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해직교사 생계돕는 성금 전국에서 답지

해직교사 생계돕는 성금 전국에서 답지

 

- 교육부 48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276회)

 

학생 학부모 자진해 모아 1천만원 전달

헌정중단 민주화 회복기의 불심지

사사롭게 쓰지 않겠다면서 기획실 차려

 

- 고교생 유신반대 시위 막자 유리창 박살 울분 삭여 -

Y교사회 17명 파면 해임

<전호에서 계속>

 

이와 같은 여론몰이로 김진경·윤재철 교사가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되고 Y교사협의회에 가입한 교사 17명은 파면 또는 해임시킨 것으로 사태가 누그러지는 듯 했다.

 

그러나 교육민주화를 열망한 교사들의 자구적 노력과 의지는 공권력으로 꺾을 수 없게 강인했고 스스로 “엄동을 이긴 인동초”라며 “우리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은 나팔꽃이 아니라”고 자부했다.

 

문교부 지시에 따라 시·도교육청의 징계로 파면·해임·정직 등 처벌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는 교사들의 모습에 후배교사와 학생들의 성원이 잇따르고 교사회 가입여부에 관계없이 후속을 있는 것에 시·도교육청 담당 장학사들은 “일제 때 독립운동 같다”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당시 광주광역시의 안 모 교육감은 징계위원장인 부교육감에게 “모조리 파면 처리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래야 저 사람(교사)들이 법원에서 과잉처벌로 풀려날 수 있으므로 그거라도 해 주자”고 말한 것이 화근으로 경찰과 당국의 의심을 사게 된 일화도 있다.

 

이 와중에 Y교사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유상덕 교사가 서울사대 이병설 지리과 교수의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면서 Y교협은 옮도 뛰도 못한 처지에 몰렸다.

 

그러나 이들 교사를 돕는 성원이 재야운동권과 전국의 학생 교사 학부모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확산되면서 해직교사 생계를 돕기 위해 모인 성금이 무려 1천만 원이 넘었다.

 

해직교사들은 성금을 전달 받은 뒤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사사롭게 쓰거나 생활비에 보태지 않겠다.” 면서 “교육기획실”이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이 조직이 ‘민주교육실천협의(민교협)회’가 되었으며 연세대학교 성래운 교수와 전남대 문병란(시인)교수, 이오덕 교장이 공동의장단에 합류하고 윤영규·이우정·이효재 교사는 자문위원으로 동참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민교협은 Y교협과 함께 교육운동의 쌍두마차로 신군부 독재와 투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이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 5공 신군부정권의 마지막까지 교육민주화운동의 기폭제로 간단없이 투쟁했고 5·16쿠테타에서 1987년 12월 대통령직선제 부활까지 헌정이 중단된 시기의 민주회복기에 불심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노태우 직선 대통령은 첫 김영식 문교부장관에게 “불법화해서 조치하라”고 엄명했다.

 

 

YMCA 교사회 뿌리 조직

Y교사회의 모태는 YMCA교사회였다. YMCA교사회와 합류한 민교협의 조직에서 뿌리가 되었음은 특기할 일이다.

 

1970년대의 박정희 군사 정권하애서 민주화를 갈망하기에 이르러 기독교와 불교신자인 교사들이 주도한 것은 우연일 수 없었다.

 

1975년 사립 광주상고 윤리담당으로 들어간 윤영규 교사는 고등학생까지 강제로 유신체제에 박제하듯 앞세운 교육정책에 반감이 끓어 올랐다.

 

바로 이 무렵 광주상고생들은 인접한 다른 고교생들과 함께 거리에 뛰쳐나가 “유신반대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에 앞서 3학년생들이 주도한 시위 결의가 운동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학교측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의 저지로 교문까지 나갔다가 쫓겨 들어왔다.

 

그러자 분을 삭이지 못한 2학년생 이진영군이 싸리빗자루를 휘둘러 교실 유리창 200여 장을 박살냈다.

 

즉각 이군에 대한 학교측의 징계가 시작됐다. 징계위원장인 교감이 징계위원들에게 의견을 묻자 교무주임을 위시한 대부분의 참석자가 퇴학처분을 요청했다.

 

이에 윤영규 교사가 반대하고 나섰다.

“유신반대 시위를 막는 것에 참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그 나이의 의분을 높이 사서 가르치면 동량이 될 수 있음에도 퇴학부터 생각하는 것은 교육포기와 다르지 않다”면서 “용서하자”고 역설했다.

 

징계는 퇴학을 요청한 교사가 많고 윤 교사처럼 반대 교사는 수가 적어 제적으로 추방됐다.

그래서 혼자보다 열 사람의 힘이 필요한 것을 절감하고 퇴학당한 학우를 못잊어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울타리가 되도록 상고 안의 학생 서클인‘Hi Y (YMCA 학생클럽)’를 조직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학교 밖의 운동권과 접촉하기 쉬워졌다.

 

당시 MRA(도덕재무장운동)의 정준 총재는 윤 교사의 한신대 선배였다.

이것이 인연으로 윤영규 교사는 MRA 전남지부장을 맡게 됐다.

 

윤 교사는 학교 밖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YMCA청소년부위원에다 전남 적십자사 청소년지도위원까지 맡게 되었다.

 

그때 Hi Y의 청소년 10대 광장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고교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경찰과 정보 당국의 감시도 자연 강화되었다.

 

윤영규 교사는 이미 요시찰 인물로 미행이 따랐다.

1976년 2월 10일 윤 교사는 전남대 대학원 철학과에 원서를 냈다.

원서를 접수시킨 뒤 학교(광주상고)에 돌아오자 교감이 “잠깐보자”면서 “나하고 함께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목덜미에 서늘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죄 없이 끌려가 20일간 곤욕

“그곳이 어딘데요?”라고 물었으나 대답대신 앞을 서며 “따라오라”고 했다.

윤 교사는 비로서 자신이 기관에 구인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순순히 교감을 따라 교문 밖에 나왔을 때 후배인 박원용 교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박 선생! 내가 오후 5시까지 돌아오지 않거든 우리 집사람과 YMCA에 연락해서 중앙정보부(광주분실)에 끌려갔다고 전화해 주소, 알았제 무슨 말인지…”

 

이때 교감은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 세우고 윤 교사더러 “안쪽에 타라”면서 먼저 태웠다.

 

교감이 중정분실의 출입문 입구 수위실에 들어가 전화를 거니까 요원 두 사람이 나왔다.

 

교감은 말없이 돌아가고 윤 교사만 지하실로 끌려갔다.

그들은 신분을 확인한 다음 맨바닥에 꿇어 앉혔다.

 

다음에는 군화발로 사정없이 무릎을 짓밟았다.

“이 나쁜 놈! 학교선생이 애들이나 잘 가르치지 까불어!” 밑도 끝도 없는 말로 시작된 매타작이 밤 낮 사흘동안 계속되었다.

 

학교(광주상고)안에 뿌려진 유신반대 시위 유인물은 모두 윤영규 교사의 소행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윤 교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집에 둔 금서가 걱정되었다.

마침 친분이 있는 정보형사를 통해 한 후배 교사가 면회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