과거 국회의원 시절, 한 때 교육위원회에 소속한 경험도 있어 대부분의 주요 교육쟁점에 관해 익숙했고 자신의 전문적 식견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평등지향의 진보적 성향을 지녔으나, 혁신위 등의 지나친 이념지성향에 대해서는 얼마간 유보적 입장을 견지하며, 교육현실과의 조화를 꾀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입시개혁의 목표 설정에 있어서도 대학서열구조 해체와 같은 혁신위의 근본주의적 변혁 목표와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공교육정상화와 사교육비 절감 등 현실감있는 목표를 더 선호했다.

 

노 대통령은 ‘고교등급제’는 확고하게 반대하였으나, “대학의 선발자율권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대국민 설득력이 있다. 현재 대학들은 자율권을 더 요구하고 있는데, 뺏어오겠더눈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대학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선용하도록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제27회 수석비서관 회의, 2004.9.30)” 는 입장을 피력했다.

노 대통령은 혁신위와 교육부간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 한편에만 크게 치우치기 보다는 조정과 중재를 꾀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교육부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각론에 있어서는 교육부 안에 대해 우회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주지되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특히 집권 초, 중기동안 교육부 및 교육부 관료들을 크게 불신했고, 교육부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8년 입시안의 향방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던 2004년 8월 19일 청와대 국정과제회의에서도 노 대통령은 형식적으로는 마지못해 교육부 안인 9등급에 손을 들어주었으나, 구체적 배분방식은 추후토론과제로 미루고, 배후에서 혁신위 안인 1등급 7%를 강력히 지원하는 등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 수석 중,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은 노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혁신위의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대변하였다.

 

그는 혁신위의 김민남 상임위원과 같은 직장(경북대)의 동료로서 절친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 동지로서 혁신위의 현실과 동떨어진 평등주의적 입시안을 시종일관 뒷받쳐 주었다.

 

이정우 위원장 외에도 청와대의 이른바 ‘386’인사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혁신위의 지원세력이었다.

 

이들은 여당 내의 ‘386’세력들과 전교조 등 진보적 시민세력과 연대하는 한편으로 대통령에게 지속적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부에 가공할 압력을 구사했다.

 

청와대 내에서는 온건 개혁성향의 이원덕 사회문화수석이 교육부 입시안에 대해 가장 큰 공감을 갖고 있었고, 시종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청와대 내에서 그의 발언권은 매우 약해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고 김병준 정책실장 또한 교육부 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내심 지원하는 입장이었으나 청와대 내의 압도적 반(反) 교육부 기류 때문에 나서서 옹호하고 관여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4. 대학 및 고교

대학들은 기본적으로 대입전형에 대한 주요 사항에서 선발주체인 대학 고유의 몫이라는 생각을 바꾸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선발)자율성은 대학이 양보할 수 없는 모든 사고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대학입학에 대한 교육부의 관여에 대해서는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성향을 지녔고, 이러한 경향은 특히 명문대학 내지 상위권대학의 경우 보다 수능성적과 같은 가시적, 객관적 지표를 선호하는 것으로 강하게 드러났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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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2008 대입시제’ 해부와 증언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90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

 

 

학생부 실질반영 비율 되짚어 재조명

당시 개선안 주도 교육장관이 밝힌 비화

논술비중 본고사 여부 3불정책 망라

-결정과정 참여세력 드러내 교육사의 한 획으로 남겨-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대입시 세력간 다툼과 갈등

 

<전호에서 계속>

‘2008 대입시제’의 경우, 주요 쟁점은 학생부의 실질반영과 비율, 논술비중의 형식 및 ‘본고사’ 여부, 그리고 오랜 숙제인 ‘3불정책’이었다.

 

주요 쟁점과 갈등의 축이 형성되는 것은 단순한 이해관계의 차원을 넘어 이념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때문에 이를 되돌아 보는 교육계의 시각은 매우 착잡, 미묘하다.

 

특히 이를 감당한 안병영 전 장관측이 짚어본 참여 세력간의 다툼과 갈등은 교육사의 재조명에서 빠질 수 없게 중요하다.

 

그리고 주도세력과 맞섰던 것으로 재음미하게 된다.

 

여기서 ‘2008 대입제도’ 개선안 결정과정의 주요 참여자인 1)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 2)교육부-교육부총리, 3)대통령-청와대, 4) 대학과 고교, 5) 언론 및 시민단체에 대한 개별 분석을 마무리한 것은 사료가치의 압권이 다.

 

분석결과 원문은 다음과 같다.

주지하듯이 ‘2008 대입제도 개선안’은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이후 교육혁신위 혹은 혁신위)가 마련하고, 집행은 교육부가 하는 식으로 구도가 잡혀 있었다.

 

따라서 개선안 정책결정 과정, 특히 그 초기과정에서 혁신위의 비중과 영향력은 매우 컸다.

교육혁신위는 그 인적 구성부터 기존의 유사명칭의 대통령자문 교육개혁기구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기존 기구들이 대체로 ‘서울’ 중심의 유명 교수들과 각계 명사들로 구성된 명망가형 조직이었던 것에 비해 노무현 정부에서 출범한 교육혁신위는 중앙 네트워크를 거의 갖지 않은 ‘지방’출신의 진보성향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는 비명망가 조직이었다.

 

따라서 기존 조직들이 중앙 네트워크를 근거로 현실에 바탕을 둔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 것에 비해, 혁신위는 폐쇄적 이념집단의 성격이 강했고, 이상주의에 치우쳐 급격한 변혁을 지향했다.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은 대안교육 운동가인 경남 거창 샛별중학교의 전성은 교장이었고, 혁신위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상임위원은 경북대학교의 진보적 교육학자 김민남 교수였다.

 

전성은 위원장은 지방 현장 교육자로 도덕성이 돋보이는 인사이나, 혁신위 수장에 걸맞는 정치력과 정책능력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반면 김민남 교수는 혁신위의 핵심적 이론가이자 추진동력으로서 혁신위 제1기(2003/7-204/7)의 모든 급진적 제안의 발원지였다.

 

지방대 교수가 10명, 교장 교사출신 6명, 서울 소재 대학교수 2명, 그외 3명으로 지방대학 교수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고, 친 전교조 인사가 다수였다.

 

교육혁신위는 교육 현안이나 구체적 과제에 대한 관심보다, 그들이 상정하는 우리 사회의 갖가지 교육모순들, 예컨대 대학서열구조, 학벌주의, 중앙집중체제, 경쟁구도 등을 근본적으로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현실과 동 떨어진 “개혁을 꿈꾸는 소수의 자기만족적 논의(이남희 ‘물 건너간 대선공약, 6수 끝에 나온 ‘대입개선안’ 「신동아」 2005년 5월호 278면)”에 몰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현실적,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교육부와는 물론,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절감에 일차적 관심을 표명하는 노무현 대통령과도 얼마간의 괴리가 있었다.

 

혁신위 수뇌들은 교육부와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대, 명문고, 그리고 중앙에 터를 잡고 있는 수구적 엘리트 계층에 대해 내적으로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 교육을 주도해 온 “서울대, 교육부, 지도층이 ‘비곗덩어리’ 물체가 아닐까?(교육혁신위원회 제1차 전문위원 전체회의 자료, 13페이지)”라고 신랄하게 반문하기 까지 했다.

 

따라서 혁신위와 교육부와의 첨예한 갈등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또한 교육문제를 중앙과 지역의 모순구조로 설정하고,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분권화를 제시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혁신위의 목표와 접근방식은 기존의 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했다.

 

교육혁신위는 문제의식과 현실 진단에서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으며 그들은 그 지나친 평등주의적 접근, 개혁의 대상 및 주체 설정의 추상성, 추진동력에 대한 낭만적인 전망, 그리고 분권화 위주의 해법에서 오는 비현실성 등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교육혁신위의 개혁안은 그 핵심의 이론가인 김민남 상임위원이 주도했고 진보성향의 다른 위원들이 그를 도왔다.

 

그들의 이념성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국립대학 공동학위제’였다.

교육혁신위는 2004년 3월 “대학교육 경쟁력 제고를 위해 서울대 등 전국 26개 국립대학간 공동학위제를 도입하고 교수도 공동 선발해 3-5년 주기로 순환근무를 하게끔 하자”는 급진적 제안을 했다.

속셈인 즉, 이를 통해 대학서열의 최정점인 서울대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공동학위제가 실현되면 중·고교 교육이 정상화되고, 지방대학이 발전하며, 대학서열구조가 해체되고, 학벌주의가 완화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교육부가 급히 개입하여 가까스로 진화했으나 그 여진은 꽤 오래 갔다.

 

대입제도 개선과 연관한 혁신위의 기본입장은 분명했다.

시험성적으로 전국학생을 서열화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전국 단위시험(수능)의 폐지 내지 그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내신위주의 신입생 선발을 제도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교육이력철’, ‘경로별 선발제도’와 같은 생경한 개념을 창안하고, 이들 개념에 이념적, 상징적 의미를 강하게 부여했다. 수능등급과 연관하여, 이들은 5등급으로 나누거나, 9등급으로 하는 경우, 각 등급을 균등한 비율로 배분하자는 급진적 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혁신위의 평등주의적 이념성향이 강력히 부각되었고 그것이 입시제도 개혁에서 가장 큰 쟁점으로 부상했다.

 

다음은 당시 교육부의 내부 사정을 종합 정리한 부분이다.

교육부의 대학입시 개혁의 기본 목표는 ‘공교육 정상화’였다.

 

그것은 1995년 당시 김영삼 정부와 박영식 교육부장관의 ‘5. 31 교육개혁’발표 이후 대학입시에 임하는 교육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목표는 다른 이념집단들도 거부하기 어려운 명분과 개념적 포용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우산아래 주요 참여자들을 모아 보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대학서열구조 해체와 같은 보다 변혁적 목표를 지향하는 혁신위원회를 비롯한 청와대 내의 ‘386 및 전교조’ 등 진보적 시민단체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자율화를 명분으로 수능, 본고사 등 점수위주의 대입전형방식에 집착하는 대학 및 보수언론들과의 사이에 서서 자주 양측과 치열한 갈등과 논란을 빚으며, 어렵사리 조정과 중재역을 담당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을 효율적으로 설득하여 교육부 안으로 접근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무거운 짐도 함께 짊어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2008 대입제도 개선안’의 창안은 일단 ‘교육혁신위원회’ 고유의 몫이기 때문에 교육부가 그 과정에 지나치게 개입할 형편이 아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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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결과가 달랐던 2008년 대입시제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89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연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수능 등급제 단 한번의 실험으로 흔들

대입전형 중심 축 수능회귀 요인 작용

수학문제 너무 쉽게 냈다가 낭패 초래

-MB정부 시행까지 3년여 교육부 대학 갈등 지속-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2008 대입시 성공 장치 고장

 

<전호에서 계속>

입학사정관제 또한 발표 이후 2년이 훨씬 지난 2007년 6월에 이르러 시행계획이 확정되는 등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교육발전협의회와 입학사정관제의 정착을 ‘2008 대입시’ 성공의 열쇠로 생각했던 안병영 장관으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두 제도가 제대로 기능했더라면, 지난 날의 몇 년 동안 특히 2005년 이후 전개된 ‘2008 대입시 파동’의 대부분은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내신의 실질비중과 논술, 그리고 ‘3불정책’ 등 주요 쟁점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빚어지고 대학에서 반발하거나 불복할 때 마다 교육부 장관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설득하거나, 아니면 “강력 제재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식으로 문제를 보고 접근했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위계적, 규제적 접근을 계속 시도하였으나, 정부의 구차한 모습만 드러냈을 뿐, 이의 약발은 별무 효과였다.

 

 

한차례 실험의 수능등급제

 

2007년 11월에 수능등급제가 처음 적용된 2008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되었고, 뒤이어 그 결과가 나왔다.

 

가장 우려했던 동점자 속출 등으로 빚어진 등급 공백 따위의 큰 부작용은 없었다.

 

등급별 분포 역시 표준비율에서 별로 어긋나지 않았다.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 등 네 영역 1등급은 644명(0.15%)이었고, 언어, 수학, 외국어 세 영역 1등급은 3747명(0.75%)이었다.

 

이 정도면 상위권 대학들이 그처럼 문제로 삼았던 변별력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언론에 크게 부각된 것이 수리 ‘가형’의 경우였다. 수능시험 후 안병영 장관은 시험을 관장했던 정강정교육과정평가원장을 만났다.

 

정 위원장은 “학생들이 워낙 수학을 어려워하고 번번이 문제가 어렵게 출제되었다고 해서 제가 출제위원들에게 수학문제를 쉽게 내 달라고 간절히 청을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가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쉽게 출제되어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으로 내려앉는가 하면, 2등급은 표준비율보다 3% 많았고, 3등급은 2.5%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변별력이 크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주류언론은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린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며, 수능등급제는 실패했다고 질타했다.

 

등급 경계선에 있는 학생들의 불만이 컸던 게 사실이고, 처음 도입했으니 진학지도의 어려움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수능등급제는 ‘학생부 비중 강화, 수능 비중 약화’를 전제로 도입한 방안이며 이른바 상위권 대학들은 학생부 비중을 높여 달라는 정부 지침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학생부 등급 간 점수간격을 좁혀 그 비중을 한껏 낮추는 대신 수능비중을 강화하여 수능이 당락 결정에 가장 중요한 전형요소로 작용케 했다.

그러자 안병영 장관은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지나치게 수능에 집착해서 그 비중을 높여 놓음으로써 ‘2008 대입 개선안’의 취지 자체를 무너뜨린 상위권 대학들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들 대학들은 대학자율성의 명분을 앞세워, 실제로는 ‘성적’ 우수자 뽑기 경쟁에만 급급한다고 몰아쳤다.

 

그러면서 교육부 및 정부 또한 책임의 큰 부분을 함께 짊어 져야 된다고 했다.

 

앞서 3년의 기간 동안 주요 교육주체와의 꾸준한 대화와 협의를 통하여 2008년 대입 개선안 미해결의 문제 중 특히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개선, 학생부 신뢰도 제고, 학생부 반영비중 조율 및 합의, 논술의 비중 및 출제 수위 조정 등 제반문제들을 하나씩 풀어 왔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미해결로 잔존하여 혼란이 가중되고, <내신-수능-논술> 3자가 합주하는 ‘죽음의 트라이 앵글’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며 ‘2008 대입제도 개선안’은 학생, 학부모, 대학 등 어느 이해관계자들로 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합의에 의한 문제해결은 ‘교육발전협의회’를 통한 사회협약 방법이었다는 것이며 이 협의체가 제대로 가동되었다면, 그 틀 안에서는 세칭 명문대학들도 이기적 욕구만을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었고 여기서 체결된 사회협약의 실천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교육부는 이 협의체를 사실상 무력화시켰고, 뒤늦게 2008년 대학입시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상투적 설득과 제재 엄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며 상황이 긴박해지자 서둘러 대통령까지 나섰으나 별로 소득이 없었다고 아쉬워 했다.

 

이는 주요 교육주체간의 불신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철저히 불신하는 등 대학과 고교, 교육부와 대학, 학부모와 교육부 모두가 상호 불신했던 거대한 장벽은 서로간의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새 제도의 연착륙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입학제도가 갖는 엄청난 영향력, 그 막강한 결정력 때문에 결국은 아무리 타당성이 높은 정책안도 그 시행과정에서 왜곡의 과정을 밟게 되는 불가피성으로 예거되고 있다.

 

2007년 12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정치 10년의 역사가 종언을 고하고 보수 이념을 표방하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해서 들어서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는 2008년 2월22일 당시 김도연 장관이 “수능등급제 보완을 위해 내년(2009)부터는 등급과 백분위, 표준점수를 함께 공개하겠다”고 방침을 확정, 발표했다.

 

이에 따라 수능시험의 변별력을 낮추고 대신 학생부의 비중을 높여 다양한 학생평가, 공교육정상화, 사교육비절감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도입했던 ‘수능등급제 실현’은 단 한 번의 실험으로 깨졌다는 것이다.

 

등급이라는 형태는 남았으나 대입전형의 중심축이 다시 수능 중심으로, 그리고 시험점수 중심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안병영 장관은 단, 한 번으로 끝날 실험을 위해 그 어렵고 고달픈 과정이 필요했나 싶었고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치솟는다고 회고했다.

 

 

시기별 주요 쟁점 갈등의 축

 

‘2008 대입 제도’의 형성으로부터 확정, 그리고 그 첫 시행과 변경까지의 정책과정을 복기(復碁)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특위출범부터 청와대 국정과제회의까지의 시기동안 교육혁신위와 교육부 간의 갈등이 중심축이었고 풀어야 할 주요 쟁정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시안이 발표된 이후, 대입개선안이 확정 발표되기까지의 시기에서 갈등의 축은 교육부와 청와대 그리고 대학 3자간의 관계로 바뀌고 주요 쟁점은 수능등급 및 1등급의 %로 압축되었다.

 

이 때 갈등은 주로 교육부와 청와대, 그리고 교육부와 대학 간에 빚어졌고 청와대와 대학 간의 갈등은 보다 간접적이고 잠재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별표 그림에서 점선으로 표시된 것과 같이 2004년 10월, 개선안이 공식 발표된 이후 2008년 MB정부의 정권인수위까지의 3년 여 기간 동안 정부와 대학 간의 갈등이 전경(前景)에 크게 부각되고 그 배후에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각각 ‘진영화(陣營化)하여 정부와 대학을 부추기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오래 전의 일이 아닌, 불과 9견 전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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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한국의 대입시제 3불정책에 우려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88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연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노무현 대통령 EBS특강 고수 의지

후임 장관의 정책인수 이행 부실 드러나

교발협 사정관 활성화 못해 패인 초래

-위기에 몰리면 위계 규제적 접근으로 구차한 모습-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두 제도의 중요성 강조 당부

입학사정관제


<전호에서 계속>

그래서 안병영 장관은 그 기회에 이 제도를 정착시킬 뜻을 세웠다.


따지고 보면 그간 우리나라 대학들은 발전잠재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바르게 선발하기 위한 꾸준한 자체적 노력없이 수능점수와 같은 객관적 수단에 의존하여 대학서열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이제 대학 내 행정조직으로부터 독립한 전문 보직으로 입학사정관을 채용하고, 그를 통하여 전형기관과 무관하게 연중 입학관련 업무를 보다 전문적이고 독자적으로, 그리고 책임있게 수행할 때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입학사정관을 통해 지망학생들의 점수뿐만 아니라, 그가 이수한 교과, 비교과의 교육과정을 면밀히 검토해 지니게 된 다양한 능력과 성장잠재력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고교와 학생들에 대한 자료를 장기간 분석·축적, 활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비단 대학입시 뿐만 아니라, 고교 교육과정운영의 개선도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제도가 바르게 정착되는 경우, 앞으로 대학입시 자율화를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축적된 교육과정 분석자료를 바탕으로 고교 등급제의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 것으로 본 것이다.


당시는 2008년 대입시가 시행되는 2007년 11월까지 만 3년이 남았었다.


안 장관이 위의 두 제도를 강조한 것은, 그 때까지 이 제도, 특히 ‘교육발전협의회’가 내신-수능-논술 간의 상대적 관계를 사회적 협의를 통하여 바르게 설정하고, 아울러 고교 교육과정의 개선을 통하여 내신제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높이지 않으면 새 입시안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안 장관은 2004년 10월 28일 ‘2008 대입시안’이 발표된 시점에서 그간의 청와대와 잦은 갈등 때문에 이른 퇴임이 기다릴 것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발전협의회의 발족을 서둘렀던 것이다.


고심 끝에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온건 개혁론자인 동덕여대 손봉호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학, 고교, 학부모, 시민단체, 언론, 교육부 등을 망라한 20명의 위원을 엄선, 그 제도의 틀을 마련했다.


그 때가 2004년 12월 말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인 2005년 1월4일 개각으로 경질되어 장관직을 떠났다.


떠나면서 교육부 고위직들에게 이 두 제도의 중요성과 특히 ‘교육발전협의회’의 의미를 누누이 설명했다.



발표 후 계속된 사회적 논란


‘2008 대입개선안’은 최종 확정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었다.


학생부 위주 전형에 따라 내신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고, 수능의 변별력 약화를 이유로 논술과 심층면접 등에 대한 비중 전망이 높아지자, 새 제도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이 고조되면서 사회적 불만과 반발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우선 ‘2008 대입제도’의 최종 대상자인 당시 고등학교 1학년들을 중심으로 거센 저항이 시작되었다.

2005년 5월 7일, 고교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입시경쟁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촛불 추모제’가 열렸고, 그 배경에는 내신등급제를 도입한 2008년 대입제도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 다음 날인 2005년 5월 8일 서울대가 통합형 논술 전형안을 발표하자 이를 본고사로 판단할지 여부를 놓고 치열한 사회적 논란이 있었다.


논술고사가 뜨거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05년 12월 28일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의 7개 대학이 ‘2008 대입전형 기본계획’을 발표하자 정시모집에서의 학생부 반영비율을 둘러싸고 이들 7개 대학들과 교육부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듬 해 3월, 한 고등학생이 대입시에 멍든 교육현실을 비관하며 만든 ‘죽음의 트라이앵글-누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극적인 제목의 동영상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내신-수능-논술, 세 가지 요소가 빚어내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리면서 회자하게 된다.


2007년 2월 6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고등교육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 검토과정에서 이른바 ‘3불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및 기여입학허가제의 금지)이 대학의 독자적인 입학 절차를 개발하는데 제약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동안 잠잠했던 ‘3불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재점화한 것으로 주목됐다.


좌, 우의 교육시민단체들과 대학들, 교육부 등이 참여하여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진화에 나섰다.


2007년 4월 6일 노무현 대통령은 EBS(교육방송)에서 ‘본고사가 대학 자율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여 3불정책 고수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에 이어 당시의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전국을 돌며 3불 정책유지에 적극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는 이른바 ‘3불 투어’를 5월까지 20여 차례 걸쳐 계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7년 6월, 연세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들이 2008학년도 정시모집에서 ‘내신 4등급 이상 만점 처리를 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교육부는 내신 1~4등급 만점처리를 강행하거나 실질반영률을 50%까지 확대하지 않는 대학에 대해서는 각종 지원을 대폭 줄이겠다는 엄포를 놓았고, 노무현 대통령도 “내신 무력화는 고교 등급제로 가는 길이다”라며 강도 높은 의지를 보이면서 강력 제재를 암시했다.


이후 한 때 극한으로 치닫던 교육부와 대학들 간의 갈등은, 격돌직전에서 양측이 한 발씩 물러남으로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2007년 6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학총장단과의 토론에서 2008학년도 입시안의 내신반영 비율문제와 ‘3불’ 등에 재차 언급했고 이에 대한 대학 및 교수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등 확전양상을 보이다가 결국 ‘단계적 접근방식’으로 조율하는 선에서 봉합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적 논란은 대체로 진보, 보수 양 ‘진영’으로 나뉘어 전개되는 양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여당, 진보언론, 진보적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되었던 진보진영은 내심 미흡하지만 새 ‘2008 대입제도’를 지지하는 입장인데 반해, 세칭 일류의 상위권 대학을 비롯한 주류 보수언론과 보수 시민단체들은 이에 대해 줄기차게 반대의 기치를 높였다.


이렇듯 치열한 사회적 논란과 갈등 속에서 안병영 장관이 ‘2008 대입제도 개선안’ 성공의 첫 번째 전제라고 공언했던 ‘교육발전협의회’와 ‘입학사정관제’는 그 어느 것도 제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앞서 김진표 장관이 몇 차례 ‘교육발전협의회’를 개최하였으나 정작 주요 입시 쟁점에 대한 사회적 협의와는 동떨어진 일상적인 보고와 논의에 그쳤고, 2005년 중반 이후 그것은 이른바 ‘식물화’과정에 들어가 완전히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했다.


교육주체들 간의 사회적 파트너십을 통해 <내신-수능-면접>의 3박자를 ‘상생의 트라이 앵글’로 만들겠다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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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 설킨 ‘2008 대입시’ 시행방안 비화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87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edukim.com·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전재한다. 이는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학생부 신뢰도 보완 반영비중 더 높여

사회통합 유도할 수 있게 전형도 활성화

수능 등급화로 개선 선발 특성 전문화

-성공 필수조건으로 ‘교발협·입학사정관’ 제도화-

노무현 참여정부 두번째

4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2003. 12. 24~ 2005. 1. 4 재임>

두 번 장관다운 투지와 면모


<전호에서 계속>

김영삼 문민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안병영 장관은 누가 봐도 ‘두 번 장관다운 의지와 면모’가 돋보인 것에 화제가 되었고 일화를 남겼다.


특히 김영삼 정부의 수월성과 노무현 정부의 형평성에서 교육부장관의 입지는 말처럼 수월치 않았다.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교육장관이 되어 취임하던 날 출입기자 간담회 때 “절실히 필요한 정책임에도 이념이나 정치적 이유로 추진이 미뤄지는 경우 그것을 찾아 과감히 밀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취임 후 추진에서 ‘교원평가’는 대표적 사례였다.


2004년 초 당·정·청은 물론 교육부 고위 관리와도 사전 조율없이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교원평가’에 대한 시행의지를 표명했다.


이때 “우리나라 교원의 질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교원평가의 범위와 대상에 예외를 두지 않은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왔다.


전교조의 저항이 가장 치열했고 이는 교사평가에서 민감하게 반발했던 것은 기억에 새롭다.


교감, 교장, 전문직 등은 숨을 죽이고 관망했고 대학에서는 “설마 우리까지…” 반응한 것으로 주목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것이 안 장관에게 미친 영향에서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 1월부터 시작된 교원평가에 대한 정책연구가 크게 진척되어 윤곽이 드러나기 전에 안 장관은 경질되어 떠나게 되었다.


그 이후 교원평가 논의는 오랜 동면기에 접어들었다.


이어서 수능은 1등급 4%와 함께 시행에서 난제였다.


안 장관은 “당연히 4%가 되어야 하며 그래야 최소한의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사표 제출로 배수진을 치고 맞섰기 때문에 관철할 수 있었다.


2004년 10월 26일 국회에서 이에 대한 마지막 당정회의가 열렸다.


회의 직전, 당측의 유력한 인사가 안 장관에게 다가와 “어제(2004. 10. 25) 있었던 얘기(사직원) 잘 들었습니다. 실제(대통령 재가)로 이미 결론이 난 셈이니 더 이상 격론을 벌이지 맙시다. 그리고 오늘 당정협의도 쌍방이 당초의 입장만 피력하는 수준에서 모양새만 갖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넌지시 종용했다.

이날 당정회의는 말 그대로 형식만 갖추고 곧 끝났다.


‘2008 대입제도 개선안 ’확정

2004년 10월 27일, ‘2008 대입시안’ 발표 전날, 안 장관은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물밀듯이 감회가 밀려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동안 교육부와 함께 짊어져야 했던 짐이 너무 무거웠고 힘겨웠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나마 1등급 4%가 관철된 것은 나라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노무현 참여정부를 위해서도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구에게 말했던지 기억이 분명치 않았으나, 청와대인가 당의 핵심인사 한 사람에게 안 장관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정작 이 (노무현)정권을 지키려는 사람이 당신인지, 나인지 알 수 없군요. 왜 이렇게 묘혈을 파지 못해 야단들 입니까?”


교육의 전문성과 민심의 저변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념과 좌파적 클리쉐에 집착하는 그들이 너무나 안쓰러웠고 한심했던 기억으로 전하고 있다.


그날 밤 안 장관은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머리는 명경처럼 맑았다고 한다.


따져보니 2004년 8월 26일 개선안 시안을 발표한 후 이미 2개월이 넘었을 때였다.

그 기간이 천 날처럼 길었고 마음은 지울 수 없게 멍이 들었다.


무엇보다 안 장관을 끝까지 믿고 따라준 교육부 직원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치솟았다.

이렇듯 안 장관은 2004년 10월 28일 마침내 “2008 대입제도 개선안”을 발표하게 되었다.

안 장관은 이 방안에서 새 대입제도의 개선 배경과 목적을 설명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날 발표된 내용의 핵심은 i) 학생부의 신뢰도와 그 반영비중을 높이고, ii) 수능시험제도를 개선하고 이를 등급화하며, iii) 학생선발의 특성화 전문화를 더욱 강화하고, iv) 사회통합을 유도할 수 있는 전형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고 했다.


안 장관은 개선안을 발표하면서,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이므로, 각 교육주체나 이해 당사자들도 거시적이고 대승적인 자세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적극 동참해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안병영 장관이 이와 같은 핵심내용을 발표하면서, ‘2008 대입시안’의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강조했던 것은 바로 “교육발전협의회”와 “입학사정관”의 제도화였다.


전자는 입시를 비롯한 주요 교육현안에 대한 주요 교육주체들 간의 협의적 해결을 겨냥한 사회적 파트너십과 사회협약 시스템이었고, 후자는 입학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입학사정관을 통해 대학입학전형 업무의 전문성과 자율성, 그리고 입시와 고교 교육과정과의 연계를 강화하려는 제도이다.


당시 밝힌 양자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발전협의회

원래 대학입시라는 제도가 전국민의 관심사이고 각종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주요 교육주체들 간의 불신과 갈등해소, 그리고 상호이해와 사회적 합의를 높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대학과 고교를 주축으로 학부모, 언론, 시민사회, 그리고 정부인사가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체의 구성이 필수적이었다.


우선은 입시제도의 연착륙에 주안점을 둔 것이지만, 이 협의체는 입시 이외의 주요한 교육쟁점에 관한 갈등조정과 문제해결에 큰 기여를 하리라 믿었다.


대입시와 연관하여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그 중요 당사자인 대학과 고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는 기구가 당시에는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유능한 인재의 공정선발과 고교 교육의 정상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주요 이해당사자 간의 긴밀한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은 더할 나위없이 시급하고 긴요했다.


이 문제를 종전처럼 교육부가 일일이 규제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대학자율에 맡겨도 안 된다는 것이 평소 안 장관의 생각이고 소신이었다.


더욱이 ‘2008 대학입시제’는 입시의 큰 방향만 정한 것이지 실제로 내신, 수능, 논술 등의 구체적 관계를 설정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후에 예견되는 주요 쟁점들과 더불어 ‘학생부의 신뢰성 제고’, ‘고교와 대학 간의 상호 협력’ 등과 연관하여 풀어야할 과제가 너무 많았다.


이 밖에도 ‘교육격차 해소’와 같은 중·장기적 현안들도 여기서 논의하기로 예정되었다.


안 장관은 이 사회적 파트너십과 사회협약을 바탕으로 하는 이 협의체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교육갈등 해소와 교육문제 해결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했다.



입학사정관제는 그간 종종 논의가 있었다.


교육혁신위원회와 교육부도 대입제도 개선을 위해 이 방안의 유용성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아빠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