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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전임 장관 “오래 하겠나 싶다”더니 경질

전임 장관 “오래 하겠나 싶다”더니 경질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38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95년 5월~12월 교육장관 3명 이취임

사립 梨大부속初校 첫 주5일제 감행

연말 개각으로 長·次官 바뀌고 술렁

-96년 교육부예산 15조원 올해 54조원과 39조원 차이-

김영삼 정부 네번째 임명

36대 안병영 교육부장관

<1995. 12. 21~ 97. 8. 5 재임>

延世大에서 계속 발탁 起用

 

<전호에서 계속>

1995년 12월20일 연말 개각으로 박영식 교육부장관이 경질되면서 후임으로 연세대학교 안병영 교수가 김영삼 정부 네 번째 교육장관으로 발탁, 기용되어 제36대 장관으로 다음달(21일) 취임했다.

 

전임 박 장관이 떠난 모습에서 취임 후 두달째 되던 어느날 필자에게 “너무 바빠서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라며 “결재가 너무 많아서 다음 결재를 하고 나면 그냥 잊어버리니 이래가지고 오래 할 수 있겠나 싶다”고 하소연한 것이 떠올랐다.

 

신임 안병영 장관은 깔끔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면서 잔정이 많은 인상을 풍겼다.

 

목소리가 맑고 표정이 밝은 것에 교육부 직원들은 안도하면서 업무에 빈틈없고 “사람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나돈 소문에서 ‘대쪽장관’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취임 첫 실·국장회의에서 공개행정을 원칙으로 내세운 것에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겠다”면서 ‘대강주의’를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시기적으로 취임이 연말이어서 새해가 열흘 앞에 다가온 것을 강조했고 “새해부터 달라지고 더 나아지는 교육부로 1996년을 맞이하자”고 간부회의에서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나 직업관료의 특성이 그렇듯이 장관 경질에 이은 차관 경질도 공식처럼 된 마당에 인사가 뒤따를 것에 안정되기 어려웠다.

 

그 해(95년) 연말 개각의 정부 인사에서도 장관이 바뀌고 하루가 지난 12월22일 이천수 제37대 교육부 차관이 경질되어 38대 차관으로 경제기획원 출신 이영탁 경제전문가가 임명되어 12월23일 취임했다.

 

이 때 교육부에서 떠난 전임 이천수 차관은 1993년 3월4일 임명되어 재임한 뒤 바뀐 것으로 3장관(오병문·김숙희·박영식)을 보필하는 등 2년 9개월 18일 만에 떠났다.

 

 

문민정부 3년차 시동 출범

 

안병영 장관은 대망의 1996년을 맞으면서 김영삼 문민정부 3년차 국정에 시동이 걸린 것으로 무게를 느끼고 책무감을 새롭게 다졌다.

 

이 때 교육부는 장·차관이 바뀐 상태에서 실·국·과장 등 부내 인사가 불가피했고 자리 바꿈으로 이동하게 마련이었다.

장관 비서관이 이승무에서 김정기로 바뀌고 차관실도 송수갑 비서관을 배우창으로 교체했다.

 

공보관은 이기우에서 이기호로, 감사관은 태칠도에서 김연수로, 교육정책실장은 서정헌에서 김동성으로, 교육기획정책관은 심명섭에서 서범석으로, 대학교육정책관은 정상환에서 금승호(후에 대학교육지원국장)로, 대학교육행정심의관은 차현직에서 조성종으로, 산업교육행정심의관은 김재연에서 이병수로, 전문대학행정과장은 김두식에서 이종서로, 전문대학학무과장은 장관주에서 김경환으로, 지방교육지원국장은 이보령에서 최이식으로, 지방교육기획과장은 서범석에서 이승무로, 지방교육재정과장은 임윤수에서 김왕복(후에 국제협력과장)으로, 과학기술과장은 김정호에서 김현웅으로, 학교보건체육과장은 정현웅에서 황낙현으로, 지방교육시설과장은 서세현에서 유병욱으로, 유아특수교육담당관은 반운경이 유임했다.

 

재외동포교육과장은 동선호에서 곽창신으로, 편수국장은 한명희를 유임시킨 대신 편수관리담당관을 김종태에서 동선호로 교체했다. 이 때 교육과정담당관은 유천근, 인문과학편수관 유학영, 사회과학편수관 김성환, 자연과학편수관 황홍순은 모두 유임시켰다.

 

당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의 정책기획수석실 비서관은 김성동이었고 교육비서실 서기관으로 김남일, 김광조와 연구위원 김태기, 민정실 서기관 김경회, 총무실 서기관 노승회, 공업서기관 김동찬이 파견되어 연대했다.

 

이처럼 당시 교육부 조직과 기구는 2실5국19과19담당관으로 정원은 503명이었다.

 

 

교육예산 15조6천652억원

 

1996년 각급학교 현황은 1만9천802개교에 학생수 1천1백39만7천357명으로 교원수 42만6천766명이었다.

이에 96년도 교육부 예산은 15조6천652억 원으로 95년도의 13조17억원 보다 2조6천635억 원 증액(20.5%)되었다.

이를 2014년도 교육부 예산(54조원) 및 2015년도 정부예산안에 반영되어 국회에서 심의 중인 내년 55조1천3백72억 원과 비교해 보면 19년 전의 규모라 해도 40조 원 차이다.

 

이처럼 안병영 장관의 취임 첫 해인 1996년도 교육부 예산은 세출에서 지방교육재정의 경우 교부금은 8조4천801억 원 규모였고 이에 지방교육양여금관리특별회계 4조1천136 억 원과 교육환경개선특별회계 4천억 원이 포함된 것을 감안하면 지금보다 열악한 편은 아니었다.

 

 

문민정부 교육개혁안 박차

 

역대 정부의 교육개혁 의지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안병영 장관의 취임 첫 해인 1996년 2월9일 교육개혁위원회 제2차 교육개혁안 발표에서 직업교육 등 교육과정 개정 방향을 제시했다.

또 그해(96년) 8월20일 제3차 개혁안 발표에서 사범대학과 교육대학 개편안을 제시했고 이에 따른 교원양성제도의 개선 작업을 지속했다.

 

그 때 개혁안에 담은 내용들은 정권(5년 담임제)의 임기와 맞물린 것으로 다음 정권에서 계승되지 못한단발성이었고 지속성 상실로 새삼 거론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96년 3월1일부터 서울시교육청(교육감 이준해, 부교육감 유해돈)은 주5일 수업제를 이화여대부속초등학교에 의뢰에서 실험했다.

 

공립에서 실험해 보는 것 보다 위험부담이 덜했다는 의미에서 당시 이를 감행한 사립학교의 특성을 엿볼 수 있었고 반응도 좋았다.

 

교육부는 이에 앞서 96년 1월부터 ‘국가 사회적 요구사항’ 조사에 착수해서 3월 새학기부터 구체화 됐다.

이 때 교육과정, 교과서 개발, 각급학교의 현장 교육에 반영할 사항을 핵심에 잡았다.

이 조사 결과는 김영삼 정부의 교육개혁안에 전수 반영되었다.

 

교육부는 또 그해(96년) 2월22일 교육과정심의회 규정과 교육법 시행령을 개정, 공포(대통령령 제14920호)해서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개칭, 3월1일부터 시행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특히 96년 6월23일 한·일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양국의 민간지식인에 의한 역사연구회를 설치 운영하자”고 제안해서 합의했다.

 

이는 95년 11월15일 합의했던 ‘공동연구위’를 대체한 기구가 되었다.

 

안병영 장관은 96년 6월8일 “제6차 교육과정에 따른 초등 5~6학년 도덕·사회교과서편찬 때 ‘월드컵’에 관한 내용을 싣기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