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학교 고유의 사명 충실 민주성 제고 다짐

학교 고유의 사명 충실 민주성 제고 다짐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06회) -

○… 본고는 오는 5월 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될 본지 김병옥(www.edukim.com)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학생 특성 알맞은 교육과 교권의 신장

6공 4년차 교육정책 기틀 공고 진력

대학자율 고교 자주성 도덕교육 강화

- 지금 보다 10배 적은 교육예산에도 의욕은 그 이상-

31대 윤형섭 교육부장관

<1990. 12. 27~ 92. 1. 22 재임>

 

교육정책 기본방향 5줄기

 

특히 1991년부터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개칭된 만큼 교육정책의 기본방향을 새롭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윤형섭 장관의 교육정책 방향은 ① 민주시민의 육성 ② 도덕성의 함양 ③ 교육의 민주성 제고 ④ 교육체제와 교육과정의 다양화 ⑤ 교단지원체제 확립 등 5대 과제를 기본 줄기로 삼았다.

 

이를 차례로 보면 ① 민주시민의 육성은 인간 존엄 정신의 내면화, 자율과 책임이 함께하는 교육, 토의와 타협의 생활화, 공동체 의식 심화로 집약했다.

② 도덕성의 함양은 정신적 가치의 존중, 바른생활습관 형성, 인간교육과 개성 중심의 교육, 범 교과적 도덕교육의 실천이었다. ③ 교육의 민주성 제고는 학교교육 고유의 사명 충실, 학생의 특성에 따른 다양한 교육, 교권의 신장, 교육행정의 민주화였다. ④ 교육체제와 교육과정의 다양화는 대학의 자율화와 고교의 자주성 직업기술교육의 기회확대, 평생교육 기회의 확충, 교과과정의 개편과 다양화였다. ⑤ 교단지원체제의 확립은 우수교원 확보, 교원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 교육시설의 현대화, 교육의 지역간 균형발전이었다.

 

이를 놓고 보수세력의 일각에서는 ‘교육의 민주성 제고’에 이의가 아닌 의문을 제기했다가 호응이 없자 자즈러들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민주’와 ‘자율’은 낯선 듯 생소하게 들리는 용어였다.

 

3실장 5국 25과로 새 출범

 

1991년 1월1일부터 교육부로 새롭게 출범한 당시의 기구와 조직은 기획관리실(실장 이천수·후에 37대 차관) 장학편수실(실징 이준해·후에 서울시교육감) 대학정책실(실장 모영기) 등 3실, 5국 및 국장급 담당관 등 25과였다.

 

당시 5국은 보통교육국(국장 이보령) 교직국(국장 류해돈) 과학교육국(국장 박준열) 사회국제교육국(국장 김상구) 교육시설국(국장 금승호·후에 청와대 교육비서관)이었다.

 

주요 담당관은 기획예산(담당관 김상권·후에 42대 차관) 행정관리(담당관 김윤수) 법무(담당관 정상환) 교육개혁추진(담당관 정태위 장학관) 교육과정(담당관 함수곤) 학사지도(담당관 박윤근) 유아교육(담당관 김영길) 등이다.

 

과장 및 과장급(서기관)은 비서관(김홍원) 총무과장(성기선) 편수행정관(이기우·후에 47대 차관) 대학행정심의관(송봉섭) 대학행정과장(정형진) 대학재정과장(김진동) 대학학무과장(김재연) 대학학사심의관(조선제·후에 40대 차관) 학사관리(옹정근) 학술진흥과장(최이식) 교육행정과장(이태우) 교육재정과장(송세화) 의무교육과장(이병수) 교육자치실시기획단(단장 김태진) 교직과장(이기호) 교원양성과장(김종석) 교원연수과장(장관주) 교원복지과장(유영창) 실업교육과장(김성덕) 과학교육과장(송영식) 전문대학행정과장(정한로) 전문대학재정과장(차현직) 사회교육진흥과장(권황옥) 사회교육제도과장(허만석) 국제교육협력과장(유강하) 재외국민교육과장(고재형) 등이다.

 

이밖에 국장급 담당관으로 허만윤 감사담당관을 꼽을 수 있고 장학편수실의 면면은 장학의 활성화와 편수조직의 설치가 추진되고 있는 지금과 비교해서 재조명하게 된다.

 

당시 편수관리관(2급상당)은 박병호 장학관이었다. 그 밑에 교육과정담당관(함수곤)을 두었으며 편수전담 교육연구관 3명(이범주 정영권 소정자)과 연구사 2명(김영익 박정자)을 배치했다.

 

인문과학편수관(한상진·현 서울시 문용린 교육감의 여주농고 재학 때 담임) 밑에 편수전담 연구관 4명(김석진 한정근 정준섭 오병각)과 연구사 4명(이순영 허천행 심광운 신윤수)을 두었다.

 

사회과학편수관(한명희) 밑에는 연구관 3명(김용만 윤종영, 박문기)과 연구사 3명(이창호, 채희두, 최병모)을 두었다.

자연과학편수관(장종택) 밑에는 편수전담 연구관 8명(김동진 정성봉 곽한철 서근우 이기훈 고석달 이동길 구자락)과 연구사 10명(김진락 이규석 김석진 장명진 이재혁 김의장 김학영 임공희 정봉섭 이정규)을 두었다.

 

장학편수실의 장학진은 교육연구·정신교육·교과지도·생활지도 등 전담장학관과 교육방송관리관을 두었다.

 

이 가운데 교육연구장학관(이진재) 밑에 장학관 2명(윤웅섭 조용찬)과 연구관(김성기) 연구사 2명(이성구 송영현)을 두었다.

 

정신교육장학관(김진성)도 그 밑에 교육연구관 2명(정재식 신상조)과 연구사 2명(이원우 강사민)을 함께 두었다.

교과지도장학관(이태원)은 연구관 2명(김영소 우정남)을 두었고 생활지도장학관(오종호)은 장학관 2명(김순오 김덕환)과 연구관(최인용) 외에 연구사 3명(최강문 박경조 김정호)을 두었으며 교육방송관리관(노수정) 밑에 교육방송기획관(이철기)을 두면서 행정사무관(최수태) 교육연구관(박용복) 등 연구사 2명(이광형 홍순직)을 배치했다.

 

교육방송편성심의관(구학봉)을 두고 그 밑에 연구관 3명(이종락 송재완 이원구)과 연구사 3명(박연수 최윤도 조상제)을 배치했다.

 

교육방송운영관(조성종) 밑엔 사무관 2명(노승희 김봉희)도 함께 배치했다.

 

이들 가운데 교육부차관 4명 서울교육감, 청와대 교육비서관 등 6명이 나왔다.

 

 

교육예산 5조1619억 원

 

23년 전인 1991년도 교육부 예산은 5조1천619억 원 규모였다.

이를 2013년도 박근혜 정부의 첫해 교육부 예산과 대조하면 53조8천2백64억(총 재정지출 규모)원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때보다 10배 이상 수준 증액되었다.

 

이에 1% 증액된 것이 올해(2014) 교육부 예산이며 지방교육재정은 0.6% 증액으로 잡고 있어 당시의 사정과 비교해 보기 어렵지 않다.

 

23년 전의 교육부 예산은 쓰임(집행)에서도 지금과 엄청난 차이였다.

 

그러나 당시의 윤형섭 장관이 내건 교육정책의 5대 기본방향은 예산은 지금만 못하지만 시대정신에서 못했다고 하기 어렵게 내실화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 1991년의 학교는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국·공·사립 모두 합해서 1만9천545개교였으며 2014년 현재 2만137개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학생수는 786만6천911명으로 현재 738만4천788명 보다 많았다.

교원은 39만912명으로 현재 47만6백여 명 보다 적었다.

학생은 줄었는데 예산과 교원은 더 많이 늘었다.

 

 

면단위 전지역 중학의무화

 

윤형섭 장관의 취임 첫해는 눈 코 뜰새없이 바빴고 질주했다.

1991년 1월23일 대통령령 제13163호에 의해 국립국어연구원이 문화부소속 기관으로 넘어가 이관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