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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사의 긍지가 된 교육민주화운동 비화

교사의 긍지가 된 교육민주화운동 비화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7회) -

○… 본고는 지난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8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 ○

○…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기관에 끌려가 피곤죽되게 얻어맞고

어디를 가도 감시의 눈초리 따라붙어

학교에 돌아오면 파면과 해직 기다려

 

- 천막교회 피습 똥통에 십자가 빠트렸다가 회유책 -

 

고양이 쥐 생각하던 시절

학교(광주상고)안에 뿌려진 유신반대 시위 유인물은 모두 윤영규 교사의 소행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윤 교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집에 둔 금서가 걱정되었다.

마침 친분이 있는 정보형사를 통해 한 후배 교사가 면회를 왔다.

후배의 면회는 천재 일우였다.

즉시 쪽지에 써서 몰래 건넸다.

 

이태준의 ‘토지’와 무사기의 ‘대중철학’, ‘세계사 교정’ 등을 감추도록 했다.

윤영규 교사의 부인은 출산을 한 지 열흘도 안된 때라 아직 산후의 붓기도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고 내다보자 검은 양복차림의 장정 둘이 신발도 벗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와 뒤지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함석헌, 장준하, 김재준 목사 등과 윤 교사가 함께 찍은 사진만 압수해갔다.

 

윤 교사는 꼬박 20일 동안 피곤죽이 되게 얻어맞고 각서를 쓴 뒤 풀려났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당했던 공통점이었다.

학교에서는 파면으로 처리되었고 책상도 없애버렸다.

 

그로부터 7일 째 되던 날 중앙정보부 분실에서 “나오라”고 연락이 왔다.

또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분실에 갔더니 뜻하지 않게 학교 이사장과 교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입회하듯 지켜보던 조사요원이 윤영규 교사에게 물었다.

“이제 학교에서도 파면이 되었는데 뭘 해먹고 살지요?”

 

고양이 쥐 생각하는 건가 싶어 삐딱하게 대답했다.

“나야 선생노릇도 이제는 당신들이 모가지 짤라 버렸으니 못하겠고 교회에 가서 목사나 할라요.”

 

조사요원은 정신이 번쩍 드는지 긴장하며 “목사라니?”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시 문동환 목사 때문에 당국이 밤잠을 설치면서 교회 쪽에 감시망을 펴놨을 때였다.

문 목사는 강제철거로 집을 잃고 갈 곳이 없게 된 사람들을 도와 천막교회를 세우고 함께 지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기관의 사주를 받은 깡패철거반원이 난입하여 십자가를 똥통에 빠트린 사건으로 시끄럽게 됐다.

 

이로 인해 유신정권에 우호적이었던 장로회 목사들까지 들고 일어나 매일 항의집회를 여는 등 성토했다.

항의집회는 대학가의 시위와 자연스럽게 연대하면서 당국을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는 회유책으로 기독교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진압대신 대화를 유도해서 완화시킨 것으로 기울었다.

그 것이 주효했던지 기독학교인 재단측의 제안으로 윤 교사를 다시 받아들여 남자 고교에 두지 않고 여자고등학교로 보내는 방법이 협의 되었다.

 

기관에서도 “학교측이 책임을 지는 조건이면 윤 교사의 복직을 허용하겠다.”고 동의했다.

 

 

양서조합 조직 독서운동

이렇게 해서 돌아온 윤 교사는 남자고교에서 여상고의 조건부 교사 신분으로 받아들여 재취임했다.

바로 이 무렵 서울 명동 성당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함세웅 신부 등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한 것이 빅뉴스가 되었다.

 

이를 기폭제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위와 군사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던 대학가의 데모가 한층 더 격화 되었다. 윤 교사의 일상은 광주여상고의 조건부(기간제)교사로 수업에 열중했고 나날이 다르지 않았다.

담당형사가 배치되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 때문에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 와중에서 시간이 나면 광주고등학교 앞의 ‘녹두서점’에 들러 주인 김상윤과 교분을 쌓았다.

하루는 주인이 “어떤 책을 찾으세요? 이 책도 좋은 책인데…” 라고 넌지시 내밀었다.

받아 보니 금서로 묶여있던 리영희 선생의 ‘이성과 우상’이었다.

“그 책은 저도 봤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 책은?”

조심스럽게 보여준 책은 처음 보는 시집이었다.

양성우 교사의 시집 ‘겨울 공화국’이었다.

윤 교사는 두말 않고 사서 집에 돌아온 뒤 밤이 깊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날 이후에도 윤 교사는 녹두서점에 빠지지 않고 퇴근시간을 이용해서 들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와 절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박석무라고 합니다”

“저를 어떻게 알고 찾았는지요?”

“이번에 중정 분실에 끌려가 고생하다가 풀려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그 때 박석무 교사는 후에 전교협가입으로 해직되었고 김대중 총재가 이끈 야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교육위원회에서 이철·강삼재 의원 등과 3총사가 되어 여당과 노태우 정부 문교부의 저격수로 활약이 컸다.

이처럼 광주고교 앞의 녹두서점은 민청학련사건 등으로 학생들의 반유신운동이 초토화된 상황에서 오갈 데 없어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지식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었다.

 

1972년 겨울에서 73년 봄까지 유신반대 운동 등 성명발표에 앞장섰던 김남주 시인과 이강·김정길과 함께 박석무도 녹두서점의 단골맨이었다.

 

민주교사협의회 태동 발족

봄기운이 아직 싸늘하게 느껴졌을 때 박석무 교사가 윤영규 교사에게 “저희가 ‘민주교사협의회’조직을 끝냈는데 선생님께서도 들어오시지요”라고 권했다.

 

이 조직에는 박석무 말고도 송문재·임추섭 교사 등이 가입하여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녹두서점에서 박석무 교사와 시인 문병란·이일행·장석두 선생들과 시국방담을 하다가 연장자인 이일행 선생이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뭔가 해 봅시다”라고 제안했다.

이에 이구동성으로 민중을 깨우치고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시국관을 심어줄 독서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양서협동조합’을 만들어 시작했다.

그러나 연락처를 어디에 두며 방 한 칸이라도 마련이 되어야 사무실을 꾸릴 수 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때 윤영규 교사가 “제가 YMCA에 한번 말해보겠습니다”라고 앞장섰다.

당시 광주YMCA 조아라 여사의 배려로 양서협동조합은 연락처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