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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전교조 복직에 반기 든 교육감 만나 담판

전교조 복직에 반기 든 교육감 만나 담판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29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왜 그렇게 선별해서 제외하나?” 묻자

이에 “장관이 처리하겠다” 엄포 제압

“그들은 아직 교단에 세울 수 없다” 대답

-그토록 애써 구했던 교사들 새삼 해직위기 악순환-

김영삼 정부 두번째 임명

34대 김숙희 교육부장관

<1993. 12. 22~ 95. 5. 12 재임>

전교조 피눈물 회견 후 복귀

 

<전호에서 계속>

이날(93.10.15) 정해숙 전교조 위원장의 기자회견 후 언론은 “전교조의 해직교사 자진 복직은 학교현장을 중심으로 교육개혁과 합법화를 위한 교육관계법 개정의 투쟁이 연계될 것에 주목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전교조는 담화문과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1993년 10월28일까지 교육부가 복직 대상자로 밝힌 1,484명 가운데 간부 4명과 학원강사와 전업 등으로 복직을 미룬 59명을 뺀 나머지 1,421명이 전국에서 일제히 동시에 해당 시·도교육청에 복직신청서를 접수시켰다.

 

이 시기는 오병문 교육부장관의 경질이 1개월22일 앞둔 때였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서울시교육청(교육감 이준해)은 사학민주화 관련 해직교사와 임용 제외자로 분류한 상당수의 해직교사 복직신청서는 접수를 거부한 채 받아주지 않았다.

 

이 때 교육청 직원이 동원되어 신청한 교사의 집에 전화를 걸고 “전교조에서 탈퇴하느냐?”고 묻는 등 확인하기 바빴다.

 

다른 시·도의 교육감들은 서울이 주도한 것에 따르는 것으로 담합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서울시교육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곧 전국에 확산될 것을 예고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교육부는 예상했던 대로 1993년 11월11일 전국교육감회의를 열고 해직교사 복직을 위한 구체 일정을 시달했다.

때는 오병문 장관이 경질되기 1개월 10일 전이었다.

 

이날 시달에서 명시한대로 사학민주화 및 전교조 관련 해직교사 223명은 선별 대상으로 복직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격분한 사립학교 해직교사들은 ‘복직대책위원회(위원장 배춘일)’를 구성하고 11월 말부터 10일간 마포에 있는 야당인 민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이처럼 1993년은 전교조 해직교사의 복직을 둘러싼 방안만 무성한 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12월21일 오병문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으로 김숙희 장관이 뒷날 취임하여 송년을 맞고 있었다.

 

특히 시·도교육감 대부분이 ‘선별복직’을 고집하면서 “이 기회에 전교조는 씨를 말려야 하거늘 웬OECD가입 조건에 걸려들고 있느냐?”고 반발했다.

 

이에 앞장선 시·도교육감 대부분은 노태우 6공 정부 때 교육부장관 제청으로 임명되어 전교조 가담교사를 징계해서 해직한 전력에 비추어 복직은 달갑지 않은 천적이었다.

 

 

결심하면 주저없이 실행 신뢰

 

이날(1994.1.3) 정해숙 전교조위원장과 첫 만남에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듣고 알게된 신임 김숙희 장관은 새해(1994)를 맞이하기 바쁘게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과제를 실천하기 위해 당사자인 정해숙 전교조위원장의 증언을 통해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확인했으며 대책이 서는 것에 흡족할 수 있었다.

 

또 정해숙 위원장의 증언은 혼자만 듣는 자리가 아니었고 자신과 정 위원장은 이해당사자로 알아야 할 것은 분명하게 충분히 알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김숙희 장관은 문민정부의 2기 내각에서 교육부장관이 된 마당에 전교조 해직교사의 복직 과제가 어디에서 막히고 얽혔는지 알게 되었으며 취임 후 업무현황 보고를 받을 때도 알지 못했던 교원정책의 베일을 걷어낼 수 있었음은 새해(1994)가 주는 행운이었다.

 

또한 김숙희 장관은 결심한 바가 있어 서울시교육청에 직접 찾아가 이준해 교육감과 담판했다.

첫 마디가 “복직을 신청한 선생님들을 왜 그렇게 많이 선별해서 제외시키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 교육감은 “면담결과 그 선생님들은 아직 교단에 서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때 김 장관의 언성이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높아지면서 “그들은 당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누리는 사람들 아닌가요? 그럼 내가(장관) 직접 면담을 해서 처리해 볼까요?”하면서 몰아세웠다.

 

그러자 이준해 교육감은 더 이상 장관과 맞서는 것을 피해 누그러졌고 복직 제외자로 분류된 해직교사 상당수가 추가로 포함되어 교단에 돌아왔다.

 

이를 두고 정해숙 전교조위원장은 훗날 자서전(294페이지)에서 “공적인 면에서 추진력이 남달랐다는 것이 김숙희 장관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며 “이것이 옳다고 판단이 서면 밀고 나가는 힘이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또 “김숙희 장관이 전체 나라예산을 분석해 보니 국방비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교육비가 너무 열악하므로 국방비를 절감하고 교육에 돌려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우리(전교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웠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 절실했다”고 떠올렸다.

 

이처럼 김영삼 정부의 결단으로 전교조 해직교사를 복직시키는 조치에서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서 증오한 사람(교육감)들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에 김숙희 장관이 직접 나서서 구제한 것은 기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복직된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새삼 법외화 되고 이에 맞선 것으로 해직이 반복될 위기의 악순환에 낙담하게 된다.

 

 

장관도 다루기 벅찬 교육감

 

전교조 현안에 관한 한 시·도교육감 대부분은 교육부장관이 다루기 벅찬 상태였고 그 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임 황우여 장관도 취임 후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으며 국회에서 장관 지명자로 청문회 때도 “실정법 준수 범위 이상 넘어서기 어렵다”고 난색을 보인 것으로 짐작케 했다.

 

현직 17개 시·도교육감 중 13명이 진보성향이고 4명은 보수이지만 당장 교육감협의회를 가동하는 일에서 장관 의중대로 이끌기 어렵다.

 

특히 전교조의 법외노조화 문제는 원심에서 전교조 패소로 판결된 이후 고법에 항소심이 계류 중이며 쌍방의 대응도 만만치 않게 전개되고 있어 21년 전 김숙희 장관의 해직교사 복직 때와 유사한 진행형이다.

 

김 장관의 입장에서 돌이켜 보면 그렇게도 애를 써서 복직시킨 결과가 새삼 도진 것에 할 말을 잃게 되고 최근 필자와 만나 찻잔을 놓고 서로 나눈 대화에서도 당시의 회고담 가운데 “장관이 특별교부금에서 2억 원을 지방 읍내에 있는 전통 명문 공립고등학교의 기숙사 건립비로 주었음에도 당해 교육감이나 학교측은 이렇다할 말 한마디 없었다”고 씁쓰레 했다.

 

당시 김숙희 장관이 지원했던 공립고교는 전북 고창고교였고 지나는 길에 일제하에서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사립으로 세워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구국사학이었던 것을 생각하고 예고없이 들렀다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겠느냐?”고 이연규 교장에게 묻자 “해방 후 1954년 공립으로 전환된 시골고등학교라 기숙사가 아쉽다”고 말해 “얼마쯤 있으면 지을 수 있느냐?”고 거푸 묻고 “1억5천만원은 있어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한 것에 2억 원을 보조해서 전북도교육청을 통해 보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도 못하고 장관자리에서 떠나게 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필자는 즉각 고창고교에 전화로 확인했더니 사실이었고…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