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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모처럼 ‘敎育機會 擴大’ 용어 새롭고 신선


모처럼 ‘敎育機會 擴大’ 용어 새롭고 신선

-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교과부 44년 출입기자의 추적(제142회) -

○… 본고는 금년 5월 15일로 교과부 출입기자 44년을 넘기고 45년째가 될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 … ○

○… 호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도서 벽지 먼저 中學교육 義務化 계획

산업체 부설 學級 開放大 설립해서 수용

특수교육 진흥 등 放送通信敎育 넓혀

- 읍·면지역 학교 國立化 “도시 못지않게 育成” 구성 무산 -

26대 권이혁 문교장관

〈1983.10.15∼85.2.18 재임〉

〈전호에서 계속〉

▲1984년 2월 9일 보고된 문교부 주요 업무계획 중 하나인 일반계 고교의 과학교육도 활성화 했다.

과학에 재능이 있는 우수학생의 과외활동을 권장·강화했다.

전국에 6개교를 연구학교로 지정 운영했다.

그러나 과학교과의 운영을 보완하는 수준이었다.

▲대학의 첨단 과학교육을 강화했다.

당시의 정부 과학기술처가 독립된 부처로 자리를 잡았다.

이 상황에서 문교부의 고등교육 수준 과학교육은 첨단이 목표였다.

이에 대학원을 포함한 첨단과학분야 인력을 중점 육성했다.

그리고 선도산업분야를 확충했다.

우수 이공계 대학(원)의 전자·전산·유전공학·재료공학·항공공학 분야가 확충됐다.

이에 따른 학과의 개편과 신설을 적극 권장했다.

이때 관련부처(과학기술부)와 협의하는 것은 순서였다.

교육부와 과학기술부가 통합된 지금에도 관련부처의 지원 등 협의는 배제될 수 없다.

관련부처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달라진 때문이다.

첨단산업 기술연구요원 양성이 시급했고 대학원의 관련학과 중점 육성으로 대처했다. 아울러 대학부설 유전공학연구분야 연구소 설치를 권장했다.

이어서 이공계 대학의 우수교수 확보가 시급했다.

이를 위해 우선 국외연구 130명을 선발해서 파견했다. 아울러 국외과학자 20명을 유치했다.

당시 문교부는 우수교수만 확보하지 않고 이들에게 첨단과학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중점 지원했다.

지원은 연구비만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처우개선도 포함했다.

동시에 이공계 대학의 우수학생 유치를 병행했다. 특히 대학원생 280명을 뽑아 장학금을 지급했다.

▲직업기술교육을 심화했다.

이는 전산교육 강화와 특성학과의 중점 육성으로 양수 겹장했다.

전산교육은 공고에 전산기기를 960대 보급했다.

상고는 모두 전산실을 설치했다. 이때 기기를 늘려주고 5,375대에 불과한 것을 7,110대로 확대했다.

전산교육은 공고와 상고에 이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 일반계 고등학교까지 확대했다. 이것이 지금은 ‘정보화 교육’으로 달라지고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다루는 나라의 학생으로 발전했다.

그 시기에 대학은 전자과와 전산학과를 증설하기 바빴고 16개 4년제 대학과 27개 전문대학이 앞장섰다.

농업교육은 ‘자영농과’의 운영을 내실화하고 중견 영농후계자 양성에 역점을 두었다.

이렇게 해서 1984년도 농업고등학교의 졸업생 88.3%가 농촌으로 돌아가 정착했다.

나머지는 농과대학에 진학하거나 농기구제작 분야로 진출했다.

이들에 의해 농촌의 경운기가 개발 보급되고 농업이 달라졌다.

농협과 농수산부의 협력으로 농고생의 자립체제 기반 구축을 위한 육성학교를 늘려 기존의 10개교에서 20개 고교 지정했다.

공고교육의 충실은 출신 중학교의 추천입학제도를 확대해서 적격학생을 유치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산업체와 연계교육을 심화 했다.

상고 교육도 기능을 보강해서 기초직무능력을 배양하고 산업발전 추세에 부응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기능별 학과를 설치했다. 이때 설치된 상고의 학과는 상·무역·회계·정보처리과였으며 전문계 고교의 효시가 된 것이다.

▲전문대학교육에도 내실화 바람이 불었다.

고등직업인의 긍지를 함양하기 위해 직업윤리교육을 심화했다. 취업기회를 확대하고 임금격차를 해소하는 등 정부투융자기관에서 솔선했다.

이에 따라 사기업도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다음은 교수·학습방법의 개선으로 교육내실을 다졌다.

먼저 고등직업교육 특성에 맞는 모형 교육과정을 계발하고 산업발전에 따른 교재의 수정과 보완이 뒤따랐다. 아울러 생산중심 교육을 강화했다. 실험·실습교육을 철저히 하면서 이론대 실습의 비중을 50대 50으로 조정했다.

전문대학별 학생작품전시회 개최를 권장하고 필요한 지원에 인색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특히 졸업 후 현장 적응능력을 배양하고 산·학협동의 활성화로 190개 업체가 이에 동참했다.

이에 앞서 121개 업체이던 것이 69개 업체로 불어난 것이다.

대학에서도 현장실습에 학점을 부여했다.

우수학생은 기업이 앞장서서 국외 현장연수에 보냈다. 졸업 후 인력자원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현역 중견 기업인 가운데 당시 국외 현장연수 출신이 많은 것으로 성과는 입증된 셈이다.

전문대 직업교육의 내실화는 산업체 인사의 교수요원 활용에서 기여도가 컸다. 교수 연수의 강화도 이런 측면에서 기획되었고 산업체 현장연수와 연계했다.

대학마다 교수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자체연찬이 강화 되었고 국가기술자격시험제도에 접목했다.

이에 연계 강화됨으로써 실기종목이 13개에서 65종목으로 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문대학의 실기교육은 자리를 잡게 됐다.

다음은 특성확과의 중점 육성이다. 전산·외국어·육아교육·관광과를 국책사업으로 지원했다.

현직 유치원교사 중 전문대 유아교육과 출신이 많다.

정밀기계와 용접, 금형, 산업안전과도 이때 설치를 권장했다.

교육기회의 확대

이날 권이혁 문교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교육기회의 확대’는 용어부터 새롭고 신선했다.

그리고 우선 대상으로 중학교의무교육 준비와 특수교육 진흥 및 방송통신교육 확대 등 세가지를 꼽았다.

▲중학 의무화 준비는 1985년부터 면지역에 있는 도서·벽지학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이 계획은 86년까지 시한을 뒀다. 당초 구상은 읍·면지역 학교를 국립학교로 전환해서 이농도 막고 도시 못지않게 육성코저 했으나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 이상 지역은 단계적 확대로 계획했다.

실시를 위한 제도 정비에 나서 관계법령을 보완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의무교육은 처음 초등을 무상으로 실시했고 중학교는 단계적 실시로 2008년까지 완료하는 데 23년 걸렸다. 남은 것은 고등학교이지만 현재 진학률 98% 이상으로 준 의무교육화 된 것이다.

▲특수교육 진흥은 심신장애아의 교육기회를 확대하고 취학률을 23%에서 27%로 4% 늘렸다.

특수학교도 늘려 기존 72개교에서 78개교로 6개교 증설했다.

이와 같이 취학률과 학교증설은 한자리수에 불과했지만 정책의지는 그 이상으로 장래가 낙관됐다.

교육내용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교사용 지도서와 학생용 학습자료를 각각 12종씩 개발해서 현장에 보급했다. 특히 점자교과서를 발간 보급한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감응이 달랐다.

새로운 교육과정을 적용, 편찬했고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

당시의 특수교육은 복지교육 차원에서 지원된 것이다.

▲방송통신교육 확대로 평생교육의 기회도 넓혔다. 먼저 지역의 공립고교에 부설로 운영한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육을 내실화 했다.

학교 증설은 48개교에서 2개교 늘린 50개교였다.

교과서를 개편하고 방송강의와 출석수업 및 자율학습에서 상호 보완이 되게 했다.

이와 함께 방송통신대학 운영을 강화했다. 학과를 증설하여 10개 학과에서 13개 학과로 늘렸다.

9개 협력대학에 지역학습관을 설치했다. 교재개발은 자학자습용 녹음자료를 제작 활용했다. 대신 졸업학력평가시험 관리에 철저했다.

당시의 평가관리를 지속해서 지금은 방송통신고교 졸업시험과 방송통신대학의 학점관리가 가장 엄격하고 공정해서 신뢰받고 있다.

때문에 방송통신대학에서 취득한 학위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누구도 이의가 없다. 특히 방송통신고등학교의 졸업시험은 국가관리 자격고사로 일반 고등학교의 졸업학력과 다른 것에 의미가 있으며 주경야독의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다.

▲사회교육도 충실하게 계획하고 시행했다. 평생교육으로 일컬은 현재보다 애정을 갖고 도왔다.

대상은 근로청소년, 개방대학, 사회교육, 건전한 가풍조성, 도서관 확충으로 뿌리를 내렸다.

직업청소년의 교육기회 확충은 산업체부설학교를 44교에서 46개교로 늘리고 특별학급도 741학급에서 777학급으로 증설했다.

이들을 도맡아 야간수업에 열정을 쏟은 교직원의 사기를 진작하고 학생들도 왕성한 학습 의욕으로 매진하도록 했다.

이에 우수 산업체와 유공교직원 등 모범학생을 포상하고 이들의 수기를 모아 ‘일하며 배우며’라는 이름을 붙여 책으로 엮어내서 발표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산업발전은 가능했고 시금석이 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개방대학 제도를 정착시키고 운영도 충실했다.

금형과 산업안전과 등 기술인력양성과를 신설하고 전학제도를 도입해서 직장인의 수학편의를 제공했다.

이것은 지역별 분야별로 확대해서 1개교 뿐인 것을 4개교로 늘렸다.

사회교육기능을 활성화하고 문교부 직속으로 ‘사회교육정책조정위원회’를 구성해서 운영했다.

사회단체와 기업체의 사회교육실시를 권장, 지원하고 이때 국민정신교육을 필수화 했다.

정신교육은 어떤 경우에도 빠지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사회교육전문요원을 양성했다.

이들 대학과 부설 연수기관에서 도맡았다.

특히 사회단체를 통한 건전한 가풍조성은 호응이 컸다.

이때 노령인구의사회참여 기회를 넓혀주고 전통문화 전승자로 대접해서 역할에 신바람이 나도록 했다.

아울러 전국에 ‘노인교실’ 6,668곳을 두고 운영했다.

가정교육을 강화하고 이에 주부단체가발벗고 나서 가정교육이 제자리에 서도록 했다.

‘주부교실’ 228곳을 두고 운영했으며 문교부산하유관단체로 ‘한국주부교실중앙회’를 두었다.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도서관 확충은 국립중앙도서관의 기능을 증대하고 전국도서관과 협력망을 구축해서 전산화 했다.

인터넷을 통한 협력망 구축이 이때 시작된 것이다.

문교부에 의해 국립중앙도서관이 신축되어 이전하게 되면서 토목 및 골조공사는 1984년 완료했다.

이밖에도 공공조서관을 증설하여 147관에서 153관으로 늘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