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사로 출발 교수 총장거쳐 장관에 올라

교사로 출발 교수 총장거쳐 장관에 올라

- 교육언론 반세기 현역 백발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77회) -

○… 본고는 50년 동안 교육정책 산실(교육부 출입)을 지켜본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특별 전재한다. 또한 생존한 전임 장관들의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일을 위한 거울이 되고 있다.〈편집자〉○

 

해방정국 미군정기 대구에서 태어나

정문연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 역임

사울사대 졸업후 도쿄대학 박사학위

-참여정부 출범 첫 교육부 진용 새판짜고 개혁 착수-

‘TED활용 수업방법 첫 도입’

경남 하동의 금남고교 정명규(사진 왼쪽 위)국어과 교사는 미국에서 시작된 TED기법을 수업방법에 도입해서 생동감 넘친 분위기 조성에 성공했으며 학생들의 호응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

노무현 참여정부 첫 임명

45대 윤덕홍 교육부장관

<2003. 3. 7~ 2003. 12. 23 재임>

 

윤씨 장관 네 번째 등장 후문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첫 교육부총리 겸 장관으로 제45대 윤덕홍 장관이 2003년 3월7일 임명되어 취임했다.

취임식장은 전임 파평윤씨 교육장관 세 사람 중 윤형섭 전 장관이 보내온 축하 화환이 눈에 띄게 시선을 끌었다.

역대 교육부장관 가운데 윤씨 장관은 윤덕홍 장관이 네 번째였다.

 

첫 윤택중 장관(9대 61.5.3~19)은 윤보선 대통령이 이끈 장면 총리의 내각제 때 구파인맥으로 문교부 정무차관(60.8.23~61.5.2)에 임명되어 재임 중 개각으로 장관자리에 올랐으나 17일 만에 군사정변으로 일컬은 5·16쿠데타에 의해 내각이 해체되면서 떠난 것으로 단명했다.

 

이 때 일화가 두가지였다.

하나는 장관으로 임명되어 취임한 뒷날 지인이 피아노를 보내오더니 장관 자리에서 떠난 바로 다음날 찾아와서 가져갔다.

 

이를 본 방문객이 “왜 되가져 가느냐?”고 묻자 “고장난 곳이 있어 고쳐서 다시 가져 오겠다”면서 비로도로 싼 피아노 의자까지 들고 갔다.

 

그래서 “의자는 왜 가져가느냐?”고 묻자 “몸체와 같이 왔으니까 함께 갔다 올 것”이라며 수레에 싣고 갔다.

그날 이후 피아노와 의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번째 일화는 쿠데타의 성공으로 들어선 군부출신인 제10대 문희석(61.5.20~62.1.8) 장관이 취임하기 무섭게 문교부 총무과 직원을 윤 장관의 집으로 보내면서 “5월3일부터 19일까지 재임했는데 장관 판공비 5월치를 다 쓰고 갔으니 나머지는 받아오라”고 불호령이었다.

 

이에 윤 장관은 찾아온 문교부 직원에게 있는 대로 모아서 보냈는데 이를 보고 받은 문 장관은 “쓴 돈에서 한 푼도 축내지 않고 반납해야 하거늘 왜 이 것밖에 안되느냐”고 노발대발하면서 “다시 가서 잔액을 받아오라”는 호통에 말없이 물러나온 보고자는 동료 직원에게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한 뒤 “차라리 내 돈으로 처리해야지 어떻게 또 찾아가서 받아올 수 있겠느냐”고 깊은 한숨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문교부 직원들은 “권력의 무상”이라며 군복장관(문희석)의 서슬에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두 번째 전임 종씨 장관은 박정희 군사정부 때 제15대윤천주(64. 5.11~65.8.26)장관으로 당시 전남 완도군 청산면 모동리의 낙도학교에서 수업 중 과로로 쓰러진 채 태풍경보에 막혀 6마일 바다 건너 큰 섬마을에 있는 보건소를 바라보면서 신음하다 숨진 고 김선태 교사의 순직을 기려 현행 도서벽지교육진흥법이 국회교육위원회 최정기(전 조선대 총장) 위원장 대표 발의로 제정되기를 기다려 공포한 뒤 시행령을 마련하고 처음 실시했다.

 

세 번째 종씨 장관은 노태우 직선 대통령의 보통사람 정부 때 임명된 제31대 윤형섭(90.12.27~92.1.22) 장관으로 교총회장 출신이며 연세대학교 행정학교수였다.

 

윤형섭 전 장관은 교총회장 때 전교조 교사의 길거리시위에 ‘교사 3불론’을 발표해 정부·여당에서 대환영이었다.

그때 3불론은 첫째, 교사는 정치꾼이 아니다. 둘째, 교사는 장사꾼도 아니다. 셋째, 교사는 길거리에 드러눕지(시위) 않는다고 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정원식 문교부장관의 청와대 연두보고를 서울 양재동에 있는 교총회관으로 옮겨가서 받았을 정도였고 이 때 청와대 요리사가 따라나서 교총식당에서 갈비탕을 끓여 점심으로 오찬을 대신했다.

 

그리고 12월, 연말 개각에서 교육부장관으로 입각했으나 1년 재임 후 (1992.1.18) 경기도 용인에서 발생한 수능고사 시험지 도난사건에 자진해서 인책, 사임하고 물러났다.

 

윤덕홍 장관은 그로부터 10년 후에 네 번째 윤씨 장관으로 임명되어 취임한 것이다.

 

 

민교협의장 출신 유명 교수

 

윤덕홍 장관은 1947년 4월19일 해방정국의 미군정 시기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1965년 경복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사대에 입학 1969년 사회교육과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 1974년 석사학위를 받은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86년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어서 1992년 사회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영남전문대 교수와 대구대학교 교수로 기획처장을 역임했다.

이에 앞서 서울사대 졸업 후 이화여고 교사(1979~1989)를 지낸 것이 2014년판 한국인물사전에 수록되었다. 또 1994년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위원, 1995년 한국사회과교육학회 부회장, 1997년 전국민주화교수협의회 공동의장, 1998년 한국사회과교육학회장 등 운동원 교수로 이름을 날렸다.

 

같은 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회 부회장과 2000년부터 2003년 2월까지 대구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구·경북지회장을 맡았을 때 장관자리에 올랐다.

 

퇴임 후 제17대 총선 때 대구 수성 을구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교육부장관 퇴임 직후 2004년 교육부 산하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으로 임명되어 2007년까지 재임했고 이 기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개칭되었다. 그 이후는 대구대 사범대학으로 복귀해서 일반사회교육과 교수자리로 돌아갔다.

 

 

차관 경질 등 새 보좌역 포진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각 부처 장관을 2003년 3월7일자로 임명한 다음 날(3월8일) 차관급 인사를 마무리 한 것으로 출범을 시작했다.

 

이 때 교육부는 전임 김신복 차관이 퇴임하고 서범석 서울시교육청 부교육감이 제45대 차관(2003. 3.8~2004.7.19)으로 임명되어 취임했다.

 

이처럼 장·차관이 바뀐 교육부는 차관보(1명)와 2실4국4심의관 및 33담당관 등 정원 453명이었다.

또 2003년도 연간 교육부의 세출예산 규모는 일반·특별회계를 포함해서 24조4천44억1천여만 원으로 전년도의 22조5천281억7천900만 원 보다 1조8천7백62억2천200만 원 늘어난 8.3% 증액되었다.

 

이 가운데(2003년)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규모는 16조5천932억7천400만 원으로 2002년도의 15조2천321억7200만 원 보다 1조3611억200만 원 늘어난 8.9% 증액이었다.

 

이에 봉급교부금 4조6737억1천900만(7% 증액)원, 경상교부금 11조2798억3000만(8.7% 증액)원, 증액 교부금 6397억2500만(31.1% 증액)원 포함되었다.

 

윤덕홍, 서범석 장·차관의 보좌역은 차관보 정기언(별정1급) 공보관 유선규(이사관) 감사관 이종서(이사관·후에 차관) 총무과장 이걸우(부이사관) 기획관리실장 김영식(관리관·후에 차관) 학교정책실장 이수일(장학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