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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21년 전 8월에도 전교조 해법은 대립각

21년 전 8월에도 전교조 해법은 대립각

- 교육부 49년 출입기자의 역대 교육장관 발자취 추적(제327회) -

○… 본고는 지난 5월16일로 교육부 출입기자 49년 째가 된 본지 김병옥(010-5509-6320) 편집국장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2006년 6월호 특집에 기고했던 것으로 당시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장관 48인론(20페이지 수록)’을 독자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보완, 단독 연재한다 〈편집자〉 … ○

 

 

교육부 추진계획 담화 발표하자

1500여명 해직 중 단 88명 복직신청

전교조 전제없는 일괄타결 요구

-지혜로운 해결책 등 모색하느라 쌍방 고뇌 깊어-

김영삼 정부 두번째 임명

34대 김숙희 교육부장관

<1993. 12. 22~ 95. 5. 12 재임>

복잡 미묘한 복직방침 거부

<전호에서 계속>

 

이렇듯 전교조 여성위원장의 해외활동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직접 듣게된 김숙희 장관은 단순히 전교조 문제만이 아닌, 한국의 교사들이 국제사회에 끼친 영향에 감명받았고 OECD가입으로 당당하게 나설 수 있음도 자부하면서 긍지가 되는 것을 이날 만남의 보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정해숙 전교조 위원장의 설명은 게속 국내에서 벌어진 상황으로 이어졌다.

 

김숙희 장관은 입각하기 5개월여 전인 1993년 6월29일에 있었던 일들을 정확하게 듣게 된 것이다.

 

이날 전교조 위원장과 전임 오병문 교육부장관의 제2차 면담이 있었다고 했다.

 

이날도 오 장관이 만나자고 해서 장관실에서 독대한 것으로 8일 전인 6월21일 국회교육위원회(위원장 조순형의원) 월례보고를 통해 “전교조 해직교사의 복직은 탈퇴각서를 전제한 것으로 1994학년 3월 새학기부터 교단에 설 수 있게 한다”고 밝힌 조치에 대한 후속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시기적으로 1994학년 신학기면 김숙희 장관에게는 당장의 문제가 되는 것에 긴장하게 되었다.

 

오병문 전 장관의 국회 보고에 따른 후속 조치를 제의받은 정해숙 위원장은 “조건없는 복직으로 당장 1993년 8월까지 절차를 끝내 9월 2학기부터 원상회복되는 것 이상 동의할 수 없다”면서 “국회에 일방적으로 조건부 복직을 보고해 놓고 이에 따르라는 식의 강요와 교육부대책은 온당한 처사일 수 없다”고 반대했다.

 

특히 이날(1993. 6.29)은 명동성당에서 2백여 명의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단식농성을 벌인지 9일째 되는 날이었고 교육부의 복직 조건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정해숙 위원장도 평소 오 장관과 친소관계를 떠나 단호했다.

 

 

교육부 강행 복직계획 담화

 

그러자 오병문 장관은 “교육계 반발도 감안해야 하는 것이 내 입장이고 정부의 방침이며 해직자 가운데 탈퇴하고 돌아올 교사가 20%가 넘는다고 연일 보도가 되고 있으니 이 사람(20%)들만이라도 전교조에서 풀어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고 나섰다.

 

결국 이날 2차 면담은 정해숙 위원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성과 없이 무산되었고 오 장관은 7월24일 담화문을 통해 ‘전교조 해직교사 채용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이 때 복직 대상은 ①전교조 관련자 ②교사 시국선언 참여자 ③원상복직추진위원회 관련 해직자 등에 국한되었다.

시행은 “특별채용 형식으로 본인의 ‘채용신청서’를 받아 전교조 탈퇴의사를 명기한 후 서명 날인한 것만 허용한다”고 강경했다.

 

그러면서 복직 결정권은 시·도교육감의 재량에 맡기고 교육부는 결과만 보고 받아 종료한다는 방침이어서 “전교조 와해 공작이면서 반발을 유도한 것으로 모자라 내분을 격화시킬 효과까지 노려 교육계 친화가 목적이었던 김영삼 문민정부의 통치철학까지 뭉개려는 의도로 비쳐지기 십상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편승한 일부 시·도교육감은 “신청서에 전교조 탈퇴각서만 첨부해서 제출하면 즉석에서 복직이 허용되고 임지(학교)를 결정해서 바로 교단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맞장구쳤다.

 

또 교육부가 제시한 1993년 9월30일 시한까지 많은 해직교사가 채용신청서를 접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도마다 부교육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반’을 가동했다.

 

반면,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누구도 이에 따르지 않았고 8월에 들어서기 바쁘게 전교조 시·도지부별 반대집회가 연속적으로 개최되면서 교육부 조치와 시·도교육청의 ‘대책반’을 성토했다.

 

 

전교조 일괄타결안 공감대

 

이에 전교조 서울지부는 8월8일 서울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해직교사 총회를 열고 ‘전면 거부 결의’로 맞섰다.

 

이처럼 1993년 8월은 전교조시·도지부의 해직교사들이 교육부조치에 반대한 결의를 굳힌 것으로 뜨겁게 지나갔고 9월14일 정해숙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신축적 자세를 촉구한다”면서 “이달(9월30일)안에 복직문제 일괄 타결을 위한 협의”를 교육부에 제안했다.

 

이 제안에는 탈퇴를 명시하지 않고 복직 대상을 확대하되 선별방침을 철회하고 임용 절차를 간소화 해서 복직되면 해직기간 동안의 경력 인정과 호봉 재획정 등 후속 문제는 순차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방안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김숙희 장관은 이 부분의 얘기를 듣는 순간 귀가 번쩍 터지는 느낌으로 해법의 실마리가 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반응없이 정해숙 위원장의 설명을 진지한 태도로 경청했고 전교조가 일괄타결 제안과 함께 곁들인 ①김영삼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은 멈출 수 없는 시대의 요청으로 적극 호응하고 ②입시위주의 초·중등교육 병폐해소 ③교원양성제도 개선(교대 및 사범대학의 커리큐럼) ④지방교육재정 확충(교부율 상향)을 통한 교육환경과 교원 처우개선 등 지방교육자치의 발전 도모 ⑤국정 전반의 선진화 및 민주화 정착 참여 등 5개항을 듣자 막혔던 가슴이 트이고 체증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교조의 이날(1993. 9.14) 제안은 교육부가 기회를 놓친 것으로 또 다시 놓칠 수 없는 절호임을 간파했다.

 

더구나 정해숙 위원장이 “나는 조직의 리더로써 해직교사들은 더이상 링밖에서 싸우지 말고 교육현장으로 되돌아가서 참교육을 적극 실천함으로써 국제교원사회가 성원한 전교조의 창립의지와 초심을 보여주고 설사 복직 조건이 미흡하더라도 그 문제는 차근차근 해결할 수 있다”고 소회를 털어논 것에 “아! 이거다. 교육의 진수는 모성애, 바로 이것”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특히 정 위원장이 “장기간의 해직으로 지병을 얻어 앓고 있는 교사들의 건강문제와 생활고 등 가족이 함께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복직은 하루도 지체할 수 없는 생존권이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밤잠을 이룰 수 없다”고 호소한 것에 “눈물이 핑 돌더라”고 말했다.

 

 

해직교사 가족 눈물로 호소

 

1993년 9월10일엔 전교조 정해숙 위원장에게 해직교사의 부인 중 한사람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교육부는 해직교사들이나 전교조의 분열을 노리기 위해 고약한 조건을 내놓았지만 전교조 쪽에서 차라리 정부의 제안을 모두 수용해버림으로써 그들을 역이용해야 합니다. 말없이 아픈 마음으로 해직을 감수했던 제 남편과 같은 조합원… <다음 호에 계속>